천국 가는 8계단이라는 시리즈 설교(1)
이 글은 앞서 다섯 차례에 걸쳐서 말씀드린 [거짓 목자를 모신 교회의 슬픈 예배를 드리지 않기 위한 증언]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가 허망(虛妄)함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사례를 들자고 하면 이런 글을 책 한 권으로 써도 다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통상적이고 일상적인 거짓 설교 중에도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거짓말 설교의 예를 한 가지 더 들겠습니다.
여러 해 전이어서 정확하게 어느 해였는지 지금 금방 기억해낼 수 없습니다만 다만 그 시기는 4월 마지막 주일에서 시작해서 8주간 연속 시리즈 설교를 하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 그렇게 기억하느냐 하면 설교 내용이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 또 성령강림주일들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해 봄이 되자말자 2주간 유럽 유람을 다녀오셨습니다. 물론 명목은 유람이 아니라 유럽 선교 활동을 지원하는 무슨 그런 행차를 둘러댔습니다만 저는 개인적 판단으로 유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권사님, 집사님들의 생각을 공유한 것입니다. 사실 그 해의 유럽 유람은 그 해 처음이 아니고 그 전해에 이미 비롯되어 매년 그 시기이면 아주 고정 행사처럼 아주 떳떳하게 내세우면서 매년 시행했습니다. 최근 두어 해 뜸한 것은 아마도 코로나 탓일 것입니다. 아마도 크게 좀이 쑤시고 짜증이 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못돼먹은 유럽 유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할말이 너무 많습니다만) 설교에 대한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분은 다녀오자 곧장 그의 유람에 대하여 권사님들 사이에 좋지 않은 평판의 말이 돌고 있다는 것을 들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이것이 오해라는 점을 깨닫도록 해명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입니다. 그래서 준비해서 시작한 설교가 [천국 가는 8계단]이라는 시리즈 설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그 해 4월 마지막 주에 이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로부터 앞으로 8주간 우리가 천국을 가려면 8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을 설교하면서 유럽 선교의 성과를 매주 연속적으로 보고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설교의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는 성결해야 한다면서 그 성결의 조건으로 열거한 여덟 가지 덕목을 말한 것으로 베드로후서 1장 5-7절 말씀입니다. 참고로 그 본문을 그대로 옮겨 적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즉, 그 시리즈 설교의 취지를 요약하면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그리고 사랑 여덟 가지의 덕을 차례로 계단을 딛고 올라가듯이 이루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실은 그 구절 앞뒤 문맥으로 보아 천국가는 조건이나 계단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즉, 그 말씀 바로 앞에 해당하는 4절 후반부는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으로, 신성한 성품이란 곧 심령이 성결케 되는 것을 말함일 것입니다. 천국은 구원받은 자에게 이미 약속된 것으로 별도로 또 무슨 공덕을 쌓아야 되는 것은 아님을 바울 사도의 많은 편지들로 확인되고 있음을 우리는 다 압니다. 이 성결함은 천국 가는 약속이나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성품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리즈 설교는 그 취지부터 잘못된 것에서 시작되고 있으니 그 설교가 올바를 수 없음을 미리 예고하고 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4월 마지막 주인 첫 번 설교는 그가 바로 말한 바가 있으니까 그 자리에서 이상한 소리를 할 수 없었음인지 무흠하게 지나갔습니다. 어떻게 첫단추는 제대로 채운 것 같았습니다. 설교 시작과 함께 약속한 대로 스페인 어디에선가의 교회에서 집회를 했을 때의 이야기를 예화로 이야기함으로써 아마도 유럽 유람이 유람이 아니라 선교 활동이었음을 강조하고, 여덟 단계의 첫 단계인 믿음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믿음에 대한 설교야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바로 듣게 되는 내용으로 신자라면 이미 나쁘게 표현해서 귀딱지가 앉았고 바르게 말한다면 이미 신자의 심령심령마다 사랑과 소망과 함께 확실하게 자리매김 되어 있는 제일 큰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갖 원입한 신자나 어린이나 청소년이 아니라면 들으나마나 한 설교일 수도 있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설교가 그릇되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서 라도 신자로 하여금 배신하거나 불성실한 신자가 아니라 확실한 신자(믿는 자)로 유지되게 해야 하니까요.
문제는 그 다음 주일부터 이어지는 둘째 셋째 이하 여덟째까지의 설교입니다.
둘째 단계라고 하는 5월 첫주일의 설교 제목은 ‘천국 가는 둘째 계단 덕’이었습니다.
그 제목을 보면 ‘덕’에 대한 설교, 참으로 우리 교회에서 듣기 어려운 설교 제목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 ‘믿음’과 비교하면 이는 너무 낯선 설교 제목이라는 점에서 믿음에 대한 설교와 완전 비교되는 느낌을 갖게 하는 제목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귀 기울이게 하는 설교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설교 내용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어린이주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린이주일에 걸맞는 아주 멋진(?) 설교를 해내셨습니다.
누가 들어도 당연한 절기 설교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설교 제목을 보지 않고 들었다면 아주 자연스럽고 훌륭한 자녀 양육에 대한 교양강좌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자녀를 제대로 양육하는 것이 천국 가는 계단으로서 덕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하기야 자녀 양육을 잘하는 것도 좋은 덕목, 나아가서 부모된 자의 필수불가결의 덕목이기는 하지요. 하, 그렇다고 설교 제목을 천국 가는 둘째 단계 덕이라는 제목의 설교에 맞는 설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이는 마치 고기 선물이라고 받았는데 뜯어보니 자두 한 상자가 담겨 있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잘 익은 자두, 보기 좋은 과실 열매 한 상자가 나쁜 선물일 수는 없지만 고기 선물이라고 보내온 것이 그것이라면 좀 어이없지 않겠어요? 제가 고기 선물보다 자두 선물이 못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지요. 속였다는 것이고,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덕에 대한 설교를 기대했는데 자녀 양육에 대한 교양강좌를 들었으니 더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어린이주일이니까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설교 제목을 “올바른 자녀 양육” 쯤으로 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최근(2021. 08. 29)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위원의 칼럼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서둘러야 할 일을 게을리해 재난을 키우는 것이 태만(怠慢)이다. 해서는 안 될 일, 불가능한 일에 팔을 걷어 붙이는 건 아둔이다.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방법을 그르쳐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무능(無能)이다. 포장지에 내용물과 다른 상표를 붙여 판매하는 건 속임수다. 어느 직장이든 해고(解雇) 사유에 해당한다. 그러나 정권이 이런 일을 모아서 하면 정권 재창출에 도전할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바로 우리 목사님 같은 분은 해고 사유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날(어린이주일) 설교에는 유럽 선교에 대한 보고라고 할 어떤 빌미도 없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멋진 교양강좌에 취하여 그런 보고를 하지 않아도 깜박 잊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리라고 자신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그랬다면 그것은 교회를 속인 것이요, 하나님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속인 행위입니다. 약속을 저버린 것이요, 마땅히 해야 할 보고도 하지 않은 불실함을 면할 수 없단 말입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