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가는 8계단이라는 시리즈 설교(2)
어린이주일 뿐 아닙니다. 그 다음 주일은 어버이주일이었지요.
그날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초-중-고 교회학교 학생들도 2부 대예배에 참예하게 해서 김목사의 설교를 듣게 했습니다. 어린 학생, 자라는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까지도 어버이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설교를 듣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참으로 기특한 생각이요 목회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효도에 대한 것은 늙은이가 듣기보다 자라는 세대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무랄 수 없지요. 그리고 그러한 교육을 담임목사가 사명감을 가지고 직접 들려주어서 우리 교회 어린이를 포함해서 자라는 성장 세대로 하여금 효도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지니게 하는 것은 누구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지요.
그런데 목사님은 거기서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왕에 교회적으로 약속한 바 8주 동안 연속적으로 설교하기로 한 시리즈 설교, 천국으로 가는 8계단 설교도 해야 하고, 부모 효도에 대한 설교도 해야 하게 생겼으니 어느 것을 챙기고 어느 것을 버릴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못난 제가 목사의 처지에 처하게 되면 그것으로 고민할 게 아니라 절기 설교는 그 절기에 맞추어 하는 것이 아무래도 의미도 있고 효과도 클 것이기 때문에 절기 때는 하지 않고, 다른 주간에 중뿔나게 하기는 좀 민망스러울 테니까 그 주일에는 효도 설교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에게 한 마디로 양해를 구하면 되지요.
“오늘은 어버이주일이고, 청소년들까지 이 예배에 불러다 놨으므로 그에 맞는 설교를 하겠다. 따라서 약속한 시리즈 설교는 한 주간 뒤로 미루겠다. 양해해라.”
고 하면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당연히 양해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리수를 써느라고 거짓말할 필요도 없이 두 가지 설교로 갈등을 빚을 이유가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목사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탁월하신 지혜를 발휘하여 꼼수를 쓰기로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요? 설교 제목은 시리즈 설교처럼 정하되 실제 설교는 어버이에게 효도하라는 설교를 하는 것이지요. 하하하. 놀랄 일이지요? 우리 김 목사에게는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적 노릇이니까요.
그러니까 설교 제목은 “천국 가는 계단 3. 지식”이 되고, 설교 내용은 자녀들아 효도는 축복의 약속이 있는 첫 번 계명이란다-하고 의젓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천국 가기 위한 지식은 효도라 그런 뜻이 되나요? 흐흐흐. 아마도 효행은 약속 붙은 계명이라는 지식을 말하는 거겠지요? 시험 문제에 나오면 그렇게 답을 하면 되는 지식인가요?
그렇게 하면 그의 설교 기록, 예컨대 교회 홈페이지에 남는 설교 동영상의 목록에는 시리즈 설교의 제목이 8주간 계속 빠짐없이 건너뛰거나 해서 보기 흉한 모습이 나타남 없이 가지런하게 시행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행태가 그 다음 주에도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시리즈 설교 천국 가는 계단 4. 절제.
이 주일은 공교롭게 성령강림주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과 절제를 연계하는 지혜를 발휘하셨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5:22 참조) 중 마지막 하나가 절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런 노릇이 아닐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덕목 행렬에서 겹치는 것이 절제 뿐 아니니까 예컨대 사랑이나 인내 같은 것을 제목으로 설교할 때도 똑같이 성령의 열매를 들먹거릴 수 있겠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뭐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하기야 목사님이 자기 설교에 대한 비방(그는 비판을 비방이라고 합니다.)을 듣고 변명한 적이 없으니까 변명같은 거 전혀 고려하지 않겠지요. ㅎㅎㅎ
하여간 그 8주 동안의 7주간에는 유럽 유람에 대한 변명도 보고도 없었으니까 그것은 그 유람이 유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자인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그는 그 이후에도 유럽 선교를 계속 다녀왔지만 그 결과에 대한 보고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교인들 앞에서는. 하다못해 자랑삼아 사진이나 영상이라도 보여줄 법한데 전혀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뭘하고 돌아다녔는지 알 수 없었다니까요.
도대체 유럽 같은 신앙의 선진국에 무슨 선교가 필요한 것인지부터가 이상야릇하지 않습니까? 핑계는 지금 유럽은 교회가 텅텅 비었다는 겁니다. 유럽인들이 교회당에 나와서 주일 성수할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거지요. 그만큼 신앙적 황무화가 심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심을 다시 일깨우도록 각성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지금 유럽에는 이슬람 신자들인 중동인들의 유입이 극성스러워서 원래 기독교 교회당이던 곳을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심각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정말 한국 기독교의 선교가 시급하다는 겁니다.
말인즉슨 그럴사한데 그가 그러면 거기에 가서 유럽인들이나 그곳에 들어와 사는 중동인이나 이슬람 교도를 상대로 어떻게 활동하고 다녔는지 도무지 보고가 없으니 그 말을 믿겠습니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유럽의 한인 교회를 찾아가 집회 인도한 기록들만 가끔 설교 때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유럽인을 상대로 한 선교가 아니라 유럽의 한인 목회를 지원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지요. 그 교회 2박3일 집회해주고 목사를 앞세워 관광다니고 나머지 열흘을 채우고 귀국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입니다. 유럽 땅 여기저기에 흩어져 체재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한인 목회 활동을 선교라고 부르는 거였는데 그게 왜 선교입니까? 하기는 국내에서 하는 전도 활동도 선교의 개념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니까 교민 목회도 선교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미국에 그 천지삐까리로 깔려 있는 한인 교회의 목회활동도 선교활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죠? 기가막혀서 원.
그래서 유럽에다가 신학교를 세우자면서 매년 거금을 비축하는 예산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어이없어서 제가 나서서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냐면서 반박해서 취소된 일도 있었습니다. 아니 유럽 같은 신학 선진국에 왜 한국 교회가 나서서 신학교를 세웁니까? 안 그렇습니까? 유럽에 신학교가 없어서 세워줍니까? 하여간 도무지 가당찮은 일을 생각해내는 그 발상의 밑바탕이 되는 그 의식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쯧쯧.(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