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1,18-20
18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19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20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나는 하느님을 안다"(요한 7,29)고 담대하게 선언하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그 반향이 사뭇 컸나 봅니다.
많은 대중들은 "그래 저분이 바로 그 예언자야"(요한 7,40) 하기도 하고, "저분이 메시아야"(요한 7,41) 하며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표합니다. 식자층 중에서도 일부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은 했었나 봅니다. 니코데모 같은 사람을 보면요.(요한 7,50 이하)
그렇지만 일반 서민들과는 달리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최고 의회 의원들과 바리사이들 중 다수는 "갈릴래아에서는 결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요한 7,41)는 논리로서 그렇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문단속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으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나신다"(요한 7,42)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주로 활동을 시작하셨지만, 원래 다윗의 후손이고 베들레헴 출신임을 몰랐을 뿐이기에 스스로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니코데모의 말대로,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요한 7,49) 이라던 그들은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해야 한다"(요한 7,51)는 율법을 스스로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언자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게"(예레 11,19)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안에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에 대해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이들과, 예수님을 단죄하는 이들, 변호하는 이... 마치 재판정을 방불케 하는 대화가 난무하는데 예수님은 침묵으로 존재하십니다. 이렇게 왈가왈부만 하다가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7,53)고 하네요. 여전히 심판은 유예되고 유다인들은 훗날 이방인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심판하게 됩니다.
어제 독서인 지혜서에서 들었던 악인들의 목소리를 오늘 예레미야서 안에서 실제로 생생히 만납니다. 예레미야는 지혜서 저자가 언급한 그대로 모함과 음모와 박해를 겪고 주님께 절규하며,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다"(예레 11,20)고 호소합니다.
바로 예수님도 이런 마음이셨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송사를 맡기셨기에 당신에 대한 호평도 악평도 의연할 수 있으시고, 오해나 모함에도 초연할 수 있으십니다. 주변 사람들이 재판관부터 검사 변호사 증인 역할까지 다 맡아서 떠드는 가운데, 오직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의 뜻과, 기꺼이 그 뜻을 받아 안으신 당신의 응답에만 집중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예수님을 끌고 오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경비병들의 증언이 인상 깊습니다. 바리사이들에 의하면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자들"(요한 7,49), 힘도 권력도 배운 것도 없는 단순한 이들 중 하나인 그들의 직관이 놀랍습니다. 새로운 것을 알아차리는 시각은, 힘과 권력과 배운 것들의 필터가 내면의 욕망과 두텁게 겹쳐질 때 자칫 더 흐려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보는 직관은 맑고 밝게 비워진 가난한 영혼의 시력이니까요.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말씀에 경외감을 느끼는 성전 경비병들과, 자기들이 고수해 온 질서와 다를 것 같다는 이유로 새로운 말씀을 경계하는 식자층, 권력층, 지도층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길 꺼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성경과 율법을 운운합니다. 심판할 때 정당하게 밟아야 하는 절차를 성경 안에서 찾아 논의하자는 니코데모와는 달리, 그들은 눈을 메시아의 출생지가 어디냐에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닫아버린 여러 가능성들이 실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단서가 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과 성경은 그들의 지위와 권력, 기득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두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할 수 있다는 걸 역사는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해결책까지도 말씀 안에 심어 놓으셨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복음 환호송)
내 눈으로 읽고, 내 마음에 다가오신 말씀이 자기애와 탐욕에 오염되지 않고, 왜곡되거나 굴절되지도 않고 순수한 그 상태로 내 존재 안에 스며들려면, 무엇보다 "바르고 착한 마음, 말씀을 간직하고 머무름, 인내"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그저 자기 용도대로 편집해 이용하려는 유혹에 알맞는 처방전입니다.
누군가에게 송사를 맡긴다는 건 무한한 신뢰를 전제로 하지요. 말 한 마디, 뉘앙스 하나까지 물고 늘어져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재판정에서 침묵으로 모든 걸 받아 안으며, "정의롭게 판단하시며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예레 11,20) 하느님께 오직 희망을 두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이긴 재판이 아닐까 합니다.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신뢰는, 오늘 복음 안에 목소리조차 드러내지 않으셨던 그분의 존재가 더 깊고 굵직한 존재감으로 남는 이유입니다.
벗님 여러분, 우리 속담에 "개천에서 용이 나온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요즘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하네요. 부익부빈익빈이 가속화되어 있는 집안에서 용이 나오지, 없는 집에서는 미꾸라지밖에 나오지 못한답니다. 참으로 씁쓸한 현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었나 봅니다.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땅, 버림받은 이들의 땅이어서 그곳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가 없다고들 생각하였답니다. 그러나 보란듯이 예수님 같은 인물님이 개천에서 나온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상고 출신의 촌놈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자 기존의 엘리트층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그를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의 엘리트 집단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갈릴래아 촌놈을 메시아로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벗님 여러분은 어떠세요? 누군가가 배운 것이 적고, 가진 것이 적고, 좋은 직장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은연중에 무시하지는 않겠지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소위 배운 것이 많고, 가진 것이 많고, 잘 나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결코 오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 내일이나 한결같이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할 수가 없고 비천한 사람을 예수님 바라보듯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지요.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요 친구인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비천한 사람들 가운데서 자주 만나시는 여러분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