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 5 | 1572 | 임신 | 隆慶 | 6 | 1 | 12월 21일, 태어나다. |
선조 | 7 | 1574 | 갑술 | 萬曆 | 2 | 3 | 부친 承旨公의 상을 당하여 季父 洪聖民이 돌보다. |
선조 | 21 | 1588 | 무자 | 萬曆 | 16 | 18 | 獨石公 黃赫에게 수학하다. |
선조 | 23 | 1590 | 경인 | 萬曆 | 18 | 20 | 司馬試에 합격하다. |
선조 | 25 | 1592 | 임진 | 萬曆 | 20 | 22 | 모친 柳夫人을 모시고 關東으로 피난가다. |
선조 | 27 | 1594 | 갑오 | 萬曆 | 22 | 24 | 文科 別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다. |
선조 | 30 | 1597 | 정유 | 萬曆 | 25 | 27 | 유부인을 省覲하러 平壤에 갔다가 난을 피해갔다는 許筬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다. |
선조 | 32 | 1599 | 기해 | 萬曆 | 27 | 28 | 성균관 전적, 예조 좌랑, 형조 좌랑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다. |
선조 | 33 | 1600 | 경자 | 萬曆 | 28 | 29 | 정언, 수찬이 되었다가 이조 좌랑이 되다. |
선조 | 34 | 1601 | 신축 | 萬曆 | 29 | 30 | 조사 顧天埈이 오자 朴東說, 李安訥 등과 함께 李廷龜의 종사관으로 선발되다. |
선조 | 35 | 1602 | 임인 | 萬曆 | 30 | 31 | 鄭仁弘의 탄핵을 받다. |
선조 | 36 | 1603 | 계묘 | 萬曆 | 31 | 32 | 예조 정랑이 되었다가 경기좌도 量田御史가 되다. |
선조 | 37 | 1604 | 갑진 | 萬曆 | 32 | 33 | 星州 牧使가 되다. |
선조 | 41 | 1608 | 무신 | 萬曆 | 36 | 37 | 교리가 되다. ○ 宣祖 승하시 國葬祔廟都廳에 차출되다. ○ 사성, 응교가 되다. ○ 賜暇湖堂에 선발되어 조부를 이어 삼대가 모두 湖堂에 뽑히는 영광을 누리다. ○ 重試에 합격하다. |
광해군 | 1 | 1609 | 기유 | 萬曆 | 37 | 38 | 都司 迎慰使로 龍灣에 가다. ○ 江原道 觀察使가 되다. 政令이 엄명하고 賦役을 줄여 惠政을 행하다. |
광해군 | 2 | 1610 | 경술 | 萬曆 | 38 | 39 | 동부승지가 되어 승문원 부제조를 겸하다. ○ 예조 참의가 되어 聖節使로 燕京에 다녀오다. |
광해군 | 4 | 1612 | 임자 | 萬曆 | 40 | 41 | 다시 승지가 되어 城池의 수축을 건의하다. ○ 金直哉의 誣獄에 妻父인 黃赫이 화를 입자 변호하다 파직당하다. |
~ | ~ | ~ | ~ | ~ | ~ | ~ | 이후로 세상에 뜻을 끊고 詩酒로 즐기다. ○ 광해군의 혼정이 심해지자 金瑬, 申景禛, 具宏 등과 弘濟院에 모여 仁祖를 추대할 것을 모의하다. |
인조 | 1 | 1623 | 계해 | 天啓 | 3 | 52 | 反正 이후 병조 참의, 대사간, 우부승지가 되다. ○ 靖社功臣 3등에 녹훈되어 益寧君에 봉해지다. |
인조 | 2 | 1624 | 갑자 | 天啓 | 4 | 53 | 李适의 亂이 일어나자 慈殿을 모시고 御駕를 扈從하여 피난길을 주선하다. ○ 환도 후 扈從의 공으로 우승지, 병조 참판, 부제학이 되었다가 도승지가 되다. |
인조 | 4 | 1626 | 병인 | 天啓 | 6 | 55 | 조사 姜曰廣이 나오자 迎慰使로 차임되다. |
인조 | 5 | 1627 | 정묘 | 天啓 | 7 | 56 | 胡亂이 일어나자 상을 호종하여 江都로 들어가다. ○ 가을,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이조 참판이 되다. |
인조 | 6 | 1628 | 무진 | 崇禎 | 1 | 57 | 柳孝立의 역모를 고변하여 寧社功臣에 녹훈되다. ○ 한성 판윤으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 ○ 얼마 뒤 대사헌, 예조 판서가 되다. |
인조 | 7 | 1629 | 기사 | 崇禎 | 2 | 58 | 우참찬 겸 홍문관대제학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 판서가 되다. ○ 衙門 貿販의 폐단을 진달하여 民力을 휴식시킬 것을 주장하다. |
인조 | 8 | 1630 | 경오 | 崇禎 | 3 | 59 | 이조 판서가 되다. |
인조 | 9 | 1631 | 신미 | 崇禎 | 4 | 60 | 章陵追崇 의논시 李貴와 대립하여 체직되다. |
인조 | 11 | 1633 | 계유 | 崇禎 | 6 | 62 | 좌참찬, 예조 판서가 되다. |
인조 | 12 | 1634 | 갑술 | 崇禎 | 7 | 63 | 병조판서 겸 제학이 되다. ○ 詔使 盧惟寧이 나오자 館伴으로 차출되다. |
인조 | 13 | 1635 | 을해 | 崇禎 | 8 | 64 | 元宗祔廟禮 이후 崇祿으로 자급이 오르다. ○ 예조 판서가 되어 양관 대제학을 겸하다. |
인조 | 14 | 1636 | 병자 | 崇禎 | 9 | 65 | 우의정이 되다. 좌의정이 되다. ○ 여름,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趙絅에게 墨相이라는 탄핵을 받자 江上에서 대죄하며 40여 차례 呈訴하여 면직되다. ○ 12월, 淸兵이 침입하자 다시 좌의정이 되어 상을 호종하고 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다. ○ 崔鳴吉과 함께 和議를 주장하고 淸 진영을 12차례나 왕래하면서 講和를 주선하다. |
인조 | 15 | 1637 | 정축 | 崇禎 | 10 | 66 | 모친상을 당하다. |
인조 | 17 | 1639 | 기묘 | 崇禎 | 12 | 68 | 服을 마치고 영의정이 되다. |
인조 | 18 | 1640 | 경진 | 崇禎 | 13 | 69 | 淸人이 明과의 교통을 의심하여 이조 판서, 도승지 등과 함께 義州에서 조사를 받다. |
인조 | 20 | 1642 | 임오 | 崇禎 | 15 | 71 | 병으로 사직하고, 益寧府院君이 되다. |
인조 | 22 | 1644 | 갑신 | 崇禎 | 17 | 73 |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가 座次로 좌의정이 되다. |
인조 | 23 | 1645 | 을유 | 順治 | 2 | 74 | 風變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災異를 그치게 할 방도를 진달하다. ○ 昭顯世子 사망 후 元孫을 책봉할 것을 주장하다. ○ 8월 8일, 병으로 자택에서 졸하다. ○ 積城 先塋에 장사 지내다. |
숙종 | 32 | 1706 | 병술 | 康熙 | 45 | | 증손 洪九采가 문집을 중간하다.(李景奭의 序) ○ ‘文靖’으로 시호를 내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