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서울 성동구 서울숲과 함께 종로구 탑골공원 두 곳을 다녀왔다.
서울숲은 지난 '22.12.4일날 다녀온 곳이다. 그 당시 서울숲 탐방에 이어 선약된 연속 스케줄이 있어 아쉬움 속에 탐방을 끝마친 관계로 오늘 다시 투어에 나섰다. 서울숲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각종 식물과 우거진 수목이 많았지만 역시 푸르른 계절만큼은 못하구나 하는 아쉬움 속에 꽃피고 새 우는 봄에 다시 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귀가하면서 전철 1,3,5호선이 지나는 종로3가역에 내려(1번 출구) 탑골공원을 들렀다. 서울에 살면서 한번도 역사의 현장에 가보지 못한 소홀했던 마음을 탓하며 탐방길에 올랐는데 탐방하고 나올 땐 3.1독립선언의 발상지라는 엄숙한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으며, 진작 와보지 못한 회한이 들었다. 특히, 1919.3.1 독립선언 장소이거니와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석탑'이 있었다. 국보 제1호가 남대문(숭례문)이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제2호 국보에 대해서는 듣고 익힌 바 있으나 오랜 세월 잊고 살았기에 살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서울숲의 I SEOUL U 조형물
군마상(2005.5.7, 어반아트 제작)
군마상(2005.5.7, 어반아트 제작)
메타세콰이어 숲길
살구나무 숲
살구나무 숲과 야외식탁
호수
은행나무 숲
탑골공원의 입구 '삼일문'
탑골공원은 서울에 최초로 만들어진 근대식 공원이다. 만들어진 시기를 두고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졌다. 이 공원은 고종 연간 총세무사로 활약한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의 건의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개장 당시에는 빈 땅에 울타리를 둘러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은 정도였으나 1910년부터 점차 시설물을 늘려갔으며, 1913년부터는 매일 개방하였다. 탑골공원은 3.1독립운동의 점화지로 잘 알려져 있다. 1919.3.1, 4~5천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이곳의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여기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79.3.1 독립운동 60주년을 맞아 공원을 정비해 넓혔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에 이름을 탑골공원으로 정했다. 이 일대는 세조 때 세운 원각사 터로서 이곳에는 현재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과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남아 있고, 3.1운동을 기념한 독립운동 부조판과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있다.
탑골공원에 입장하여 입구쪽을 바라본 '삼일문'
탑골공원에 입장하여 입구쪽을 바라본 '삼일문'
독립선언서 부조판
독립선언서는 1919.3.1 독립선언 당시 이곳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가 낭독하고 배포했던 기미독립선언서를 부조하여 새긴 판이다. 새겨진 독립선언문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원케 하노라...(이하 생략)
탑골공원 내부 전경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1)
손병희 선생의 호는 의암, 동학과 천도교 지도자,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861.4.8 충북 청주 출생으로 1882년에 동학에 입도하여 1897년 동학의 제3대 교조가 되었다.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902년 일시 귀국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이광수 등 청년 64명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켰다. 1905.12.1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고 1906.1월 귀국하여 일간지 만세보를 출간하고 이용구 등 친일 교인 60여 명을 출교시켰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고 이후 전국적으로 30여 개의 학교를 인수, 운영하거나 지원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 독립선언을 주도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던 중 1920.10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1922.5.19 옥고 후유증으로 상춘원에서 순국하였으며,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비문 ***
여기는 민족의 얼이 깃든 곳이다. 민족의 피가 끓는 곳이다. 민족의 횃불이 들린 곳, 민족의 함성이 들린 곳이다. 자유와 정의의 샘터요 미덥고 든든한 민족혼의 고향이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빛나는 행적은 3.1 운동을 선구했던 일이요 또 그날 만세를 처음 외쳤던 곳이 여기라 이 터에 그의 동상을 세워 우리들의 자손 만대에 그 뜻과 사실을 길이 전하려 한다. 문정화는 조각하고, 이은상은 글을 짓고, 김충현은 글씨를 쓰고, 손재형은 제자하고,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동포들의 성금을 모아 이 동상을 세우다. 1966.5.19.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2)
탑골공원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대원각비는 1471년(성종2)에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11년) 흥복사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7년(세조13)에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되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4.94m이며, 연산군 때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하면서 원각사는 빈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의 옛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탑골공원 팔각정
팔각정은 1902년(광무 6)에 탑골공원 안에 지은 팔각형 정자다. 이곳은 1919.3.1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팔각정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 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원각사지 10층석탑
이 탑은 세조가 세운 원각사 터에 남아 있는 높이 12m의 10층석탑이다. 지금 견해로는 10층석탑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의 탑을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한자의 아자 모양의 기단은 세 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 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용을 휘감은 기둥, 목조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 같다. 탑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10층석탑(국보 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지금은 눈, 비, 바람 등으로 부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유리집 안에 보관,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