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 사건
萬寶山事件. Wanpaoshan Incident.
1931년 7월 1일 중화민국 국민정부[1]의 길림성(吉林省) 장춘현(長春縣) 삼성보(三姓堡)[2][3]에서 발생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의 소요 사태.
단 1명도 죽지 않고 끝났지만 그 다음날인 1931년 7월 2일 조선일보에서 무려 200명의 재중 한인 교포가 살해당했다는 오보를 냈고 그 여파로 7월 4일 평양과 인천 등지에서 100명이 넘는 화교가 참혹하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931년 화교배척폭동과 1931년 평양화교 학살 문서 참조). 그리고 그 결과로 수천 명의 화교 난민이 테러 위험을 피해 한반도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1931년 평양 화교학살
1931년 7월 4일 오후 6시, 평양 이문리 길가에서 조선인 3명이 지나가던 중국인 2명을 구타했다. 일본제국 경찰은 이를 제지했고 이 때만 해도 큰일은 없었다. 그 날 밤 평양 중국 요리집 동승루에서는 조선인 20여 명이 달려가서 "굳게 닫아걸은 문을 열라"고 소동을 일으켰다.[6] 7월 4일 저녁 진남포(鎭南浦)의 중국 영사 서수(徐隨)는 경성부와 인천에 배화[7]폭동이 일어난 걸 알고 5일 새벽 평안남도와 황해도, 두 도청의 경찰부장과 평양경찰서장에게 전문을 보내고 진남포 경찰서장과 면담하여 화교와 지역 상회를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5일 오전 11시 평양경찰서 경찰서장 안도(安藤) 고등계주임은 평양상회 상무위원 장경현(張景賢)에게 이렇게 말했다.
폭동이 발생하면 본서가 반드시 확실하게 보호할 것인데, 만일 조선인들이 도발할 경우 양보하기 바라며 일찍 문을 걸어 잠그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8].
평양에서 격렬한 폭동이 벌어졌던 7월 5일 밤, 치안 책임자들은 연회에 출석하는 바람에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9] 그리고 안도 주임의 말과는 다르게 밤 11시에 엄청난 폭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손전등과 곤봉, 칼, 도끼, 돌 따위 흉기를 들고는 조를 나눠 화교를 살상하고 화교들의 가게와 집을 파괴•약탈하고 불태워버렸다. 주일공사가 보기에 군중은 조직이 잘 갖춰진 집단처럼 보였다. 이 군중들의 폭동은 새벽까지 이어졌으나, 일본제국 경찰은 무장을 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막지 못했다. 7월 8일 기준으로 사망자는 109명, 부상자가 163명, 생사불명자 63명이었다.[10]
5일 오후 8시경부터 평양부 신창리에 있는 중국요리점 동승루 앞에 조선사람 수백명이 모여들어 그 곳을 습격하였다. 점점 모여든 군중들은 합세하여 종로통으로 나아가며 대로변에 있는 큰 중국인 상점들을 차례차례 습격하였고, 골목에 있는 중국인 가옥까지 습격하였다. 피습된 상점은 상품이던 가구던 남아있는 것 없이 완전히 파괴를 당했고 남아있던 중국인도 피해를 입었다.
폭동이 이런 식으로 6일 오전 3시까지 이어지면서 전차는 오전 6시가 돼서야 겨우 운행됐다. 평양 내 중국인 소유의 집은 거의 습격을 당했고 보통강변에서 농사를 짓는 중국인 가옥도 소각되었다.[11] 평양경찰서 근무자들이 총출동했고 헌병과 보조헌병 70여명과 소방대원 약 200명이 출동해서 경계하였다. 평양근교에서 피난해 들어온 사람까지 포함한 중국인 피난자 3,100명은 평양경찰서 광장에 수용되었고 400여명은 대동경찰서에서 수용했다. 평양경찰서는 이번 테러사건 주모자로 인정된 조선인 57명을 검속했고 폭동에서 경계하던 경관 28명은 중경상을 입었다.[12]
이 일로 많은 화교들이 동남아시아나 일본등 외국으로 빤쓰런했고
아직도 화교 짱깨들이 한국을 그렇게 증오하고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