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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의 주 섬 |
위도 |
북위 35°00′ |
경도 |
동경 126°09′ |
면적 |
28.20km2 |
해안선 길이 |
48.5km |
인구 |
834가구, 1,619명(2013년) |
증도라는 지명이 증도의 어제와 오늘을 상징하는 듯해
재미있다. 증도는 물이 귀하여 물이 ‘밑 빠진 시루’처럼 스르르 새어 나가 버린다는 의미의 시루섬이었다. 한자로는 시루 증(甑) 자를
써서 증도(甑島)라 하였다.
원래는 앞시루섬과 뒷시루섬 그리고 우전도라는 3개의 섬이었으나 앞시루섬과 우전도가 간척으로
합해져서 전증도가 되고 뒷시루섬이 후증도가 되어 2개의 섬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 두 섬 사이를 간척하여 하나의 섬으로 합쳐지면서 오늘날 ‘더한 섬, 늘어난
섬’이라는 뜻의 증도(曾島)가 된 것이다.
증도는 삼국시대에 백제의 고록지현에 속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압해군의 영속인 임해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광군에 속하였다가 나중에 나주목에 편입되었다. 숙종 8년(1682)에는 지도진에 속하여 목장이 설치되었다. 그 후 고종 32년(1895) 신설된 지도군에 이속되었고, 1914년에 무안군 지도면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1983년 증도면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대초리를 후증도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앞실이라 불렀다. 그 후 마을에 대추나무가 많이 자란다 하여 대치동이라 부르다가 다시 대초리라고 개칭하였다. 대초리는 대초, 덕정, 돌마지, 화도, 등선, 버지, 장고, 사동을 합한 지명이다.
우전리라는 지명은 기러기떼가 한겨울을 지내고 간다 하여
깃밭이라 부르다가 그 후에 우전으로 개칭하였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저어새, 노랑부리저어새, 쇠기러기, 큰기러기 등 겨울철새들이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태평염전
저류지에서 국제적 보호종인 저어새 9마리와 노랑부리저어새 4마리가
관찰되었고 해마다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저어새와 노랑부리저어새는 대형 조류로 소형 어류나 새우 등을
잡아먹는다. 증도는 광활하고 오염되지 않은 갯벌과 염전 등의 습지가 존재하여 국제적으로 람사르습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내적으로는 습지보호지역 및 도립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증도 갯벌습지의 저어새 증가는 그동안의 체계적인 갯벌과 습지 보호정책의 결실이며 앞으로도 안정적인 서식지 제공과
지속적인 보호를 해야 할 것이다.
천연기념물인 저어새
천연기념물인 노랑부리저어새
쇠기러기
큰기러기
최초로 이 섬에 들어온 사람은 한양 조씨 조도흥으로
지도 태천에서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이후 김해 김씨가 1618년에, 밀양 박씨가 1638년에 이주해 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증도에 가려면 4개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먼저
전남 무안군 해제에서 지도로 가는 다리를 건너면 지도읍, 그리고
지도에서 다시 다리를 지나가면 서남해안 최대의 수산물 어판장 송도, 송도에서
다리를 건너면 사옥도, 마지막으로 사옥도에서 증도로
건너가는 증도대교를 건너야 증도를 갈 수 있다.
증도는 육지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지만 교통수단 때문에 고초가 많았던 섬이다. 60년대
전후 증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걷고, 다시 배를 타고 걷기를 서너 번 반복해야 육지로 갈 수 있는 가장
더딘 섬이었다. 즉, 증도 진번나루터에서 사옥도 지신개선착장까지
나룻배로 노를 저어 가고, 거기서 사옥도의 탑선나루터까지 3km를
걸어간다. 탑선나루터에서 다시 나룻배를 타고 지도까지, 거기서
다시 5km 정도를 걸어가서 다시 나룻배를 타고 육지인 무안 해제로 건너갔으니, 증도 사람들이 뭍으로 건너가기까지 모두 여섯 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연륙이 되기 전, 증도 사람들에게는 나룻배와 연계된 육로편보다 선편이 더 유리했다. 목포까지 3시간이면 갈 수 있고,
지도읍 송도 선착장에서 증도 버지선착장까지 철부도선이 운항하게 되면서 차를 싣고 드나들 수 있었다.
증도는 섬이 커서 소금 생산과 논농사를 많이 하지만, 유통이 큰 문제였는데 차도선(車渡船)이 대형차들을 싣고 와 소금과 벼를 수송하는 것은 거의 혁신이었다. 철부선이 섬에 미치는 영향력이 어디 이 섬뿐일까마는 증도는 특히 다른 섬들보다 기쁨이 더하였다.
증도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관광객들의 차가 들어오면서부터 보물섬으로서의
진가를 보여 줄 수 있는 관광의 섬으로 발돋움을 한 것이다. 2004년에는 지도대교(사옥대교)가 완공되어, 사옥도
지신개선착장에서 증도 버지선착장까지만 배를 타면 되었다. 특히, 야간운항을
하면서 증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났고 지역소득도 높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증도 사람들의 연륙교 혜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들에게 증도와 사옥도가
연륙되었다는 것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위급환 환자를 수송해야 하는데
바람이 많이 불거나 높은 파도 앞에서 절망해야 했던 일, 부모의 임종이나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
등 안타까운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제 사옥도와 연륙이 되면서 사옥도 지신개 선착장과 증도 버지선착장을
연결하던 철부선 증도호는 2008년 3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예전에 증도를 운항했던 차도선(증도호)
버지선착장
증도에서는 1980년대 이전까지는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주변 바다에 어족이 다양하고 풍부해서 전체가구의 26%가 어업에 종사한다. 특히, 간척으로 인한 염전이 크게 자리 잡아 염전업을 운영하거나 종사하는 인구 또한 적지 않다.
증도대교를 건너 증도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염전이다. 간척으로 만든 염전과 농지가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증도와 대조도 두 섬을 잇는 제방을 쌓고, 그 안에 대규모 염전을 개발한 태평염전은 260ha, 한국에서 단일 규모로는 두 번째로 크며 한 해 1만 6,000톤의 천일염을 이곳에서 생산해 낸다. 그러나 수입산 소금이 쏟아져 들어오고 인력난 때문에 지금은 염전도 어려워졌다 한다.
태평염전에서 두 명이 수차를 돌리는 모습
대초리를 지나면 장고마을, 마을 앞 역시 온통 들판이다. 이곳이 우전해수욕장 이라는 명소가
있는 우전리이다.
우전 해수욕장은 백사장을 따라 10만 그루의 해송이 빼곡히 들어찬 한반도 해송숲이 감싸고
있다. 숲 전체의 모양이 한반도 형상을 한 이 숲은 지난해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인 공존상을 받은 명품숲이다. 원래는 우전해수욕장의 모래바람이 주변 농가와
논밭으로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한 방풍, 방사림으로 조성됐다고 한다. 증도면사무소
뒷산에서 내려다보면 숲이 한반도를 닮았다고 한다. 이 해송숲 속에도 산책로가 있는데 모두 4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특히,
갯벌생태전시관을 출발해 한반도 해송숲을 가로지른 뒤 우전해수욕장을 거쳐 짱뚱어다리를 건너는 3코스
천년의 숲길은 산책로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해송숲
갯벌생태전시관
이 숲을 지나면 바로 해변이 나타난다. 4.2km 길이에 최대폭 100m의 우전해수욕장이다. 새의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아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 무인도들이
점점이 떠 있는 수평선이 매우 아름다우며, 맑은 물과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숲 때문에 한층 더 시원스럽다.
해수욕장 왼쪽을 바라보면 백사장 들머리에 별장 같은 건물들이 보인다. 바로 엘도라도라는
전망이 좋은 리조트 시설이다. 엘도라도는 보물섬, 황금도시를
뜻한다. 낙조와 일출을 다 볼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어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다. 유럽의 근사한 리조트를 쏙 빼닮았다. 모든 객실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오션 뷰로 이뤄진 것이 특징이다.
엘도라도 리조트
해수욕장 끝 부분에서 위로 올라가면 나무로 된 데크
시설이 나온다. 모래밭을 끼고 도는 해안 산책로이다. 모든
시설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산책로 따라 걷다 보면 바닷가 쪽 갯바위 위에 설비한 수상레저 탑승장이
나타난다. 그 아래는 선착장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너럭바위가 있어 앉아서 사색하기에도 좋다. 이 주위를 오징어바위라 부르고 있다. 나무계단으로 된 펜션으로 가는
길 중간에 증도 갯벌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엘도라도에서 5분도 채 안 되어 닿은 곳은 우전해수욕장 북쪽 지점. 짱뚱어다리가 있고 서쪽으로 몽골텐트가 있는 곳이다. 해수욕장에는
파라솔과 함께 벤치가 있다. 백사장에 설치된 파라솔과 선 베드는 마치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휴양을 온
느낌을 갖게 한다. 해수욕장 중간을 가르는 나무로 된 다리가 있다. 파라솔
쪽으로 가는 다리다. 모래밭과 공원을 가르는 둔덕에도 벤치를 설치해 두었다. 옆으로 난 소나무숲 길은 모실길 3코스. 모실은 옛 한글 마실의 전라도 사투리이다. 사투리를 살린 길 이름이
정겹다. 이 길을 따라가면 짱뚱어다리와 갯벌전시관을 돌아볼 수 있는 천년의 숲길로 상쾌한 솔숲의 푹신한
흙길을 밟는 코스다.
입구에 짱뚱어다리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이곳 갯벌에 짱뚱어가 많아 붙인 이름이다. 지난 2005년 증도의 갯벌 생태자원을 홍보하기 위해 설치됐다. 길이 470m의 나무 데크 산책로인 짱뚱어다리에서는 살아 있는 증도
갯벌의 생명력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짱뚱어는 눈이 툭 튀어나온 철목어(凸目魚)인데 머리는 크고 몸은 타원형이다. 물이 빠지면 구멍에서 나와 갯벌 위를 살살 미끄러지듯 다니며 먹이를 찾는다.
양식이 안 되는 어종이라 짱뚱어만큼은 순 자연산이다.
짱뚱어다리
짱뚱어
만조 때 이 다리에 서면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이 들고 썰물 때는 염생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갯벌에서 2m 정도 위에 나무로 만들어진 짱뚱어다리를 건너다 중간에 갯벌로 내려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이채롭다. 짱뚱어다리는 중간지점이 볼록한 철제구조에 나무널판을 댄 모양새가 예쁘다. 이곳에서 붉은 해가 바다로 잠기는 것을 바라보는 낙조는 가히 환상적이다.
염생식물원
우전 해수욕장 북쪽에 위치한 짱뚱어다리 반대쪽에는 ‘순기비전시관’이
있다. 다리 앞은 솔무등공원으로 가운데 정자가 있고 주변에 벤치 등 여러 가지 시설물이 있는 간이 소공원이다.
솔무등공원에서 500m 지점에 ‘문준경 순교비’가 있다.
사실 증도는 기독교 성지로 알려진 섬이다. 증도는 섬 주민 10명 중 9명이 기독교인이라 절이나 성당은 하나도 없다. 오직 교회만 있을 뿐이다. 순교비를 지나 계속 가다 보면 방축리와
검색리가 나온다.
검색리에는 해저유물 발굴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이 기념비 앞에는 만들해안의 만들독살이
있는 곳이다. 만들독살은 조선시대부터 얕은 바다의 해안에 설치해 왔다.
석방렴(石防簾)으로도 불리는 만들독살은 간만의
차가 심한 바닷가에 쌓은 돌담이다. 밀물 때에는 물에 잠겼다가 썰물 때에는 그 바닥을 훤히 드러낸다. 밀물을 타고 독살 안으로 들어왔다가 썰물 때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들은 그저 손으로 주워담기만 하면 된다. 독살로 잡은 고기는 그물이나 낚시로 잡은 것에 비해 고통을 덜 받기 때문에 그 맛 또한 좋다고 하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만들독살
만들에는 딱 한 가구가 사는데 60대 김정석씨가 31년 전에 건간망을 벼(나락) 300섬에 사서 들여왔다고 한다. 사시사철 각종 고기가 많이 잡히는데 새우, 멸치, 강달어, 밴댕이, 숭어
등을 건진다. 5월과 6월에는 50드럼 정도의 새우를 잡는다고 하였다.
보통 4월부터 11월까지 독살에 나가는데, 물이 빠지는 시간에 바다로 나가기 때문에 한밤중에도 바다에 나가는 수고를 한다. 뿐만 아니라, 김과 새우 양식도 하지만 농사를 짓는 것보다 훨씬
높은 소득(1년, 5,000만 원)을 올린다. 바닷가에서 물때에 따라 고기를 잡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새우 양식장
만들해변에 설치한 그물
1960년대에 목포와 증도를 운항했던 여객선
바로 옆에는 조그마한 무인도에 트레이저 700년 전의 약속이란 카페가 있다. 이곳은 700년간 바다 속에 잠들어 있다 빛을 본 송·원대 유물이 발굴된 해역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증도 해저 보물선 발굴해역 부근이라 송 · 원대의 선박을 원형대로 재현한 배 모양의 카페이다. 1층은 쉼터와 카페, 음식점으로 증도에서 잡히는 계절별 생선회를
맛볼 수 있고, 2층은 자료 전시실로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청자, 백자 등 유물의 모형 17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검색리에서 증도대교 방향으로 가면 소재지인 증동리가 나타난다. 중동리를 지나면 바로 증도대교로
이어진다. 다리 밑으로 길게 선착장이 있다. 바로 광암나루터로
원래 배를 타고 왕래하던 섬이라 그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증도대교를 타기 전 도로를 가로질러 꺾어 들어가면 모실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총길이 42.7km의 모실길은 증도대교를 건너오자마자 시작된다. 해안선을
따라 섬 전체를 한 바퀴 도는 일주 코스여서 출발점이 곧 종점이다. 어디서 시작해도 무방하지만 1코스부터 차례대로 걷고 싶다면, 이곳 증도대교 끝에서 둑길로 들어서야
한다.
증도는 올 때마다 달라진 모습이다. 관광지로 개발하는 데 있어 자연과 생태계 보전 관광지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증도는 다시 한 번 찾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섬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연륙이 준 혜택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목포에서 증도까지 배를 타고 가면 3시간 이상 소요되던 거리가 연륙된
길을 이용하여 1시간 30분이면 닿는다. 교통이 불편하여 지리적으로 낙후되었던 증도는 보물섬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보물섬이란
별칭이 붙은 것은, 목포해양유물전시관과 광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이 이 증도 앞바다에서 인양되었기
때문이다.
1975년 증도면 방축리에
속한 무인도인 도덕도 앞 해상에서 두 명(최영근, 박창석)의 어부가 어로 작업을 하던 중에 그물에 걸려 인양된 도자기를 신고함으로써 발굴이 시작되었다. 해방 이후 국내에서 발견된 보물선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유물이었다.
이 배는 1323년 중국 닝보에서 일본 교토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이곳으로 긴급 피란하던
중국선박이 침몰했던 것으로 보인다. 배는 하늬바람인 서풍과 북풍을 이용하여 일본까지 가려고 하다가 고려땅
가까이에서 큰 풍랑을 만난 것이다. ‘바다가 조용한 것과 얼굴 예쁜 계집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은 바다
사나이들이 믿는 보편적인 진리라 했던가. 배는 높은 파도를 피하기 위해 서남해안인 다도해 속으로 범선을
피항시키려고 했다가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범선은 700년 동안 깊은 바다 갯벌 속에 묻혀 있다가 인양되었다. 700년 전의 그 유물선은 난파된 모형을 그대로 만들어 증도 검산리 만들해역 무인도에 다리를 놓고 이곳에 배와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 배 이름을 ‘트래저아일랜드 700년
전의 약속호’라 붙여 두었다. 700년 전 풍랑과 싸우던 선원들과 그 가족들의 약속을 오늘 우리가 추모하고자
하는 의미로 필자 나름대로 붙여 보았다.
700년 전의 약속호
유물이 발굴된 증도 앞바다는 목포에서 43km 떨어진 곳으로 해상은 수심이 20~24m이며 조류가 세찬
곳이다. 중국 송 · 원대인 14세기 전반기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와 각종 유물들을 1976~1984년까지 10차에 걸쳐
인양함으로써, 한국해양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당시의
조선술과 해상무역에 대한 학술적 가치는 매우 높다. 700여 년간 바다 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송 ·
원대 도자기 등 23,024점의 유물이 발굴되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바 있다.
유물발굴 이래 증도를 보물섬이라 부르니, 말이 곧 현실이 된다 했던가. 실제로, 증도는 2007년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치타슬로(chittaslow, 슬로시티의 국제적 공식명칭) 인증을 받았다.
중국무역선(범선)
신안해저유물발굴기념비
증도는 다시 생태체험지로 떠오르면서 송 · 원대 해저유물
발굴지, 천연 해송숲, 짱뚱어다리, 우전해수욕장, 갯벌생태전시관, 엘로라도
리조트, 태평염전, 태평염생식물원, 소금박물관, 700년 전의 약속호 등 그야말로 이상의 보물섬이 현실의
보물섬으로 바뀌었고 연륙으로 더욱 활성화된 관광의 섬, ‘떠오르는 보물섬’이 되었다.
이제 증도는 한 해 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섬이 되었다.
증도 소금박물관
태평염생식물원
관광객의 발길이 잦을수록 자연환경 및 생태계의 보존에 대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여 증도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태평염전 전경
대규모의 염전에서 바닷물과 해풍의 조화 속에 꽃처럼
만들어지는 천일염은 미네랄이 풍부한 가장 유명한 특산품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함초 또한 다량의 영양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백합은 담백하며 쫄깃쫄깃하다. 재래식 김 양식장에서 생산되는 돌김의 맛 또한 뛰어나다.
설명만 들어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교통이 매우 불편하지만 그래도 한 번 회고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 당시 증도 광암리에는 전설적인 나룻배 사공인 박종인씨가 있었다. 40대이던 1960년대 말부터 8년간 증도 진번나루터와 사옥도 지신개나루터를
오가는 나룻배의 노를 잡았다. 20명 정원의 작은 목선에 장으로 나가는 소와 돼지, 시집가는 새색시 꽃가마도 배에 실었다. 각종 농수산물을 남자들은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증도 진번과 사옥도
지신개를 나룻배를 타고 오고 갔다. 겨울에는 눈보라와 칼바람이 불고,
봄에는 안개, 여름 장맛비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지도로 장 보러
나가는 어른들이 단골이었다.
날씨가 좋을 때 땀을 흘리며 노를 저어 가면 20분 걸려 사옥도 지신개선창에 닿았지만, 바람이 세게 불고, 물을 거슬러 갈 때는 어깨가 빠질 정도로 힘들게
노질을 해서 사옥도 지신개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망망대해 바다 위에서 날씨는 오로지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는 뱃사공은 노 젓는 일이 고되긴 했지만 수입이 좋으면 피로도 어느새 잊어버렸다. 휴일도
없이 하는 힘든 일이었지만 해마다 한 가정에 여름철에는 보리 다섯 되, 가을이면 쌀 다섯 되를 삯으로
받았다. 소나 돼지, 시집가는 가마를 태우면 뱃삯을 주머니에
따로 채워 주었고, 소를 판 사람이나, 짐이 많은 사람은
밥도 사고, 술도 샀다고 하니 어깨가 들썩이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걸로
가족의 생계를 꾸리고 4남1녀를 키웠다.
갯벌체험장 일대
초분
초분(草墳):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다 사라진 초분이 증도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 초분은 섬 지방 특유의 매장방식으로 시신을 풀이나 짚으로 덮어 임시무덤을 만들었다가, 2~3년 뒤에 뼈를 추려 시루에 쪄서 땅에 매장하는 방식이다. 이는
뼈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뼈로 그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고 뼈와 함께 영혼을 매장하기 위한 풍습이라고 한다. 주민들이 오랜 출어기간에 상을 당하는 경우, 객지에서 숨진 경우
등에도 초분의식을 하였다고 한다.
증도의 이런 풍습은 70년대 새마을운동 등으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으나, 지난 봄 증도에 새 초분이 하나 생겼다. 증도면 증북리의
서 아무개씨 집에서 상을 당해 초분을 쓴 것이다. 그러나 직접 보겠다며 찾아오는 이들이 늘자 유가족들이
초분의 관광상품화를 꺼려해 공개하지 않고 있다. 증도면에서는 관광객들을 위해 항월포와 목넹기 사이 해변
일주도로변 산 쪽에 초분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섬갯벌축제: 매년 7월 말이면 우전해수욕장 일대에서 갯벌축제가 열린다. 행사주체는 신안군과 신안섬갯벌축제추진위원회. 축제 프로그램은 갯벌 체험, 슬로시티 체험, 주민직거래녹색장터, 갯벌센터 방문 등이다. 축제를 통해 섬과 갯벌, 바다를 체험할 수 있는 다채로운 체험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증도를 찾는 관광객이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주민과 더불어 새로운 섬문화를 만들어가는 슬로시티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갯벌축제(최성환)
슬로소금마을축제: 5~7월 사이 매월 15~23일 우전해수욕장
일대에서 벌어지는 축제이다. 행사주체는 신안군과 섬들채소금마을. 축제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의 대표적인 태평염전에서 천일염과 갯벌 체험, 슬로푸드를 중심으로 개최된다.
기존의 대규모 축제와 다르게 3개월 동안 각각의 테마로 다양한 체험거리와 먹거리를 선보인다. 예컨대, 5월의 제비꽃(삐비꽃), 6월의 소금, 7월의 함초(칠면초의
전라도 사투리) 등이다.
증도 항월포
파시의 흔적: 송 ∙ 원대 해저유물발굴 기념비가 있는 검색리 만들해역에서
방축리 뒤 바닷가까지 학술가치가 높은 항월포 파시의 흔적이 있다.
이곳은 수 백년간 대규모의 어선들 피항지로서 350여 척의 배들이 바람과 파도를 피해 정박하면서
자연스럽게 항월포 파시가 형성되였던 곳이다. 증도 주민들은 이곳을 '목넹기'라 부르지만 공식명칭은 항월포다. 잡아온 고기를 저장해 놨던 고기창고(곳간) 건물 터가 여러 개 남아 있다. 창고는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차올라 배들이 대고 고기를 깨끗이 손질하여 이곳에 저장을 하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바닷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집과 고기 창고가 만들어졌다. 당시
이 근처에는 6개의 초가집이 있었고 모래사장 뒤켠 구석에는 색시들을 데리고 술장사를 하는 집이 한채
있었다. 만선으로 돈을 두둑히 번 어부들이 색시들과 술을 즐겨 마셨음은 당연한 일. 어부들은 이곳에서 그물 손질도 하고 배를 수리하다가 술을 마시러 가기도 하면서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증도 항월포 파시의 흔적
당시 어부생활을 했던 박종화(73세) 검색리 이장은 "자은도에서 증도, 재원도를 잇는 바다에는 철따라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히는지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며 "항월포에서 거래된 부서ㆍ민어 등은 소금에 간해 곳간에 저장했다가 마산으로 가져갔고, 마산에서 다시 부산으로 옮겨지기도 했다"고 회고 했다. 항월포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장사를 했던 주민은 김귀녀(86년 사망)씨 였다. 그의 어머니를 도우면서 살았던 강선태(70ㆍ목포 거주)씨는 "당시 고깃배가 들어오면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며 "밥과 국수, 술 등을 사먹는 사람들로 마치 잔칫집을 방불케 했다. 지금은 폐허가 됐지만 그때가 그리워 지금도 가끔 낚시하러 이곳에 온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항월포 해안에 있는 우물
함초
송 · 원대 유물매장 해역: 증도면 방축리에서 서북방향으로 2,750m 지점의 바다 속에서 중국 원나라 때(14세기경) 제작된 청자를 비롯한 대외무역용의 많은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반경 2km 해역, 수심 20~40m의 조류가 세찬 곳으로 중국 원나라 때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유물은 침몰된 배의 조각 445편을 비롯하여 도자기 20,661점, 금속제품 729점, 돌로 만든 제품 43점, 자줏빛 나는 자작 향나무 1,017그루, 동전 28톤 18kg, 기타 574점 등 총 23,024점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이 출토된 해역은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유물이 발굴된 해역
태평염전: 증도와 대조도 두 섬을 잇는 제방을 쌓고, 그
안에 대규모 염전으로 개발한 태평염전은 260ha, 한국에서 단일 규모로는 두 번째로 크다. 우리나라 천일염의 6%인 연간 1만 6,000톤을 생산한다.
태평염전의 역사는 반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한국전쟁 피란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물이 빠지면 징검다리로 건너다니던 전증도와 후증도 사이 갯벌에 둑을 쌓아 염전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 시초였다.
우전해수욕장: 백사장 길이 4km, 폭 100m인
우전해수욕장 주변에는 90여 개의 무인도들이 점점이 떠 있고 수평선이 매우 아름다우며, 맑은 물과 함께 울창한 소나무숲이 둘러 있어 여름날의 피서지로 그만이다. 특히
이곳 갯벌은 게르마늄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매년 여름이면 게르마늄갯벌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신안군에서는
게르마늄 성분의 신안 머드 화장품을 개발, 판매하고 있다.
우전해수욕장 일대 전경
짱뚱어다리와
갯벌 체험장: 증도면의 중심상가와 한반도 해송공원을 잇는 길이 472m의 나무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128만 평의 갯벌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모양새가 꽤나 멋스럽다. 사각의 관문을 지나는 단순한 형태가 친근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두세 사람이 지날 정도의 좁은 폭이지만 갯벌 위에 놓인 다리를 거니는 기분은 각별하다. 밤이면 가로등 불빛이 또 다른 세상을 보여 준다.
짱뚱어다리 계단을 내려오면 곧장 갯벌이다. 다리의 이름처럼 갯벌에서는 짱뚱어가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인다. 게르마늄이 다량 함유된 증도의 갯벌은 보령 못지않다.
해산물을 캐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천연의 머드팩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여름철에는 다양한
축제가 어우러져 한층 더한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갯벌축제(최성환)
짱뚱어다리
문준경 순교기념관: 문준경은 이곳 증도에 기독교를 뿌리내리도록 한 인물이다. 현재 주민의 90%가 기독교인인 것은 그녀의 역할 때문이라 한다. 증도리 교회 뒷산 기슭에 위치한 문준경 순교기념관은 아담하다. 그러나 이 건물 안쪽 모습은 시골 예배당 그대로다. 그녀와 관련된 사진 4장이 피아노 위에 걸려 있고 그녀가 세웠다는 교회들의 예배당 사진들이 주욱 걸려 있다.
문준경 순교비
출처 : 한국의 섬 - 전남 신안군, 2014. 9. 30.
1996년 답사기록을 정리하고 그동안 섬에 대해 연구되어 온 일반적인 통계자료와 각 섬의 군지, 마을 유래지, 민속지 등을 참고하여 「낙도선교」라는 책을 출간한 이후, 섬마을...
저자 : 이재언| 섬 탐험 전문가
섬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우리나라의 섬 탐험 전문가이다. 대학에서 복지학을 전공했고,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90년-1996년까지 바나바선교회 섬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선 등대호를 타고 선교활동을 하던중 섬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국의 446개 섬을 3번이나 순회하였다. 저자는 많은 섬을 찾아다니며 섬의 기본 현황과 역사, 문화, 민속, 주업, 삶의 애환 등 수많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기록을 남겼다. 2009년부터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 재직중이며 전남일보 섬전문 시민 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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