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광산김씨 쌍벽당공파의 동성마을 봉화 거촌리를 찾았다. 마침 마당의 잔디를 걷어내고 상한 기둥을 깎아 내는 등, 종택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집안 수리로 바쁜 와중에도 불쑥 찾아간 손님을 종부 이춘옥(69`맛질댁) 여사는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반갑게 맞이했다.
◆ 500년간 선조 유훈 지켜와
북부지역에는 많은 반촌들이 있지만, 봉화에는 유난히 사화나 당쟁을 피해 낙향한 유현(儒賢)과 관련된 곳들이 많다.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의 쌍벽당(雙碧堂) 역시 그런 집안 중 하나다.
종가의 시조인 쌍벽당 김언구(金彦球`?~1507년)는 조선 중기 연산군 때 유명한 성리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조부인 담암공(潭庵公) 용석(用石)은 기묘사화를 피해 안동 구담으로 내려와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성균관 진사만은 아니 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치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담암공의 둘째 아들 죽헌공(竹軒公) 균(筠)은 장인의 권유로 봉화 거촌에 터를 닦고 자리 잡았으니 광산김씨 동성촌락의 입향조다. 그의 맏아들인 쌍벽당은 25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역시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관직을 멀리하고 수양과 후학양성에만 매진했다. 광산김씨 쌍벽당공파는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후 후손들 중에는 뛰어난 인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뜻을 받들어 한 사람도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고향에서 수양과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쌍벽당이 위치한 거촌리조차도 선조의 유훈을 받들기 위해 풍수 지리적으로 벼슬이 나지 않는 곳을 골라 자리 잡은 것이라 하니 참으로 대단한 후손들이 아닐 수 없다. 이춘옥 여사는 그러한 광산김씨 쌍벽당공파의 19대 종부이다.
◆ 남다른 인연 닿아 오게 된 종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환한 웃음이 인상적인 이춘옥 여사는 경북 울진이 고향이다. 봉화지역에서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으며 후학양성에 힘쓰던 쌍벽당 19대 종손 김두순(77)씨와 15년 전 혼인했다
그녀는 “그저 인연이 닿아서 혼인해 종부가 됐다"고 한다.
혼례는 특별한 예식 없이 종가 대청마루에서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잔치를 여는 것으로 대신했다. 거촌리는 모두 광산김씨 일족만 살고 있기 때문에 동네 어른이라 하면 곧 집안 어른이기도 하다. 이 잔치에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 즉 거의 모든 일가친지들이 참여해 서로 인사를 하며 얼굴을 익혔다.
절차와 예법에 따라 사당에 인사도 올렸다. 일가 중 가장 연세가 많으신 시삼촌께서 붉은 깃발을 들고 사당에 들어가 조상께 새로운 식구가 들어 왔음을 고했다. 그 후 이춘옥 여사는 마당에서 조상을 향해 세 번 큰절을 올렸다. 이로서 그녀는 정식으로 종부가 된 것이다.
이춘옥 여사에게 종가의 큰 살림살이와 여러 번의 제사는 처음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향인 울산과 봉화는 풍습도 절차도 많이 다른데다, 종손과의 혼례 전에는 한 번도 직접 제 상을 차려 본 적이 없었기에 그 어려움이 더했다. 처음에는 모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는 모르는 것이 생길 때마다 동네 어른들에게 여쭈어 제상을 차렸다. 남에게 물어보기 어려운 일은 곰곰이 생각한 후에 예법에 맞는지를 따져 행하였다. 그러한 고민과 경험이 쌓여 지금은 거뜬히 종부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쌍벽당을 처음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웅장함에 놀란다. 종가 건물은 화려하지 않지만 봉화 같은 시골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굵고 좋은 목재들을 사용해 소박한 가운데서도 웅장한 멋이 살아있다. 또한 집 주위에는 작은 뜰이 많아 화단과 정원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다. 1984년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민속자료 제 170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 낮선 제사 준비와 큰집 건사하기
이러한 큰집을 건사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이춘옥 여사가 혼인하여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도 집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안채의 대청마루 하나만 하더라도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니, 그것을 쓸고 닦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계절마다 돌아오는 화단과 제사 전 대청 청소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종부로서는 드물게 기독교를 믿고 있다. 지금도 매주 마을 옆에 위치한 작은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큰 종가의 종부가 기독교인이라니,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춘옥 여사는 30세 무렵에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이후 잘 나가지 않다가 거촌리로 시집온 몇 해 뒤, ‘마음이 헛헛해’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집안 문제와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 상충될 법도 하건마는 그러한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지킬 거는 지키고 제 개인적으로는 신앙을 가지고 그렇습니다. 사갓집 같으면 그걸 버릴 수 있고 안 할 수 있지만, 자녀들도 그렇고 오래전부터 내려온 풍습도 있고 그걸 따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종교에 대한 신앙을 가지되, 집안의 가풍을 따라 전통을 지켜가고 있는 종부. 다행히 이런 그녀의 생각을 종손인 남편이 허락해 주었고 자녀들과 친척인 마을 사람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아 지금껏 조상을 모시면서도 교회에 잘 나가고 있다. 쌍벽당 종가는 종부로서의 소임을 다한다면 나머지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에 맡기는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맏며느리의 도움
지난 15년간 이춘옥 여사가 종가의 큰 살림살이를 건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맏며느리인 차종부 류찬희(53)씨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
15년 전부터 1년에 10번 있는 종가의 기제사를 모두 그녀가 준비하여 모시고 있다. 차종손 내외가 충북 청주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기제사 때마다 종손 부부는 청주로 가서 제사에 참석하고 있다.
차종부의 친정은 하회마을로 서애 류성룡의 종가인 충효당과 가까운 일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제사를 지내고 조상을 모시는 것을 보아 온 터라, 지금도 그것을 당연한 소임으로 여기고 있다.
지금은 남편인 차종손의 직장과 자녀들의 교육문제 등으로 청주에 살고 있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는 거촌리로 들어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 예정이라고 한다.
종부로서의 힘듦이 어찌 많은 제사와 큰 집안을 건사하는 고된 육신의 문제만 있을까. 진실로 힘든 것은 아마 그 가운데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을 조율해 가며 살아가는 문제일 것이다. 쌍벽당 종부 이춘옥 여사에게서 오랫동안 조상을 모시고 종가를 지켜온 여느 종부의 모습 보다는, 나름의 소신으로 전통을 지키며 이어가려고 애쓰는 또 다른 종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