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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박근혜 정부 성공 위해 발벗고 나설것
* 박근혜 대통령이 나를 견제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 권력 주변에서 말 지어내 대사 그르치고 이간질
* 청와대에서 일했다고 공천 받는다면 정치는 후퇴할 것
* 5.18 민주화운동 탄압 보면서 정계 투신을 결심했다
가을 찬바람이 부는 9월이면 야망을 품은 정치인들은 이듬해 농사를 시작한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2006년 9월 당 대선후보 경선 캠프를 발족했다. 경쟁자였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한 발 앞서 7월에 캠프를 꾸린데 자극받은 친박계 핵심 인사들이 부랴부랴 서두른 결과였다. 당초 박 전 대표는 그해 5월 지방선거 당시 문구용 칼에 얼굴을 베이는 테러를 당한 직후인지라 캠프 발족을 뒤로 미루려고도 했으나 친박계 좌장인 김무성 의원 등이 9월 발족을 적극 밀어붙였다.
그 김무성 의원이 올 9월 깃발을 들었다. 9월 4일 오전 국회에서 자신이 주도하는 ‘새누리당 근현대 역사교실’의 첫 모임을 열었다. 현역의원만 100명이 넘게 가입한 데다 두 번의 모임에 각각 60명이 넘는 현역의원이 참석, 그가 당의 최대 실세임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김 의원 본인은 “우리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게 하자는 모임일 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정치권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의원이 내년 6월 지방선거 전후로 열릴 전당대회를 앞두고 본격적인 세몰이에 나섰다고 본다.
그는 2012년 19대 총선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뒤로 정권 재창출을 위한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지난해 하반기 당 대선 캠프에서는 총괄선대본부장으로 긴급 투입되는 등 대선승리의 ‘일등공신’이다. 지난 6월 실시된 여권 차기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는 9.0%로 1위를 차지하는 등 여권의 잠재적 대선 주자로도 각인됐다.
9월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평소의 호방한 스타일대로 현안에 대한 입장을 시원시원하게 밝혔다. 전당대회 당 대표 출마는 물론 차기 대선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청와대와의 관계라든가 당내 문제 등 상대방이 있는 사안에는 언급을 삼가는 등 완급을 조절하기도 했다.
4월 24일 부산 영도 국회의원 재선거를 통해 원내 진입한 뒤로 언론 접촉을 피하는 등 공개활동을 자제해왔다. 이제 그 암중모색이 끝난건가?
- “그동안 자중자애하려 했지만 언론과 정치권이 가만 놔두질 않았다. 근현대 역사교실만 해도 잘못된 교과서를 바로잡자라는 후세들에게 역사교육을 제대로 하자는 취지에서 열었다. 누구에게 가입하라는 전화 한 통 돌린 적도 없다. 현역 의원 30명 정도가 오겠거니 생각했는데 100명이 넘는 의원들이 가입하고, 원외당협위원장, 전직 국회의원들까지 연락이 와서 ‘가도 되느냐’는 문의를 해온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계보 만들기에 나섰다고 보도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겠나?”
정치는 팩트(fact 사실)보다 퍼셉션(perception, 인식)이 중요하지 않나?
-“글쎄... 그런데 그런 논란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말도 아끼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공인은 나름의 의무감이 있고, 해야 할 일도 있다. 그럴 때마다 오해를 받는다. 혹자는 대통령 취임 6개월밖에 안됐는데 뭐가 급해서 이런 걸 하느냐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땐 괴롭지.”
그런 예민한 시기에 ‘역사교실’을 하게 된 계기는?
-“우리 학생들이 역사를 너무 모를뿐더러 좌파 사학자들이 만든 교과서에 세뇌당한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도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잘못된 한국사 교과서를 갖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되므로 이거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나서 중도적 시각에 입각한 교과서가 많이 채택되도록 노력하자는 취지에서 모임을 만들었다.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니다.”
의원들이 100명 넘게 가입했다. 계보화 작업 내지는 의원 줄세우기라는 시각도 있다.
-“나를 보고 온게 아니라 역사교실이라는 이름이 좋아 온 거지”
수강신청은 과목이 아니라 교수를 보고 하는 것이다.
-“하하. 글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김의원은 정치를 하면서 본의 아니게 여러 결단의 순간을 맞았다고 했다. 5공시절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일 때와 18대, 19대 총선에서 연거푸 새누리당의 공천에서 탈락했을 때가 인생 최대의 고비였다고 돌이켰다. 1987년 독재정권의 탄압과 훼방에 맞서 당사를 사들이면서까지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사업을 하던 집안과 거의 절연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18대 총선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을 추종하는 친이계가 주도한 공천작업에서 고배를 마셨고, 19대 총선에서도 자신이 한때 모셨던 박근혜 대통령의 친박계가 좌우한 공천에서도 밀려났다. 그는 “당시 심대평 대표의 선진통일당 등과 신당을 만들어 출마한다면 새누리당을 포함한 보수 정당의석이 140석에 그치리라는 분석이 나왔다.”면서 “대선을 8개월여 앞두고 그런 일이 터지면 우파정권 재창출은 물 건너간다는 생각에서 백의종군을 결심했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또 다른 결단의 순간이 오리라는 예감은 들지 않나?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그거 어려운 질문인데...나는 대통령 선거라는 게임에 핵심 멤버로 여러번 관여했다. 나 스스로가 이 나라의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여겨 내 인생의 목표를 그쪽으로 잡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술 좋아하고, 거침없이 말을 해버리고...조심스러운 몸 관리를 해 온 사람이 아니지. 내 인생의 고독한 결단을 몇 번 내린 결과 계속 (차기 대선주자와 같은) 그런 얘기들이 나오니 굉장히 당혹스럽다. 지금은 내가 과연 그 자격이 있는 지 없는 지 고민에 빠진 상황이다”
대선에 여러 번 관여했다니 묻겠다. 대한민국에서 권력은 쟁취하는 것인가 주어지기도 하는 것인가?
-“그동안 이 나라의 권력을 쟁취해온 것이지. 이제는 주어지기도 하는 사회로 가야 하지만.”
당위론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객관적 여건은 지금도 쟁취하는 것 아닌가?
-“중요한 대목인데, 우리 근세사의 정치권력은 쟁취하는 권력이지만 이제는 국민에게서 부여받는 권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여태껏 영웅이 역사를 쟁취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역사가 영웅을 만드는 시대로 접어들어야 한다. 그게 성숙한 사회다.”
일부 여론조사를 보면 여권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주목받기도 한다. 대통령에 대한 욕심이 생길 법도 한데.
-“아휴, 그 여론조사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거다. 또 내 스스로가 그렇게 강력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여론조사에서 간발의 차이로 1등 한다고 욕심을 부리진 않는다. 난 사심없는 사람이다.”
‘역사교실’뿐만 아니라 통일, 복지 등 공부모임이 세 개나 꾸려진다. 다분이 대권수업, 즉 대선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해석될 것이다.
-“내 나이가 올해 63세(1951년생)다. 인생을 마무리할 때가 다가온다. 65세 정도면 정치를 마무리하고 은퇴의 길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건 독재적 발상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조화가 이뤄진다면 모르겠는데 억지로 하려들면 부작용이 생기고 사람만 우스워진다. 인생 말년에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런 길을 가고 싶지 않다. 공인으로서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나이스하게 마무리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주변에 사람이 몰리는 이유도 유력한 당권 주자라서 그렇다. 전당대회에서의 진로는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현 지도부 임기(내년 5월 15일)가 많이 남은 상태에서 내가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사심없이 정치하는 것은 자신이 있다. 우리 정치는 사심없는 정치인을 필요로 한다. 나는 오랜 세월 민주화 투쟁을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새누리당은 정당민주주의가 제대로 착근했다고 보기 어렵다. 정당민주주의 요체는 공천이고 위로부터의 공천이 아닌, 지역민 여망을 반영하는 아래로부터의 상향식 공천의 틀을 꼭 만들어놓겠다는 의지만큼은 강하다. 민주주의 한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권력자가 공천권을 휘두르는 건 국민을 속이는 짓이다.”
앞서 ‘조화’를 말해서 묻는다. 김의원이 당대표 되는 걸 박근혜 대통령은 반길까?
-“박대통령이 지금에 오기까지 몇 차례의 위기가 있었는데 그걸 누가 극복해줬나? 세상에는 말로만 하는 사람이 있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김의원은 대표적인 사례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을 꼽았다. 그는 박대통령 캠프의 좌장으로 실무를 책임졌다. “비록 후보 경선에서는 졌지만 전당대회 대의원. 당원 투표에서는 이겼다.”고 지적했다. 또 19대 총선에서 낙천하고서도 백의종군해 결과적으로 총선· 대선 승리에 일조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내가 신당을 만들어 출마했다면 총선은 물론이고 박대통령이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겠나”면서 “그렇잖아, 내가 박대통령 가는 길에 잘못한 일이 언제 있었나”라고 반문했다. “그런데도 왜 언론에는 청와대가 나를 견제한다는 기사가 나오나?답답해 죽겠다.”
최근까지 자세를 한껏 낮춘 것도 사실이다.
-“나라를 위해서는 박근혜 정권이 성공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은 알고보면 새누리당 정권 아니냐.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면 뭐든 발벗고 나서겠다. 요즘 나가보면 (박 대통령과 청와대) 비판하는 소리도 많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변호를 하는데. 또 오랜 기간 박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한 사람들이 자리를 못 잡고 있다. 모두 입이 한 주먹식 튀어나와 있잖아. 이들과 술잔이라도 기울이면 비판이 마구 쏟아지지. 내가 그걸 얼마나 달랜다고... 그런데도 왜 증권사 찌라시(정보지)에는 청와대가 나를 견제하고자 다른 사람을 내세운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짐작가는 곳이라도 있나?
-“그게 권력 아니겠나? 권력 주변이라는게 말을 만들어내서 대사를 그르치게 하고, 이간질도 한다. 내가 이미 행동으로 충분히 보여줬는데 나를 의심할 이유가 어디 있나?영도 재선거에서 당선되고 와서 내가 빗나가는 말을 언제 한 적 있나? 나만큼 언론 인터뷰 신청이 많이 온 정치인이 또 있을라고. 폼 잡거나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 말을 한 적이 있나?그만큼 자중자애하고 몸을 숨기려고 말을 아끼는데 왜 나를 모함하는 것인가. 웃기는 세상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보나?
-“권력 주변에 사심에 가득 찬 간신들이 있으면 그 조직은 분열되고, 흔들리는 수밖에 없다. 사심없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싸는 이들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 그게 (청와대가 나를 견제한다는 소문) 대통령의 뜻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본다. 내가 행동으로 보여주고, 나를 희생해가며 일해왔는데 왜 대통령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겠나?
확신하는가?
-“확신한다. 앞서도 얘기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자, 자연인 아니냐.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게 살아왔는데 뭐가 꿀리거나 뒤가 구려서 그런 수세적인 생각을 하겠나. 나는 매사에 당당하며, 내 할 도리를 할 따름이다. 지금으로서는 박 대통령이 국정을 잘하고 계시지만 경제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장사도 안 되는데 세무서에서 세금을 짜내면 조세저항밖에 더 부르겠나?그건 박대통령이나 새누리당이나 도움이 안된다. 그런 때는 공인으로서 말할 수 밖에 없다.”
청와대는 실제로 김 의원이 당대표가 되는 걸 탐탁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김 의원같이 선이 굵은 카리스마형 지도자가 있는 당에는 복귀가 어렵다고 보고 부드럽고 유연한 지도자를 더 선호한다는...
-“부드러운 사람들이 뒤통수친다는 점도 알아야지(웃음). 그리고 청와대에서 일했다고 꼭 공천을 받아야 한다는 법이 어딨나? 그래서 우리나라 정치가 퇴보하는 거다. 10년 동안 천신만고 야당생활하며 이명박 대통령을 기껏 만들어줬더니 이 대통령 캠프에서 고작 몇 달 일한 이에게 공천을 주더라. 당을 그렇게 뒤집어 놓지 않았느냐? 그런 몹쓸 사람들이 어딨나?(낙천자는) 당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거다. 그건 옳지 못하다. 내가 정치판에 와서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틀을 만들어놓고 그만둘 것이다.”
5선 의원인 그는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무대(김무성 대장의 줄임말)’라고 불려왔다. 정작 그는 본격적인 검증의 ‘무대’에 오를 기회는 없었다고 하겠다. 앞으로는 다르다. 당권 주자가 되거나 또는 대선주자로 나서면 혹독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의 선친 김용주씨는 전남방직의 설립자로 4.19 혁명 이후 여당이던 민주당의 원내총무를 역임한 정재계의 거물이었다. 진보진영과 일부 언론에선 그의 일제시대 행적을 물고 늘어진다. 인터넷 상에선 그가 일제강점기 경북도회 의원을 지내고, 전쟁에 나간 황군에게 위문편지 보내기 운동을 펼친 사실이 중점적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선친은 일제시대 경찰의 요시찰 대상”
앞으로 선친과 관련된 친일행적 시비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한다고 들었다.
-“지금까지는 무시하거나 관용으로 대했지만 이제는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거나 고소 등 조치를 할 계획이다. 한번 물어보자. 누구든 상해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안했다면 국내에 남아 가정을 이뤘을 것이다. 그러면 창씨개명을 했을 것이고 일정한 사회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때 있었던 일에 대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며 무엇을 보고 친일이다 아니다를 규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특히 선친께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냈다고 보도한 <매일신보>는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당사자가 작성하지 않은 기고문조차 임의로 작성해 보도한 사례가 있었다. 또 특정인을 평가하자면 양면성을 두루 살펴봐야 하는 법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어떤 걸 말하나?
-“당시 국내 언론보도를 보면 선친께서는 은행원 신분으로 독서회를 만들고 야학에서 가르치다 은행에서 내침을 당했다. 그래서 세운 게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삼일상회’다. 일본 경찰로부터 집요한 상호변경을 압력을 받은 끝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몸도 약한 분이 헌병대, 경찰서에 수시로 끌려가는 등 요시찰 인물로 찍혔다. 또 29세 때 재산의 절반을 털어 포항영흥보통학교를 세웠다. 식민지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려는 취지였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이런 분이 어떻게 친일파인가? 선친은 워낙 영민하고 부지런해서 돈도 많이 벌었다. 건국 이후 경총회장을 14년 지내고, 전경련 부회장도 역임했다. 사업보국을 몸으로 실천한 분이다. 이병철, 정주영 회장이 시대의 영웅이듯이 선친께서도 그중의 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정치 입문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나?
-“물론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지만 결정적 포인트는 다른데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 탄압을 보면서 정계 투신을 결심했다. 1980년 5월 당시 나는 포항에서 공장을 운영했다. 옆집에서는 광주에서 시집온 분이 살았는데 광주의 부친 생사를 알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보다 못한 내가 광주의 전남방직 공장에 전화를 걸어 교환원에게 그분의 근황을 파악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 교환원도 길거리를 나서기가 무섭다고 했다. 그때 어떻게 군인이 시민을 죽일 수 있을까, 이건 옳지 못하다는 분노가 치밀었다. 5공 정권을 그냥 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와서 민추협에 참여하게 됐다.”
정치 멘토로 꼽는 분이 있다면?
-“두 분이다. 당연히 내게 정치를 가르쳐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야당시절 총재로 모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다. 김 전 대통령은 치사하게 배배 꼬인 성격이 아니라 한번 결심하면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분이셨다.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분이 그리 흔한가? 이 전 총재는 능력이 출중했다. 야당 시절 다기다양한 주장을 취합해 정리하고 결론을 이끄는 능력이 탁월했다.”
최근 이석기 의원 내란 음모사건 이후 ‘좌파와의 전쟁’을 언급했다. 어떤 배경인가?
-“과거 서독은 총리 비서가 간첩으로 밝혀져 총리가 사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종북세력이 국회에 진출하리라고 예견은 됐다. 그 토양을 만든 게 바로 정치권이다. 새누리당 책임도 있지만 민주당은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이미 종북세력의 실체가 드러난 만큼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릴 것도 없이 국회에서 제거해야 한다. 민주당도 이 참에 그쪽과는 완전히 선을 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그런 색채가남아 당 발전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다만 좌파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은 좀 보완하고자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종북 좌파다. 좌파가 갖는 사상이나 이념을 절대 비하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대한민국의 최근 65년의 역사를 평가해 달라.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다. 기존 틀 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경제적 부를 창출하자는 입장이다. 뒤집어 혁명을 하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 65년간의 국가 발전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기적이다. 나는 이 시기를 민족 중흥기라고 규정하고 싶다. 건국 이후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존중한다.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도약하자면 앞으로 어떤 과제를 극복해야 할까?
-“1980년대 북유럽에서 ‘소셜 코프라티즘(social corporatism)’이라고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졌다. 다른 말로 노사협동주의라고 하겠다. 남유럽은 이를 외면함으로써 부도나는 국가가 속출했다. 우리나라도 지금 그런 계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우리가 처한 경제현실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임금인상이나 복지 등 욕구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으면 한다. 세수가 부족한 마당에 세금감면 제도를 지금처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의 소득세제 개편안도 이런 사전 정지작업을 거친 뒤에 발표했다면 저항이 훨씬 덜했을 거다. 지금은 국민 대타협, 사회 대타협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대선은 박빙의 승부였다. 그만큼 어렵게 출범한 정부다. 지난 6개월을 지켜본 소감은?
“세상 일이라는게 총의가 모여야 시너지가 생기고 힘도 실린다. 총의를 모으자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지혜를 모아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까 힘이 빠진다. 도와주고 싶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입장이라 안타깝다.”
청와대가 잘 안돌아간다는 얘긴가?
-“아이고 그 얘기는 좀...”
김기춘 비서실장, 박준우 정무수석과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다.
-“김실장은 내가 존경하는 선배다. 그분도 나를 좋아한다. 15대 국회에서부터 함꼐 의정활동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를 많이 아껴주시는 분이다. 김 실장과는 연락도 자주 할 생각이다. 박준우 수석은 내 고교(중동고) 동기다. 박수석은 외교관으로 해외를 돌았기 때문에 만나서 정분을 나누고 한 일은 별로 없다. 동기라고 하는 정도다. 앞으로 대화는 잘 될 것이다.
김의원의 국정원 국정조사 청문회 증인 채택 건으로 국회가 시끄러웠다.
-“ 나는 정말 국정원 댓글사건과는 관계가 없다. 국정원이나 어디서 보고를 받은 게 아니라 기자들이 내 반응을 떠보려고 자체 확보한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가령 국정원 댓글 사건을 경찰에서 조사했는데 아무 것도 안 나온다고 한다며 기자가 내게 묻는 식이다. 그렇게 들어서 알게 된 내용을 언급한 것일 뿐이다. 대선 당시 국정원이 우리하고 협조하는 관계도 아니었다.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발언 역시 정문헌 의원 등에게서 들은 얘기와 떠돌아 다니는 문건을 조합해서 말한 것이 전부다.”
4.24 재보선에서 당선된 안철수, 이완구 의원과 따로 만나기도 했다. 두 의원은 어떤 사람인가?
-“안의원은 대화를 해보니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다. 마음으로 조언해줬다. 나는 안 의원이 꼭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우리 정치의 틀이 바뀐다. 이의원은 15대 국회를 같이 시작해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안의원 새누리당 영입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그가 안 들어올 것이다. 정치발전을 위해서라면 새누리당에 들어와서도 안 된다. 안의원은 자기 정체성을 잃으면 안 된다. 새누리당에 들어오면 함몰돼서 같은 인물이 된다. 밖에서 새정치를 펼쳐 새누리당이 좋은 점을 본받아 따라갈 때 정치가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