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은 강원도 한계령을 경유하여 고성일대를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본격적인 해수욕철(7.1 개장)이 다가오기 전에 바다를 보러가야 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났다. 3면이 동·서·남해 바다로 둘러 쌓여 있기에 어느 바다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파도가 크게 일렁이는 동해바다가 보고 싶었다. 또 다른 의미 부여를 위해 통일전망대를 포함하여 한적한 고성지역 일대를 다녀왔다.
이번 여행코스는 1일차에 비오는 한계령을 경유하여 - 고성지역의 천진해변(해수욕장) - 청간정 - 아야진해변(해수욕장) - 천학정 - 능파대 - 송지호를 보고, 2일차에 화진포호수(콘도) - 통일전망대 - 명파해변(해수욕장) - 백섬해상전망대 - 건봉사 등 고성지역의 주요 지역을 모두 다녀왔다.
2일차 화진포 / 통일전망대 / 명파해변 / 백섬해상전망대 / 건봉사
화진포해변(해수욕장)
화진포콘도
화진포콘도 앞 바다
화진포콘도는 백사장 끝나는 부분에 위치하기에 오션 뷰 조망이 끝내 준다. 또한 콘도 뒷편의 소나무 군락지는 숲길을 걷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주변에는 국내 최대의 석호(화진호)가 있으며, 김일성별장, 이기붕별장, 이승만별장 등이 있어 휴양지로서 그 명성을 가히 짐작하게 한다.
화진포호수와 화진포해수욕장은 2000년 가을 KBS-TV 인기 드라마 「가을동화」를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금구도(광개토대왕릉, 고증을 통해 확인 중) - 사진 우측의 조그만 섬
금구도는 신라시대에 수군기지로 사용하며 해안을 지키던 곳으로 청정한 통해에 한가로이 떠있는 금구도의 대나무 숲과 그 위를 나는 갈매기의 모습은 절경이다. 일명 '거북섬'이라고도 불린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3년(394년) 8월경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에 수릉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증을 진행하고 있으며, 사실이 확인되면 원형 복원할 계획이라며 안내판에 소개되어 있었다. 꽤 흥미로운 일이다.
금구도를 상징하는 거북이 조형물을 이용한 포토존
김일성 별장
이 별장은 일본 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던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킬 때, 당시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가 독일망명 건축가 베버에게 의뢰하여 1938년 이곳에 건립하였으나 한국전쟁 중 훼손된 건물을 2006.5월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김일성 일가가 이곳을 여름별장 삼아 찾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김정일이 6살 때 동생 김경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자료로 전시되어 있다.(화살표 지점)
이기붕 별장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진 사택으로 해방 이후 북한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 후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가 개인별장으로 사용하였다. 1999.7월 전시관으로 개수·운영하고 있다.
화진포콘도(울타리) 내에 있는 소나무 군락지
모양이 희한한 소나무도 있다. 간밤에 비가 온터라 온 몸에 빗물을 머금고 있다.
고성 통일전망대
해발 70m 고지의 '고성통일전망대'는 금강산의 구선봉과 해금강이 지척에 보이고, 맑은 날에는 신선대, 옥녀봉, 해하봉, 일출봉, 집선봉 등 천하절경 금강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고성 통일전망대는 예약없이 언제든 방문할 수 있으나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이북 지역을 출입하는 관계로 소정의 출입절차가 소요된다. ① 먼저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 도착하여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신청을 하면 1인당 3천원의 입장료와 주차료 5천원을 결제하게 된다. ② 강당으로 이동하여 정해진 시간에 약 7분간의 동영상 시청 안보교육을 받은 다음 ③ 타고 간 개인 차량으로 통일전망대 방향으로 약 5분거리를 이동하면 출입을 통제하는 군 검문소를 만나게 되는데, 뒷 창문까지 내리게 하여 출입인원 확인 후 출입허가증을 받아 차창에 게시하고 ④ 다시 약 5분 거리를 달려가면 통일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하게 되는데, 자유관람으로 통일전망대를 보면 된다. ⑤ 통일전망대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는 군 검문소에서 동일 요령으로 인원을 확인받은 다음 출입허가증을 반납하고 바로 귀가하면 된다.(출입신고소는 다시 들릴 필요가 없다)
신 고성통일전망대(2019년)
신 고성통일전망대는 마치 전쟁과 냉전의 시대를 보내고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를 맞이하듯이 2019년에 높이 34m 규모로 새롭게 건립해 문을 열었다. 3층 전망대에 오르면 통유리 너머로 탁트인 동해와 북녘의 금강산이 시선을 사로 잡는다. 전쟁의 비극을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고성DMZ, 푸른 하늘 아래 우뚝 선 고성통일전망대에서 미래의 평화를 조망해 본다. 건물의 디자인은 DMZ의 D자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통일전망대의 3층 전망대
통일전망대에서 남방한계선과 비무장지대(DMZ), 북녘땅이 어우러져 있는 지역을 지척에 두고 보고 있다. 휴전선 철책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초소는 전쟁의 아픔과 남북분단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게 했으며, 발아래에 있는 동해북부선 철도길과 2004.12월에 개통된 동해선 남북연결 도로를 보며, 중단된 금강산 육로관광에 이어 통일이 멀지 않았음을 꿈꾸게 했다.
명파리해변(해수욕장)
명파해변(해수욕장)
동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통일전망대 바로 아래 민통선지역에 위치한다.
백섬해상전망대
백섬해상전망대는 거진항 어촌관광체험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으며, 2020.10.30 개장하였다. 거진1리 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전망대는 진입로 폭 2.5m, 높이 4~25m, 137m 길이로 백섬과 연결되어 있다. 북으로는 바다의 금강산이라는 해금강이, 남으로는 가진항까지 보인다.
백섬의 유래는 과거에는 잔돌이 많아 '잔철'로 불리다가 이 중 제일 큰 바위가 갈매기 배설물로 하얗게 보인다하여 지금의 '백섬'이 되었다.
금강산건봉사
건봉사
건봉사는 신라 때 지어진 사찰로 조선시대에는 전국 4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께서 승병을 일으킨 호국사적지이며, 합천 통도사에 봉안된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가 임진왜란 때 일제에 탈취되었으나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되찾아 왔으며, 현재 건봉사에 8과가 모셔져 있다.
건봉사불이문
'건봉사불이문'은 1920년에 세워졌다. 한국전쟁 때 모두 무너진 건봉사 터에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원통형으로 다듬은 4개의 돌기둥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린 형태이다. 각 돌기둥에 새긴 문양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인 '금강저'를 나타낸 것이다. 금강저는 고대 인도에서 쓰던 무기로, 부처를 수호하고 번뇌를 없애는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한다. 정면에 걸린 현판은 서화가 김규진의 작품이다.
'불이'란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하며, 이곳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 전통적으로 사찰 입구는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 3개의 문을 지나도록 구성하는데, 이 중에서 천왕문은 부처의 가르침과 불국 정토를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공간이다. 건봉사는 천왕문을 따로 세우지 않고 불이문에 금강저를 새겨서 사찰 수호의 기능까지 더하고자 한 것이다.
금강산건봉사
위 사진에 보이는 돌 다리는 대웅전을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건봉사능파교'로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홍교(무지개 모양의 다리)로서 규모도 비교적 크고 잘 보존되어 있다. 능파교를 처음 축조한 시기는 숙종 30년(1704)~34년(1708) 사이로, 불이문 옆에 있는 '능파교신창기비'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오랜세월 훼손된 것을 2005.10월에 복원하였다. 능파교는 보물 제1336호이다.
극락전
건봉사는 역사상 최초로 '염불만일기도'를 개최한 우리나라 최고의 염불사찰이다. 756년 신라 경덕왕 17년 발징화상께서 건봉사에서 염불만일회를 개최했으니 이것이 우리나라는 물론이요 전 세계적으로 첫 번째 염불만일회였다. 명실상부 염불사찰 건봉사는 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전국 4대 사찰 중 한 곳이다.
건봉사 왕소나무
1500여 년의 고찰 건봉사는 왕실의 원당으로써 그 규모나 세가 전국 최대의 사찰이었다. 융성기 때는 3,183칸의 전각이 있었던 건봉사의 웅대한 규모도 1500여 년의 세월 동안 산불과 전란 등으로 인해 여러번 소실되고 복원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극락전 지역의 왼쪽 산등성이에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해 고고하게 서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다. 건봉사의 번성과 아픔을 이야기하듯 300여 년의 세월동안 한결같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그리 크게 보이지 않지만, 다가가면 성인 2명이 껴안아도 손이 닿지 않는 나무둘레였다. 직접 찾아가 왕소나무에 양손을 짚고 기운을 전해 받고 왔다.
적멸보궁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찰을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건봉사에 봉안된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께서 선덕왕 5년(636)에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전에 기도 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 중 일부다. 자장율사는 643년에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5대 적멸보궁(통도사, 월정사, 법흥사, 정암사, 봉정암) 등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해 갔던 것을 1605년 사명대사가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되찾아 왔다.
사명대사는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다시 모시고, 그 가운데 치아사리 12과만을 맨 처음 의승군을 규합했던 인연이 있는 건봉사에 봉안하였다. 건봉사 진신치아사리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6.6월 사리탑이 도굴되면서 부터다. 하지만 사리를 돌려보내라며 꾸짖는 부처님의 꿈을 며칠간 계속 꾼 도굴범들이 결국 사리를 다시 돌려보냄으로써 되찾게 되었으나, 총 12과 중 8과만 회수하게 되고 나머지 4과의 행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건봉사에서는 1966년 되찾은 8과 중 3과를 이곳 적멸보궁 사리탑에 다시 봉안하고, 나머지 5과는 일반신도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사리함을 별도로 만들어 종무소 안 염불원에 모셔오던 것을 2022.1.15 염불원 맞은편이자 대웅전 왼쪽편에 있는 보안원을 보수하여 친견장으로 이운 봉안하였다.
대웅전
대웅은 위대한 영웅 즉, 부처님을 말한다. 석가모니불은 세상에 태어나 법을 깨닫고 중생을 구제한 부처로서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내려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석가모니불을 모신 집을 '대웅전' 또는 '대웅보전'이라고 한다. 지금의 대웅전은 한국전쟁 때인 1951.5월 폭격으로 소실된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치아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보안원
건봉사는 전 세계에 15과뿐인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가 봉안된 사찰이다. 치아사리는 건봉사에 12과와 스리랑카(불치사)에 3과(1과만 있다는 설도 있다)가 보관되고 있는 희귀한 보물이다. 현재 스리랑카에서는 치아사리를 모셔 놓은 탑이 국보1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가치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건봉사 12과 중 4과는 분실된 상태이기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