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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문경새재전국시낭송대회 지정시(김태근 선정 18편)
가을 바람 / 강상률
문경 새재 넘는 사람아!
가을 들녘에 꿈을 감추고
경건히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을 보라
고난과 역경의 비바람 이겨낸 계절을
말없이 꿋꿋이 견딘 오늘
땀을 식히는 새재 바람 앞에서
저 벼 이삭처럼 조용히 머리 숙여 보라
빈 가슴에 와 닿는
대지의 숨결 머문 부끄러움들
서로 잘난체뻐기며
눈을 부라리던 일이나
굳어진 얼굴로
부질없이 마음 상하던 일
모두 가을바람에 날려 보내고
이제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일이다.
문경새재 넘는 사람아!
산바람 넘쳐나는 기운을 보라
런링의 깃발 휘날리는 저 벌판
황금 물결 넘실거리는 번영과 희망이
영순 들에도 새재골 주흘산 자락에도
빈궁한 우리들 가슴속에도
풍성한 결실이 고운 햇살을 타고
가을바람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리라
문경새재를 읽다 / 김겨리
한 걸음 한 걸음이 문장인 길이 있다
능선으로 제본된 목차마다 행간이 경건한 순례,
일목요연하게 펼쳐지는 둘레길이 고금으로 웅숭깊다
철릭을 입은 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첫 장을 넘기자 새재의 서곡인 주흘관에 당도하니
관문교 물소리가 풍경風磬이 울리듯 애잔한 건
쥘부채 펴듯 펼쳐진 서사를 다 서술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출과 일몰로 빚은 윤슬로 밝히는 너덜길 따라
조곡관에 이르러 다리쉼하듯 산세를 굽어본다
발자국과 손길, 요凹와 철凸로 한 칸 한 칸 쌓은 성곽은
쉼표 없는 문장, 행갈이도 없이 편집된 질곡의 역사다
그랭이 공법으로 축조된 문장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차곡차곡 집필되고 있으므로
등고선에 밑줄 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능선을 넘는다
주흘관에서 조곡관을 지나 조령관에 이르고 나서도
뉘엿뉘엿 지는 해가 부봉에 걸려 있는 것은
아직 다 읽지 못한 새재의 내력을 체득하려 하기 때문인가
능선을 넘고 계곡을 지나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관문
문경새재, 오체투지체로 휘갈겨 쓴 절필의 장르여!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까지 문맥이 섬세하다
곳곳마다 탈자와 마모된 비문으로 편집되는 역사이지만
반으로 접어 놓고 두고두고 읽어야 할 지침서이기에
서표로 꽂아 놓은 달빛도 문장 부호가 되는 문경새재는
사계절의 의태어로 빚은 경전을 아직도 집필 중이다
‘조령진산도’를 읽다 / 김영욱
사라진 호랑이가 배꼽을 떨어뜨린 곳은 이쯤일 거야
성곽 옆구리에 엎드려 숨소리에 귀기울여봐
고깔 운무 쓰고 돌아앉은 어미 산
새재를 품에 안은 그림자도 우뚝한데
골짝 물길이 실핏줄로 감아 도는 등고선 한가운데
어느 멸망한 종족의 태실이 있지
예로부터 태를 묻은 곳엔 복이 들었지
장돌뱅이들이 등목을 하던 삼복더위에도
털옷을 걸치고서 평생을 떠돌았을 호랑이가
죽어서도 숲의 으쓱한 쇄골에 덮어둔 가죽은
하룻밤 묵어가는 길손들의 지름길 되고
봄비도 티 나지 않게 몸 낮추는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 성황당 어디쯤일 거야
처녀치마로 둘러쳐진 아름드리 귀목을
노령의 소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서있는 무림에서
아침햇살도 동티가 나지 않게 만다라를 그리는데
흙꽃 위에 두툼한 그늘막을 덮어주는 단풍 손은
어느 내생의 천수보살일까
길이 나기 전부터 탯줄을 품고 있던 이 숲은 보름달의 태반
오래전 궁예가 반달 같은 활을 내려놓고
신의 태엽을 발굴한 물의 나이테가 생사윤회의 바퀴라면
지아비의 발등 위로 불거진 핏줄은 사방으로 뻗은 산맥
못 박힌 발바닥에서 팔자로 갈라진 샛길은
괴나리봇짐 지고 호랑나비로 날아가는 활주로
이 울창한 안개들이 숨겨놓은 수구막이숲
길섶에 묻혀 있는 호랑이의 발품은 미래의 족보라지
예로부터 혈을 지른 자리에서 영웅이 났지
대대로 기를 받는 명당이 있다면
백두대간 등줄기를 제 피로 서늘하게 적시며
진달래꽃밭서덜로 새끼들을 밀어낸 어미의 자궁처럼
옴폭해서 아늑한 여기 이쯤일 거야
시(詩) 담은 찻사발 / 김찬자
맨 처음 내 몸은 흙이라 하더이다
맨 나중 내 육신은 옥돌이라 하더이다
이 찻사발이 어디메서 왔는지요
흙과 불의 만남이라지요
어찌 그 둘만의 만남뿐이겠어요
문경 앞산 뒷산이 다가와 섰고
문경 새재 넘나드는 골바람이 쓰담쓰담
달빛 별빛 곱게 받으며
문경 전설 가슴에 담은 흙과
문경 사람 냄새가 밴 흙이
밤새 이슬 내려 새날을 기다리던
도공의 부지런한 손길 따라
푸른 새벽이 오는 길섶 따라
흙사발은 푸른 꿈을 키워가더이다
그날, 하늘재 아래 관음리 동네가 온통
망댕이 전통 장작가마 뜨거운 어둠 속에서
황톳빛 살과 살을 부비며
온몸으로 걱정을 지우며
내 안의 욕망도 하나씩 내려놓더이다
도공은, 두 손 모아 보살마냥
불가마가 식을 때까지 한 자리에 지켜 서서
여태 말 못 한 사랑의 시어들이
찻사발에 가득 담아지길 소망하더이다
술도가가 있는 골목 / 문성해
산사춘 복분자 오가피주 백세주 매실주는 물론이거니와
막걸리 한 병을 마시다가도 그 병을 들어 만든 곳을 확인하는 일
그때마다 나는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오래된 술도가 골목을 더듬더듬 헤매지도 않고 흘러들어가게 된다
산사나무 열매나 복분자 오가피 냄새와
시큼덜큰한 막걸리 냄새가 흘러나오는 그 골목을 찾아들면
누런 냄새 위에 쓰러져 누운 술꾼이 있고
술지게미를 얻어먹고 비틀거리는 개가 있고
삐끔 열린 솟을대문 안에는 조금쯤 요망한 자세로 누워 깔깔거리는 여자들이 있다
어느새 나는 노란 한되들이 술 주전자를 들고
한모금 두모금 마시며 가는 간 큰 애가 되어
미나리꽝이나 앞산이나 저수지가 타박타박
내 눈 속을 아프지도 않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며
하늘과 땅과 마을과 들판 중에서도 내가 참 크다 하고
돌아앉은 뒷산도 그때만큼은 내 편이란 생각을 하며
이런 술도가가 있는 우리 마을을 내가 참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옆집 새댁이 내는 스란치마 소리처럼
조금쯤 은밀하고
조금쯤 세상에서 붕 떠나 있는
그 술도가 골목을 어린 나는 어미의 품처럼 파고들었으니
지금도 술을 받아놓고 술병을 들고 소재지를 확인하는 나는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어느새 그 많은 술도가를 다 편람한 듯 마음이 화끈해지고
그 골목에서 술꾼들의 오줌을 다 받아먹고 사는 맨드라미 모양
너도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수굿한 고개가 되곤 한다
문경새재, 멧발이 펼쳐지고 / 박봉철
험준한 길이라 새도 쉬어가게 하는
길마루에 젖어 고루한 고개처럼 유곡일까
깎아지른 벼랑의 이력들이 제 몫을 품은 채였다
숨 가쁘게 올라온 축성이 요충지가 되고
새재 곳곳 종일 수런대는 날갯짓, 새의 문자로 기록하는지
길목 몸피 마디마디 출렁이는,
이름 모를 나그네의 족적足跡이 선명하다
골골샅샅이 요충지로 이어가고
눈빗질에 목울대 곧추세우고
당당하게 사수하고 버티고 선
물오른 산줄기, 그 멧발이 펼쳐지네
녹음으로 짙게 물들이는
계절 초입 무성한 생각들이
늘 관문의 갑옷자락으로 휘날린다
한참을 걸어서
낮새껏 넘어가던, 너울가지 새재
철마를 타고 잊혀가는
한적한 발자취, 겅중겅중 달아나고
몸피에 그을린 너른 돌비석들, 즐비하고
저기 쭉 물레걸음하는 긴 관문,
총총 흙길로 뻗은, 문경새재는
고스란히 불그레한 역동域動의 몫이다
모전천 산벚나무 / 박영석
해가 뜨면 귀를 여는 산벚나무
아래로 모전천이 흐르고
그 나무 물 쪽으로 구부려 소리 듣는다
사월 중순 물때가 차면
이파리 꽃봉오리 만선의 봄배가 든다
싣고 온 싱싱한 것들 부려놓으면
꼭 비린내 훅 풍기는 어시장 같다
소래포구 구룡포구 또는 수산시장쯤 되리
비린 것은 비린 것끼리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왁자하니 크고 작은 사설 미끄러진다
어깨위로 등으로 하염없는 꽃 비늘
아가미도 가시도 없는 꽃의 편린들
비늘 화륵 모전천으로 뛰어든다
동심원이 마음에 파랑을 일으킨다
하늘이 몽땅 빠져 흐르는 모전천 푸른
물속에 그림자 거꾸로 박고 산벚나무
어디서 저 하얀 구름 한 자락 펼쳤을까?
구름 둥둥 밟으며
괜히 어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
괜히 물고기가 되고 싶은 산벚나무
집 나선 사람들이 잠시 서성이는 곳
햇살은 가끔 비늘을 뒤집다 주저앉는다
문경새재, 오리무중을 헤치다 / 배한봉
제3관문 가까이 이르자 문경새재는
안개의 나라라는 생각,
너럭바위 사이로, 소나무 사이로 새어나오는 안개,
계곡 물소리를 덮치며 흘러나오는 안개,
들은 바, 새재라는 이름에는 여러 유래 있지만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말이
가장 시적이지 않느냐 묻던 김형은
안개 때문에 새들이 더 날기 힘들었을 거라고,
새재할매집에서 곱으로 먹은 점심밥
벌써 소화 다 됐다며, 너스레웃음을 친다.
오솔길에 불과했을 옛 문경새재
도적이 다가와 옆구리 찔러도 길동무와 얼굴 구분 못 했을
그 오리무중 헤쳐 과거장에 도착한 선비는
어떤 답 남겼을까. 안개 세상에서의 길 찾는 법
소백준령 같은 필법으로 써내었을까.
일행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는 동안 김형과 나는
그런 이야기 나누며 아름드리 소나무에 등을 기댄다.
안개가 만든 이쪽과 저쪽 세계의 경계
어떤 걸음으로, 어떤 마음으로 넘을 것인가.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상주의
닭 찾아준 달성판관 같은 이를 떠올리며
짙은 안개 속에서 다시 가야할 길 가늠하는 우리에게
안개 없어도 안개 낀 새재보다 길 찾기 어려운 이 시대,
길 잘 찾아 가라 일러주는 것인가. 이제야
뿌옇게 삼킨 하늘과 비경
햇살과 함께 슬금슬금 풀어내는 문경새재
문경막사발 연가 / 신동익
호랑이 우렁찬 산마을, 송진내 진동하는
장작과 점토자태(粘土瓷胎) 민요(民窯)에서 결혼했네
천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아이 막사발.
청자에 밀리고 백자에 누질이고
요강이 밥이 되고, 화분이 밥이 되던
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기구한 그 막사발.
귀족적 여성적 온화함 그다 분수 밖
깨끗하고 담백하고 검소함 그도 사치
날마다 씀에 편하고 수더분한 막사발.
쌍둥이로 태어나 권좌에 앉을 만한
남성적 분청사기 족보에 올라도, 너는
꾸미지 않아도 수수한 서민적 막사발.
심봉사 눈을 뜨듯, 소박미의 재발견
한류에 돛 달아라, 신안 앞바다 유물처럼
밥그릇 술잔 찻잔에 그대 바코드, 막사발.
문경새재 / 심강우
문경에서 나는 박달나무는 홍두깨가 되었지요
주흘산 조령산을 넘어온 구름이 보자기란들
사시장철 굽잇길 다듬잇돌을 시늉하던 걸음
성황당 고개에서 비손을 하던 여인,
자드락자드락 해동갑으로 잇대던 구김살
어이 다 싸맬 수 있을까요
때까치 울고 오목눈이 직박구리 추임새에
저 멀리 조령관 너머 수안보 지나 한강으로
신수 훤한 도포자락을 언제 또 보려는지,
옷고름에 젖은 사연 낙동강 굽이마다
새재라 새재, 눈 밝은 새들의 기별도
마애비로 남아 하인의 옹심도 선비의 큰마음도
가루를 자청한 기와 조각이 되었지요
새재에 불던 바람은 길이 되었지요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한 줄로 꿴
오르막 내리막 패랭이 쓴 장꾼이 걷던 길
넘으면 시름이요 앉으면 푸념이라던
질경이 바랭이 억세게 핀 황톳길
가도 가도 첩첩산중 애옥살이 닮은 길
어이 다 지울 수 있을까요
새재를 넘어도 새재
새재에 못 미쳐도 새재
사람살이 천길만길 다함없는 발짝으로
문경에 가면 우리 한세상 닮은 새재가 있지요
경사를 들을 날 있다고 문경聞慶
계절이 빗장을 걸고 새들이 문지기를 서는,
새재가 있어 문경이 완성된 그런 곳이 있지요
새재의 달빛 / 엄재국
새재에 오면, 달의 뒷면을 걸을 수 있다
달 속을 흐르는 계곡물소리에
서로의 눈빛으로 젖었다가
물속에서 갓 건져낸 달을
단풍잎으로 닦아 가슴에 품을 수 있다
주흘관 옛길 걷는 바람에게
수백 년 전,
그 너머 이야기를 들으며 겪으며
조곡관이 펼치는 하늘, 푸른 담장 위에서
왜병을 온 몸으로 막아서던
조선 병사의 마지막 눈길을 만날 수 있다
그 옛날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등짝과 가슴이 파여지고 헤쳐지던
여기 새재는,
달빛이 알 스는 마을
모여든 발자국에 땅위의 것들이 익고
풀썩이는 흙먼지 붉은 눈빛이
조령관 가슴 속에 붐비는 노래이려니
낮은 몸 발끝으로 순한 길을 펼치는
우리는 다 같이 길 위의 사람들
누구라도
대문 활짝 열어 놓은 달 속의 첫 동네
문경새재에 오면,
잘 익은 사과를 뚝뚝 따듯
한 광주리 달빛을 담아 갈 수 있다
문경새재 / 오영록
박달나무 속에는 조탁(彫琢) 공이 살고 있다
겨우내 저 둥근 나이테를 빗도 깎아놓고
다듬어 조각해 놓았다가 보부상 보따리에 끼워 넣는다
박달은 본디 물렀을 거다
겨우내 마음을 다잡듯 햇빛에 바래고 눈보라로 담금질하여
마음을 다잡듯 그리 단단해졌을 거다
새소리로 결을 만들고 재를 넘는 바람의 가쁜 호흡으로
단단해졌을 것이다
겨우내 나이테와 꽃을 조탁하였다가
이른 봄부터 가지가지 연등처럼 연초록 등을 매다는
수고로운 장인의 손길
햇볕에 천 일을 말리고
뒤틀린 결을 천 일 동안 바람으로 바로잡고
유월 소나기로 정제하고 나야
어느 집 식탁으로 대갓집 참빗이 될 수 있다
참선에 들지 못한 나이테는
또 이내 울긋불긋 물들였다가 이듬해 다시
조탁에 들어가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장인이 있다
겨울날 박달나무에 귀를 대보면 그 조탁하는 소리가
쿵쿵 들리기도 했다
문경새재에 들면 숟가락이나 주걱 깎는 소리가
메아리치기도 했다.
문경새재, 높푸른 꿈의 고개 / 유안진
하늘과 땅 사이의 드높은 사이고개
새들도 쉬어 넘은 문경 땅 새재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넘어가고
초립동(草笠童)이 넘어가고
그이들의 피땀 절은 십년공부가 넘어가서
알성급제(謁聖及第)가 넘어왔고
장원급제(壯元及第)가 넘어왔지만
더 많이 넘어온 한숨 눈물 구비 구비
새소리만이 아니다
바람소리만은 더 아니다
넘어야 하는 꿈의 고개가 하도나 높고 험해
꿈도 높푸르러 고갯길이 되었으리니
바라고 소망하는 그 이름이 되었으리니
문경(聞慶), 귀하고 아름다워 경사스런 이름대로
발뒷꿈치 발걸음마다 기쁜 소식이 뒤따라와
흰 구름 속 고갯마루 문경새재에는
내 모국어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낭랑 랑.
흙꽃으로 핀 전설/ 윤보영
잃어버린 전설로
아픈 마음을 반죽해서
찻사발을 빚어내는 사기장!
자제할 수 없는 슬픔을
생사기에 덧칠하고
날마다 장작 가마에 태웁니다.
금이 가고
주저앉고
찾을 수 없는 사연에
소리 내어 우는 불꽃!
가마도 따라 울었습니다.
낙엽 한 잎에 담길 듯
무심한 세월은
안타깝게 지나가고
가마 문을 나서는 사발은
깨어집니다.
그립다, 그립다
날 선 사금파리에 세월이 베이고
끊임없는 실패 끝에
손끝으로 감기는 전설!
가마 속에 들어가 꽃을 피웠습니다
정호다완(井戶茶碗)
문경에서 찻사발로 태어났습니다
지지 않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물박달나무의 노래 / 이가림
새재 골짜기
물박달나무는
딱 한 곡조
우리네 어메의 어메의 어메
그 어메가 부르던 아리랑밖에
부를 줄 모른다
그것도 아르르르 아르르르 아라리요
나직이 흐르며 이어지는
끝자락만
되풀이 되풀이
흥얼거린다
원래
도끼날도 튕겨져 나가게 하는
꽝꽝한 성미인데,
제 몸뚱이가 방망이로 만들어져
하많은 세월 달빛에 젖어
다듬이질이나 하며 살아온 신세가
너무도 기막힌 탓일까
새재 골짜기
물박달나무는
딱 한 곡조
우리네 할메의 할메의 할메
그 할메가 부르던 아리랑밖에
부를 줄 모른다
그것도 아르르르 아르르르 아라리요
천만 번 다듬이질에도
끊어지지 않는 가락
되풀이 되풀이
흥얼거린다
달빛이 새재를 산책하다 /이종숙
흐르는 길 위의 역사에 풀린 시간은
박달나무 잔가지 질긴 울음으로
슬픔의 모서리가 닳아지는 물굽이마다
소복을 고쳐 입은 억새의 넋을 펼쳐 놓았다
어스름 달빛 하늘재를 잇는 능선 따라
주흘산을 구비구비 느루* 찍어 새재에 이르면
낮은 풀꽃들 살랑이며 이화령에 발그레한 볼 내민다
사슴의 맑은 눈망울에 별빛이 쏟아져 내리고
능선의 잔물결 위에서 제 명에 못간 선조의 영혼이
천 리 길 삼각산**에서 소쩍새 울음소리 잦아들어
낙심한 주흘산이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
하늘재에 기대어 이화령을 바라보며
영남대로 고갯길에 자리를 틀어 앉아
읊는 시 한 수는 흰 꽃 대궁 서걱이는 억새의 노래
술잔 속에 떠 있는 달은 가신 임 붉은 얼굴 설화로 밝히고
머나먼 길 사유의 가슴마다 풀 내음이 스민다
기암절벽에 핀 싸리나무 분홍 꽃송이
저 수심 깊은 곳 칠 선녀 숨결 묻힌 물기둥에
여궁폭포 눈물이 바람결에 별빛처럼 반짝이면
초록의 혼, 숨결에 매혹된 이 밤 사랑의 연분을 익히고 있다
혜국사 풍경소리 저무는 노을 업고
고단한 하루, 햇볕 한 줌으로 분칠한 새재에
그리운 얼굴 닮은 저 달의 흥건한 말들이
문경 밤하늘에 총총 미리내를 깔아 주고 있다.
새재 / 이경림
칠흑의 새재를 넘어 보고야 알았다
한 재가 얼마나 많은 골짜기를 품고 있는지
골짜기들은 또 얼마나 깊은 어둠을 품고 있는지
새들도 넘지 못한다는 재를 칭칭 감으며 낡은 승용차가 위태롭게 내려갈 때
골골의 어둠이 노랗게 언 달을 밀어 올리고
한 치 앞의 벼랑이 시간을 자꾸 헛바퀴 돌릴 때
우리는 생사의 경계 위에 선 아버지를 보았다
온 산에 슬픔이 달빛처럼 번지고 있었다
누구였는지 문득, 넋 없는 사람처럼
재 아래 어른거리는 어린 날을 끄집어냈다
바람나 재 넘어간 옥자 얘기, 구랑리에서 떼죽음 당한 어느 一家의 얘기,
육이오 때, 목숨 걸고 재를 넘겨준 家僕의 얘기며
난리통에 관문 속 어느 골짜기에 묻히신 증조부 얘기를 두서없이 중얼댔지만
두려움보다 재는 높고 슬픔보다 길이 더 휘어
끝내 우리는 말을 잃었다
그러나 누군들 몰랐으리
그 모두 한 재가 토해낸 한숨이라는 걸
그 숨으로 깊어진 골짜기라는 걸
그것이 밀어올린 봉우리라는 걸
이화령쯤에서 / 이기철
황혼의 집들은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산 아래 산이 눕고 길 아래 길이 누워
살아 있는 것들은 나무도 짐승도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문경새재는 밤에도 키가 크고
서로 부대끼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상수리들만
푸름을 놓쳐버린 잎들을 벌려
남쪽 마을을 향해 펄럭인다
이우출 시조비 제막식에
뇌졸중으로 오지 못한 신동집의 시 한 구절은
우리의 시월을 쓸쓸하게 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수안보 길을 묻지 않고
병든 시인의 안부를 물었다
누가 나에게 신의 모습을 그리라 한다면
나는 산짐승들의 유순한 눈에 비친
저녁놀을 그리겠다
저녁의 빛깔이 하늘을 데우는 온기로 떠돌 때
숲은 햇빛을 제 몸 속으로 흡수하고
새소리를 몸 밖으로 뱉아낸다
사람보다 나무들이 먼저 겨울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이름 모르는 마을의 집들이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이화령쯤에서
아무도 제 슬픔의 빛깔을 채색하지 못할 때
주황색의 깃발을 들어 나는
지상의 추위타는 것들을 데워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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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