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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셋째 부부주일 설교 *
+ 제 목 :“부부의 만남과 그 삶의 신비로움”
+ 본 문 :에베소서 5장 22절 - 33절 (신약 315쪽)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아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아멘!
가정의 달 5월 첫째 주일은 어린이 주일, 다음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오늘은 셋째 주일은 부부주일입니다. 부부로서 잘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는 주일이고,
앞으로 남은 세월, 더 행복하게 더 사랑하며 잘 살아보자는 의미에서 지키는 주일입니다.
저는 결혼을 주례할 때는 물론, 저를 포함해 부부로 만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과 사람의 만나 아내와 남편이 되는 것, 참으로 신비롭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둘이 하나되어 부부로 살아가는 것, 굉장한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부로 만난 만남의 그 신비로움, 그 뜻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부부로 만난 만남의 첫 번째 신비로움은 ‘오묘한 하나님의 뜻’ 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그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어 본다면,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황칭리에서 지현규목사의 장녀로,
태어난 제 아내 지영신과,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 101번지에서 신영순권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저 김대용은 결혼하기 1년 전까지는, 단 한 번도 만나 본적이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데도 기적적으로 만나 결혼하였고, 2022년까지 만 45년째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싫든 좋든 결혼하여 살아가는 모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 보면, 각기 전혀 다른 환경에서 20년이 넘도록 자라다가, 어느 날인가,
그렇게 그렇게 만나 결혼하여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 바로 거기에 신비함이 들어 있고,
오묘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결혼하여 부부로 살아가는 분들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을 때까지, 이런 신비로움, 오묘한 하나님 뜻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가면서 쓸데없는 일로 서로 갈등하고, 다투고, 원망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부부로 만난 만남의 두 번째 신비로움은 ‘부부가 되겠다는 용기 - 부부가 되어,
한평생 해로하며 살아가겠다는 용기 – 부모가 되어야 하겠다는 용기’ 입니다.
저도 그렇게 결혼했습니다만, 결혼주례 때에 서약하는 시간에 ‘평생을 함께 살면서,
서로 사랑하며 살겠느냐?’ 고 물으면, 누구 하나 주저함이 없이 ‘예’ 하고 대답합니다.
저는 그 대답을 들을 때마다 ‘참 대단한 용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듭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니네들이 뭘 안다고, 대답은 잘한다.
그래 살아보면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이다.’ 하며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1, 2년도 아니고, 감히 일평생을 두 사람이 함께 고난도 즐거움도 같이 하며,
사랑하며 살아가겠다고 주저하지 않고 ‘예’ 하고 대답하는데, 얼마나 믿음이 좋습니까?
그런데 살아보니 압니다. 이 믿음은 알고 보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요, 선물입니다.
여기에 바로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부부로 만난 만남의 신비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즈음 젊은이들은 낳아주신 부모님하고도 함께 살기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 간에도 사소한 일로 불화하고, 발길을 끊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남이 만나 평생을 함께 살겠다고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예’ 라고 대답하고, 대답한 대로 평생을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신비롭습니다.
때론 잔소리를 듣고, 매를 맞아가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신비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가 되겠다는 용기 - 부부가 되어 한평생 해로하며 살아가는 용기“,
곧 부부로 만난 만남의 신비로움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요, 선물입니다.
부부로 만난 만남의 세 번째 신비로움은 부부가 되겠다고 나란히 서 있는 신랑 신부,
그리고 부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천정배필 – 닮았어요. 신비롭습니다.
천생연분, 저는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거기서 두 사람이 부부로 만난 만남의 신비로움을 새삼 놀라움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잘 만났다 잘 만나, 참 천생연분이로구나!’ 하고 감탄을 합니다.
이처럼 부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만난 필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생각 없이 그냥 살면,
어떤 일에서도 깊이 감추어진 신비함 –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와 신비한 섭리가 다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깊이 들여다 보고 생각해 보면,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을 만나게 되고, 그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고,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만난 부부를 말하라면, 이삭과 리브가 부부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이삭을 제물로 결박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빼어 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25세요, 이삭의 나이 25세였으니까, 이삭이 충분히 아버지를 떨쳐버리고,
도망갈 수도 있었으나, 이삭은 자기 방어를 조금도 하지 않고 순종을 하였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기에, 제물이 되어 죽기까지 기꺼이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젊은이 이삭의 마음은 깨끗하였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이 매우 깊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처녀 리브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리브가가 화란의 자기 동네 우물가에서, 이삭의 짝을 찾는 아브라함의 종을 만났을 때,
우물 물을 주며 선행을 베풀었고, 그 일로 자기 집에 유숙하게 된 아브라함의 종이,
처녀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데리고 가겠다고 하자,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남자에게 결혼을 하기 위해서, 기꺼이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신앙이 같아야만 하고, 신앙의 질도, 신앙의 방향도 같아야만 합니다.
부부가 신앙이 다르고, 신앙의 질이 다르고, 신앙의 방향이 다르면 참 괴롭고 힘듭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평생 누구의 피를 흘려 본적이 없이 순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는 결혼생활 20년이 되도록 자녀가 없었으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조급하게 첩을 들인다거나, 인간의 방법으로 자식을 둘려고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끝까지 이삭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믿음, 오직 믿음으로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기다린 이삭과 리브가에게, 하나님은 쌍둥이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이삭과 리브가 부부는 그 생활이 아주 깨끗한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부부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삭과 리브가 부부처럼 살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부부들이 문제가 많고, 갈등이 많고, 불화가 많고, 장애가 많습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부부들이 고민합니다. 젊은이들은 결혼을 꺼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많은 문제들로 고민하는 부부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이상적으로 살아가는 행복한 부부의 삶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대부분의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는 말씀에 기분 나빠합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속성을 아시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남성들의 속성은 한마디로 명령하기를 좋아하고, 떠받들어 주면 정신없이 좋아하고,
별 실속은 없으면서도, 에헴 하면서 큰소리치기를 좋아하고, 왕노릇하기를 좋아합니다.
여성들이 이런 남자들의 속성을 알면,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편의 기를 살려 주라는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고, 남편에게 기꺼이 복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들의 속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 칩니다.
한마디로 왕 노릇하기 좋아하는 남성들을 알고 복종하면, 남편의 기가 삽니다.
남자들은 큰소리 못치고 살아가면 기가 죽고, 기가 죽으면 그때부터 남자 구실을 못합니다.
간 큰 남자 시리즈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아침에 밥 달라고 하는 남자는,
간이 큰 남자요.’ ‘아내가 밖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 왔을 때, 아내를 향해 고개 빳빳이 들고,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는 남자도 간이 큰 남자’ 라고, 재미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간 큰 남자로 만들라고 말씀합니다.
가정사역자 손길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꼭 내 이야기를 하느냐?’
말할 정도로 공감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아침 잠을 못이기는,
어린 아들을 깨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알았어요, 내가 확실히 깨울께요.’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아들아, 빨리 일어나, 니네 엄마 화낸다.’ 하면서 깨웁니다.
‘일어나라!’ 하는 아버지의 위엄 있는 한마디에 벌떡 일어났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아내와 자식 앞에서 작아진 남자, 당당하지 못한 아버지, 고개 숙인 남자들, 불쌍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당당하게 취업을 한 아들에게서,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은 결혼할 상대자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아내도 스피커폰으로 듣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아, 기특하구나. 네가 벌써 커서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구나,
결혼은 달콤하고, 기쁘고, 행복한 것이란다. 부디 행복한 부부가 되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 대화를 지켜 보던 그의 아내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잠깐 밖으로 나갑니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재빠르게 다시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방금 네 어머니가 있어서,
그렇게 말했는데, 야, 이 바보 멍텅구리야, 결혼은 무덤이야! 무덤! 결혼하지마 임마.’
이 얼마나 웃으운 이야기입니까? - 이것은 분명 비극이요, 동시에 웃기는 희극입니다.
잘난 척 하고 싶어하는 남편에게 복종하여, 남편들이 건강한 마음으로 왕 노릇하며,
자신 있게 살아가도록 해주면, 복종하는 자신은 왕비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에는, 그처럼 심오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번엔 남편들에게 당부한 말씀이 있는데,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리고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하라!” - 남성들은 왕 노릇하길 원하지만, 여성들의 오밀조밀한,
것을 좋아하고, 하찮은 말 한마디에 감격해 하고, 하찮은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일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여자들은 사랑받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평생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어느 부인이,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소리가 듣고 싶어,
직장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 옛날에 ‘사랑해요. 하고, 안 사랑해요. 가 살았는데,
어느 날, 안 사랑해요. 가 그만 죽었데요. 그러면 누가 남았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답은 뻔하잖아요. “사랑해요.” 그래서 그 남편이 ‘사랑해요.’ 하고 대답할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 남편의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해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씰데 없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바빠 죽겄는디’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아내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남편에겐 ‘여보, 사랑해요.’ 라는 말이 외국어였습니다.
아내는 남편들의 사랑을 먹고 행복해 한다는 사실을, 남편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는 공경의 대상이요, 자식은 돌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공경의 대상인 부모, 돌보아야 할 자식도 떠납니다. 오직 끝까지 떨어질 수 없어,
남는 것은 한 몸인 아내와 남편뿐입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신비로운 만남이요.
한 평생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가는 부부의 관계 역시 신비로운 관계입니다.
오묘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혼을 하여,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는 것과,
부부가 되겠다는 용기 - 부부가 되어 한평생 해로하며 살아가는 용기와, 천생연분,
누가 더 낫고, 누가 덜함도 없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만난 만남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이러한 신비로움이 있는 부부는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며”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며,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
부부 여러분! 이렇게 늘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