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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천 '강화도'와 함께 강화도에서 연륙교(교동대교)로 연결되어 있는 '교동도'를 찾았다.
'강화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한 섬으로 강화군의 본 섬이다. 원래 경기도의 섬이었지만, 1995.3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에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인천광역시 본토보다는 경기도 김포시와 가깝고, 육로를 통해 가려면 무조건 김포시를 거쳐야 한다. 역사적으로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개성)과 조선 및 대한민국의 수도인 한성(서울)과 가까우며, 양 지역의 주요 강인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바다 쪽 출구를 막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강화도는 2016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원래는 ①제주도, ②거제도, ③진도, ④남해도에 이어 5번째 섬이었는데, 장기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진행하여 면적이 조금씩 늘어나다가 300㎦를 넘어, 면적 차이가 적던 '남해도'보다 넓어져서 우리나라의 4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교동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의 본 섬이다. 인천 본토의 서북쪽이자, 강화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강을 건너 황해도 연안군과 휴전선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위에 있으므로 교동대교 입구에 있는 군부대 근무초소에서 인적사항(성명, 생년월일, 연락처, 차량번호)을 기록·제출하고 임시출입증을 발급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물길이 험해서 탈출이 어렵고, 한양과 가까우며, 감시하기는 쉬워서 왕족들의 유배지로 각광받았던 곳이다.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난 연산군이 유배되어 사망했고, 광해군도 제주도로 이배되기 전 여기서 잠시 지냈으며, 그 외에도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화완옹주, 영선군(고종의 조카 이준용) 등이 여기에 유배되었다.
예전에는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2014.7.1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자동차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과 민간인 통제구역이라는 점 때문에 외부와 오랜 시간 단절되었는데, 교동대교가 개통되고 최근에는 핫한 곳으로 소문이 나면서 강화도 여행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오늘의 여행코스는 월곶돈대/연미정 - 평화전망대 - 교동도 제비집/대룡시장 - 전등사 - 초지진 코스를 선택했다.
강화도 월곶돈대 / 연미정
월곶돈대와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
월곶진에 속한 '월곶돈대'는 과거 서울, 인천, 연백(북한지역) 등지로 교통할 수 있는 월곶나루가 있던 해상로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월곶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 유수 윤이제가 정비한 돈대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규모는 동서 폭 47m, 남북 폭 38m이다. 서쪽 하단부에 황형장군 택지비와 월곶진의 문루인 복원된 조해루가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1459~1520)의 '옛 집터(택지)'이다. 선생의 자는 언평, 시호는 장무이며, 본관은 창원으로 성종 11년(1480) 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하고, 1486년 무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시 전라좌도 방어사로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중중 7년(1512)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평안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왕이 그의 공을 찬양하며 연미정을 하사하여 이곳 월곶리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뒷쪽에 보이는 월곶돈대 안에 연미정이 위치한다.
남과 북의 강이 하나되어 흐르는 연미정(유형문화재 제24호)
'연미정'은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는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연미정이라는 정자 이름의 유래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진 물줄기가 강화도 동북단(연미정 앞)에 이르러 서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연미정'이라 했다고 한다. 사방으로 탁 트인 정자의 모습과 성벽 같은 돈대가 둘레를 치고 있어 아늑하고 풍광이 수려하다. 정자에 올라 바라본 고요한 아침 풍경과 해지는 석양은 가히 숨을 멈추게 한다. 하지만 아픔도 함께 간직하고 있다. 1625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 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도 한다. MBC 월화드라마 '왕은 사랑한다(2017.7.17~9.19)' 촬영지이기도 하다.
연미정 양쪽에는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건만, 2019.9.1~8일 한반도를 휩쓸었던 태풍 '링링'에 의해 나무 몸체가 부러지는 아픔을 겪었다. 부러진 몸체가 연미정 반대방향으로 넘어져 연미정은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연미정 앞바다
'연미정 앞바다'는 남한의 '한강'과 북한의 '임진강'이 하나되어 '서해'로 흐르는 만남의 장이다. 연미정에서 바라 보이는 유도(섬)는 1996년 홍수 때 북한에서 떠내려 온 소 한마리가 있었는데, 나날이 야위어가는 소를 보다 못해 남북이 극적으로 합의하여 우리 군에서 구출하여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언론에도 보도된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 이후 제주산 소인 「통일의 소」와 인연을 맺어줬으며, 그 2세 소가 「평화통일의 소」이며, 지금은 그 몇대 후손의 소들이 제주도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남북의 주민들이 연미정 앞바다를 바라만 보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미래의 남북 주민들이 함께 뱃놀이를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옛날에는 서해에서 한양(서울)으로 가던 배가 이곳 연미정 앞바다 선착장에서 닻을 내려놓고 조류(潮流)를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강화 평화전망대
'강화 평화전망대'는 우리나라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2.3km) 거리에 있는 곳으로 다른 지역의 전망대와 달리 날씨가 좋을 때는 북한(황해북도 개풍군)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 주택, 학교, 마을회관 및 선전용 위장마을 등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생생히 볼 수 있는 곳이다. 민통선 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고,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의미로 '제적봉'으로 불리기도 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산 6-1번지에 2008.9.5에 개관한 전망대이다.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
전망대 정면으로는 개풍군과 함께 멀리 송악산이 보이며, 그 아래에 개성시와 개성공단이 위치한다. 전망대에서 개성시까지의 거리는 불과 18km로 강화도 남단 마니산보다 가까운 거리이다. 전망대 좌측으로는 황해남도연안군과 배천군이 자리하며 북한 최대의 곡창지대인 연백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배천군과 개풍군 사이로는 예성강이 흐르고, 고려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벽란도'가 바로 이 예성강 하구에 있다. 예성강 우측으로 개풍군과 개성공단이 있는 개성시를 볼 수 있다. 3층 브리핑장에서 해설사님의 브리핑을 듣고 2층으로 내려오니 동일한 형태의 브리핑장이 또 있었다.
전망대 앞바다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세 강물이 바닷물과 함께 평화롭게 흐르는 공간이다. 그러나 남북의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으로 단지 새들만이 자유롭게 통행할 뿐, 실향민 저마다의 안타까운 사연이 말없이 흐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 이 물길을 따라 벽란도 여행은 물론 개성까지도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전망대 전방에 위치한 북한의 황해남도 개풍군
망배단과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북녁의 고향을 눈 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실향민과 그 후손들, 그리고 북한 이탈주민들이 합동망향제를 지내는 곳이다. 또한 이산가족들이 고향을 보며 제사를 올릴 수 있도록 망배단을 상시 개방하고 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온 모든 이들은 "한 마리 새가 되어 고향으로 날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이라며 독백에 가까운 소원을 빌런지도 모르겠다.
강화 교동도
교동제비집
'교동제비집'은 교동도에 대한 관광안내소이다. 교동도 처마 밑, 심지어 안방에서도 만나는 제비는 청정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교동도의 상징이다. 이를 모티브로 지어진 '교동제비집'에서는 신 IT기술을 접목한 관광플랫폼으로 관광정보나 다양한 체험을 접할 수 있다. 전시실, 전망대, 카페, VR체험, 노래부르기 등이 가능하고, 그 밖에 자전거 대여 서비스(2시간 4,000원)를 이용하여 교동도를 한바퀴 돌아 볼 수도 있다.
대룡시장
1950.6.25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교동도로 월남(피난)하였던 실향민들이 휴전 이후 북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황해도를 추억하는 마음으로 황해도 연안군에 있다는 '연안시장'을 본떠서 만든 재래시장이다. 1960~7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풍경과 간판들을 마주할 수 있다. 지금은 많이 현대화되었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작가들의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현재는 인구 감소와 1세들이 대부분 돌아가시고, 그 자손들이 시장을 지켜가고 있다. 예능프로 1박2일, 드라마 전설의 마녀(시장 내 거북당 빵집), 장미빛 연인들, 선을 넘는 녀석들(시장 내 뚱이 호떡집) 등 인기있는 촬영지이다.
강화 전등사
전등사는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사적 130호인 삼랑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적 1점, 보물 6점, 시 문화재 14점 등 많은 문화재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정족산 사고, 가궐 터, 정족진지, 의병 전투지 등이 있는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한 유서깊은 곳이다. 전설의 나부상, 은행나무, 오래된 느티나무, 주엽나무, 엄나무, 왕소사나무, 수백년 수령의 단풍나무, 노송 군락지 등 다양한 수목이 바다와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전등사 내 전통찻집 '죽림다원'
차를 마시는 시간에는 서두름을 멀리하게 된다. 특히 사찰 안에서 음미하는 차는 더욱 그렇다. 전등사에 있는 죽림다원은 천년고찰 전등사와 맞닿아 있는 공간이다.
전등사
전등사는 단군의 세 아들이 싸았다는 삼랑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진종사'라 지어진 이 사찰을 고려 충렬왕 정화공주가 옥등을 시주한 데서 '전등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1678년(숙종 4년)에는 조정의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현재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이 있는 고찰이다.
강화 전등사 대웅전
대웅전은 절의 중심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다. 대웅은 법화경에서 위대한 영웅을 뜻하는 말로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이곳 대웅전은 화려한 내부 장식과 능숙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조선 중기 사찰 건축물이다.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부처를 모신 불단과 불상 머리 위의 닫집(법당 안 불단 위를 덮도록 만든 집의 모형, 부처님이 설법할 때 사용한 햇볕 가리개를 표현한 것) 장식이 화려하다.
【강화 전등사 목조 석가여해 삼불 좌상】
강화 전등사 '목조 석가여래 삼불 좌상'은 조선 인조 원년(1628)에 수연을 비롯한 6명의 승려 조각가가 제작한 불상이다. 이 삼불 좌상은 석가여래(1번)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아미타여래(2번)가, 왼쪽에 약사여래(3번)가 모셔져 있다.
【전등사 업경대】
업경대는 염라대왕이 망자의 죄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전등사 업경대는 인조 5년(1627)에 제작되었는데, 황색 사자와 청색 사자 1쌍으로 되어 있다. 나무로 만든 사자의 등 위에 커다란 불꽃 문양으로 둘러싸인 거울이 꽂혀 있는 형태이며, 대웅전에 모신 삼존불상의 오른쪽(4번)에 황색 사자가, 왼쪽(5번)에 청색사자가 자리하고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수미단】
수미단은 법당 내부에서 불상을 모셔놓은 단을 말한다. 불교에서 수미단은 세계의 중앙에 있으며, 여기에 부처가 있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법당에서는 부처를 모시는 곳을 수미단이라고 한다. 전등사 수미단은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단에는 수미단을 상징하는 각종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전등사 대웅전 '나부상의 전설'
전등사의 대웅전은 당시 나라 내에서 손꼽히는 목수인 '도편수'에게 건축 책임을 부여했다. 도편수는 대웅전을 중창하는 도중에 주모와의 사랑에 빠져 벌어들인 돈의 일부를 전달하며 공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즈음 주모가 다른 남자와 함께 도망친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분노한 도편수는 배신한 주모에게 형벌을 내리고자 했다. 그래서 벌거벗은 채 손을 들고 무거운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 배신한 여인의 모습을 영원히 남겨둔 것이다. 이러한 나부상은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해져 온다. 전등사를 방문하게 되면 꼭 나부상을 찾아 보면서 진실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하실 것이라 기대해 본다.
전등사 대웅전 앞 전경
전등사에서 인증샷
강화 초지진
강화 지역은 1870년대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한 열강들과 격렬히 싸웠던 곳이다. 그 중 '초지진'은 강화해협을 사수하는 12개의 진·보 중에 외세의 첫 번째 침입장소로, 특히 고종 8년(1971) '신미양요' 때 전력의 열세로 미군에게 점령을 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되었고, 이어 고종 12년(1875)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 때에는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고종 13년(1876)에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는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초지진과 두 그루의 소나무
'초지진'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허물어져 성벽의 기초만 남았다. 이후 1970년대에 복원하고 이곳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대포를 전시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초지진 소나무' 수령은 약 400년 정도 되었다. 나무는 굵은 줄기가 위로 솟구쳐 여러 갈래로 뻗은 모양으로 가지가 늘어지면서 삿갓모양으로 처져 아름다운 수형을 가지고 있으며, 생육상태가 양호하다. 수려한 모양의 희귀 노거수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크며, 동시에 역사 문화적 가치 또한 크다.
소나무에는 격전 중 날아온 포탄 파편에 의한 상처의 흔적(동그라미 원)이 남아 있다. 복원한 초지진 성벽에도 당시의 피탄흔적이 있는 돌(동그라미 원)을 사용하여, 옛 상처를 교훈으로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