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유적지
푸른 비에 마음이 젖어드는 곳, 고산 윤선도 유적지
바람이 비자나무 숲을 스치고 지나가면 후두둑, 봄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사랑채의 이름을 ‘녹우당’이라 지었던가. 해남 윤씨의 600년 종택에서는 늘 푸른 비가 내려와 촉촉하게 마음을 적신다. 이곳에서는 누구라도 시인이 될 수밖에 없겠다. 고산 윤선도의 시조가 국문학의 한 획을 긋는 까닭을,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 동양 최고라고 손꼽히는 이유를 녹우당에 와보니 알 것 같다.
고산 윤선도의 삶과 문학적 자취를 찾아서
[왼쪽/오른쪽] 녹우당 앞에는 500여년 된 은행나무가 관광객을 맞는다./ 녹우당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은 여느 양반집과 달리 살짝 감춰져 있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겠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조의 문신이요 정치가이자 시조의 대가로 손꼽힌다.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 시대 삼대 가인으로 일컬어진다. 고산 윤선도의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같은 시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당시의 선비들이 한시를 지을 때 고산은 섬세하고 미려한 우리말 시조를 지어 빼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고산 윤선도는 문학뿐 아니라 철학, 천문, 지리, 의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으며 직접 거문고를 연주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겼다. 하지만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평생 유배와 은둔을 거듭한 그는 현실 정치를 애써 외면하며 자연을 벗 삼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녹우당을 거닐다 보면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해 자연스럽게 사색하게 된다.
고산 윤선도가 기거하던 사랑채, 녹우당
[왼쪽/오른쪽] 햇빛을 막기 위해 사랑채에 이중처마를 댄 것은 해남 윤씨집안의 실학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안마당에는 500여 년된 회화나무가 우거져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산 윤선도가 기거하던 사랑채를 녹우당이라고 부르고, 녹우당을 포함한 해남 윤씨 종택을 녹우단이라 부른다. 녹우단은 덕음산을 배산으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고 명당자리 중에 하나로, 호남지방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되고 규모가 큰 민가다. 사랑채인 녹우당은 고산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후 고산에게 하사한 집이다. 효종이 승하하고 조신들의 모함으로 낙향하게 된 고산은 수원에 있던 사랑채를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 다시 지었다고 한다. 원래 호남 양반집은 ‘ㄱ’자나 ‘ㄴ’자 형태로 짓는데 녹우당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양반집처럼 ‘ㅁ’자 형태의 집이 되었다.
사랑채인 녹우당이 들어서면서 ㅁ자 형태로 변모한 안채의 모습이다.(출처:해남군청) [왼쪽/오른쪽] 고산의 증손자인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가‘녹우당’이라는 당호를 짓고 현판을 썼다. / 고산 윤선도가 기거하던 사랑채를 녹우당이라고 부르고, 녹우당을 포함한 해남 윤씨 종택을 녹우단이라 부른다.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고산의 증손자인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가 지었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 역시 옥동 이서의 작품이다. 혹자는 ‘녹우’가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라고도 하고, 뒷산의 비자나무 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라고도 한다. 연유야 어쨌든 간에 초록색 비를 뜻하는 ‘녹우’라는 이름은 무척이나 낭만적이다.
500살 은행나무와 회화나무가 지켜온 녹우당
녹우당 앞에는 500년을 살아낸 나이 지긋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높이가 20미터나 되고 둘레가 5미터에 달하는 나무다. 고산의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강진에서 해남으로 터를 옮긴 이후 아들들의 진사시 합격을 기념하여 심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은행나무야말로 해남 윤씨 종가댁의 역사를 조용히 지켜본 산 증인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안마당에는 500여 년된 회화나무가 우거져 있다.
녹우당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은 여느 양반집과 달리 살짝 감춰져 있다. 집 앞을 지키고 서있는 은행나무가 무색하게도, 부드럽게 휘어져 들어간 담벼락 안에 대문이 숨겨져 있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앞에는 행랑채가,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위치한다. 이곳에서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가 학문과 예술에 정진했고,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교류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안마당에는 회화나무가 우거져 대문 밖의 은행나무와 조우한다.
양반댁의 안채는 본디 여성들의 거처였는데 지금은 해남윤씨의 14대 손이 실제로 살고 있다.
안채에는 현재 고산의 14대 종손이 살고 있다. 살림집인 안채의 마당에는 굴뚝과 함께 작은 화단이 자리했다. 고운 꽃이 심어진 마당이 단아하다. 부엌의 환기를 위해 안채에 까치 지붕을 올리고, 햇빛을 막기 위해 사랑채에 이중 처마를 댄 것은 모두 해남 윤 씨 집안의 실학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산책하는 녹우단 비자나무숲
[왼쪽/오른쪽] 녹우당의 바깥을 돌아나가면 고산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산길을 10여분 걸어올라가면 비자나무 숲길이 시작된다.
사랑채를 둘러보고 돌담길을 돌아나가면 고산 사당과 어초은 사당을 차례로 만난다. 왼쪽의 돌담길을 따라가면 추원당을 돌아나가는 산책길이고,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어초은 묘소를 지나 비자나무숲으로 가는 산길이다. 10분 정도 산길을 오르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 숲의 입구에 도착한다.
흰연꽃이 핀다고 해서 백련지라고 불리는 연못 위에 정자를 복원했다.
400여 그루의 비자나무는 평균 수령이 500년이다. 마을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이 가난해진다고 하여 후손들이 정성스레 심고 가꾼 인공 숲이다. 숲은 호젓하다. 덕음산 등산로로 이어지는 비자나무숲길은 초반에만 나무데크가 깔렸다. 비자나무 숲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등산화나 트래킹화를 신는 편이 좋겠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산책하는 녹우단 비자나무숲
고산 유물관에는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지었던 고산의 작품에서부터 우리나라 풍속화의 시원을 연 공재 윤두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은 해남 윤씨의 후손이 남긴 5천여 점의 문화유산을 보관하고 있다. 유물전시관 건물은 녹우당 고택의 지세를 고려해 전통한옥으로 지어져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이곳엔 고산 윤선도의 육필은 물론, 보물급 고문서와 서책이 가득하다. 윤선도가 사용했던 거문고도 복원해 보관 중이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공재 윤두서의 시서화와 화첩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가 돋보이는 윤두서의 자화상은 동양인의 자화상 중 최고로 꼽힌다. 한편 윤두서가 직접 그린 별자리 그림,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여도, 윤두서가 읽던 기하책, 천문책 등은 실학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공재 윤두서의 손자 청고가 그린 미인도는 섬세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해남 윤씨 일가 인물들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시대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여행정보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주소 : 전남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0
문의 : 061-530-5548 / korean.visitkorea.or.kr
기타정보
해남문화관광 061-530-5918 / http://tour.haenam.go.kr/
1.주변 음식점
호산정 : 닭코스요리 / 전남 해남군 해남읍 고산로 140 / 061-534-8844
장수통닭 : 닭코스요리 / 전남 해남군 해남읍 고산로 295 / 061-535-1003
진일관 : 해남한정식 / 전남 해남군 해남읍 명량로 3009 / 061-532-9932
2.숙소
백련재 : 전남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29-29 / 061-537-8686 / www.brj.kr
모아모텔 : 전남 해남군 해남읍 교육청길 54-8 / 061-536-9778 / 모아모텔.kr
태산모텔 : 전남 해남군 해남읍 고산로 184-13 / 061-535-4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