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유 - 오대산(2)
52. 호령봉에서 바라본 계방산
산에는 독특한 얼굴이 있다. 산은 바람과 추위에 오랜 세월 시달려왔다. 그러면서 산은 하늘 높이 우뚝 솟아있는데,
산의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다. (…) 산은 잘 변하며 변덕스럽다. 그리고 바람이 거셀 때 산은 더욱 아름답다. 처음에
산은 빛깔의 싸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바람이 구름을 하늘 높이 몰아붙일 때 구름은 첨봉에 부딪쳐 갈기갈기 찢기
거나 둥근 봉우리를 휘감고 거센 바람은 스스로 소멸한다. 바람은 밑의 골짜기에서 한 방향으로 불지만 높은 곳에서
는 서로 충돌한다. (…) 산은 미를 연출할 뿐만 아니라 그 전체가 미다.
―― 가스통 레뷔파(Gaston Rebuffat. 1921~1985), 「몽블랑과 히말라야 사이」(김영도, 『하늘과 땅 사이』)(2000)
▶ 산행일시 : 2023년 5월 1일(토), 맑음, 점심 때 잠깐 눈
▶ 산행인원 : 8명(더산, 킬문, 수영, 토요일, 동그라미, 칼바위, 오플, 악수)
▶ 산행코스 : 상원사주차장, 1,342m봉, 1,404m봉, 주릉, 1,533m봉, 호령봉, 감자밭등, 호령봉, 1,533m봉,
가래터골, 적멸보궁 입구, 상원사주차장
▶ 산행거리 : 도상거리 9.5km
▶ 산행시간 : 7시간 28분
▶ 갈 때 : 청량리역에서 KTX 열차 타고 진부역에 가서, 택시 타고 상원사주차장으로 감
▶ 올 때 : 상원사주차장 버스승강장에서 버스 타고 진부에 와서, 저녁 먹고 택시 타고 진부역에 와서 KTX 열차
타고 상봉역으로 옴
※ 사진은 찍은 순서대로 올린다.
53. 얼레지
54. 홀아비바람꽃
55. 호령봉, 응달에는 눈이 쌓였다
56. 홀아비바람꽃
얼레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얼레지 꽃말이 ‘바람난 여인’이라지요. 킬문 님의 얘기다. 등로 초입에는 시들었지만
우리가 봄을 앞지르거나 혹은 동행하는 터라 얼레지와 발맞춰 간다. 얼레지는 잎에 얼룩이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인디카, http://www.indica.or.kr/)’에서 화우 님의 ‘꽃 이야기’를 둘러보았다.
이재능의 『꽃들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 01』(신구문화사, 2014)에서 ‘세 얼굴의 여인 얼레지’라는 제목 아래 얼레지
를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얼레지는 하루에 세 번 모습이 변한다. 아침에는 다소곳이 꽃잎을 오므린 열여섯 소녀였다가 낮에는 꽃잎을 활짝
뒤로 열어젖힌 열정의 여인이 되고, 황혼 무렵에는 엘레지의 주인공처럼 슬픈 모습이 된다.” 엘레지는 영어로
Elegy, 그 뜻은 슬픈 노래 곧 비가(悲歌)이다.
얼레지는 봄볕이 따뜻해지면 꽃잎을 한껏 열어젖힌다. 그 모습은 치마가 활짝 들쳐진 마릴린 먼로의 요염이고, 치맛
자락을 쳐들고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캉캉의 무희다. 청순한 소녀가 이렇게 변신하는 데 30분이 걸리지 않는
다. 이런 모습에서 ‘바람난 여인’이라는 꽃말을 얻었다고 본다. 그런데 나는 치마가 아니라 삼단 머리카락을 한껏 뒤
로 젖힌 여인의 청순한 모습으로 여긴다.
어쨌든 꽃잎을 뒤로 젖히는 이유는 이른 봄에 피면 나비나 벌이 많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나 여기 있다’하고 위치
를 알려 주려고 함일 게다. 한편, 얼레지는 인고의 표상이기도 하다. 땅속에 터를 잡은 얼레지 씨앗은 첫 해에 떡잎
하나만 내민다고 한다. 해마다 조금 큰 잎을 내밀다가 5년이 되는 해에 두개의 잎을 내밀고 6년째 되어서야 두개의
잎을 내민 얼레지는 분홍색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고 한다(김정명, 『꽃의 신비』, 한국몬테소리출판, 2006).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얼레지는 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린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니 어디 얼레지 한
송이 꽃을 보고 납작 엎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63. 홀아비바람꽃
64. 홀아비바람꽃과 현호색
65. 홀아비바람꽃
68. 호령봉에서 조망, 호령봉에서 남진하는 한강기맥
69. 계방산, 오른쪽은 소계방산
70. 가운데는 문암산
71. 중간이 계방산으로 가는 한강기맥
72. 가운데는 문암산, 멀리 가운데는 응봉산
호령봉 오르기가 제법 멀다. 그 전위봉인 1,404.2m봉을 오른다. 응달진 곳에는 눈이 쌓여 있다. 어젯밤에 내리던 비
가 이곳에는 눈으로 내렸다. 시원하던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걷지 않으면 춥다. 안부는 너른 화원이다. 홀아비바
람꽃이 비로소 얼굴을 드러낸다. 홀아비바람꽃(Anemone koraiensis Nakai)도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특산식
물이다. 영어명은 코리언 아네모네(Korean anemone), 일본명은 히메이치린소우(ヒメイチリンソウ), 작고 귀여
운 한 송이 꽃이고, 중국명은 차오셴인롄화(朝鮮银莲花), 조선 은련화이다. 꽃말은 비밀스런 사랑, 덧없는 사랑,
사랑의 괴로움이다.
오대산 주릉 1,533m봉은 긴 오르막이다. 꽃길 원로는 계속된다. 생사면을 누빌 필요가 없이 그냥 잘난 길만 가도
된다. 오늘 칼바위 님이 나를 살린다. 목이 아프고(코로나 19는 아니다) 컨디션이 여간 좋지 않아 발걸음이 더디니
일보삼배하는 내 발걸음과 얼추 보조가 맞다. 주릉에는 곳곳에 제법 눈이 쌓였다. 바람이 차다. 미세먼지가 심하다.
비로소 하늘이 트여 둘러본다. 설악산을 알아보지 못하겠다. 호령봉 직전 안부로 내려가 점심자리 잡는다.
산상화원이다. 갑자기 날이 어둑해지더니 싸락눈이 내린다. 싸락눈이 그치니 다시 맑다. 산정에서 이런 정취라니.
앳된 당귀순, 곰취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삼겹살을 싸서 먹는 맛이 일미다. 셰프 동그라미 님이 굽기가 바쁘다. 탁주
는 싱겁고 30도 모과주가 향긋하거니와 적당하다. 후식은 라면이다. 웃고 떠들고 또 웃고 1시간이 금방이다. 오오시
마 료오끼치(大島亮吉, 1899~1927)는 “산에 가면 밥이 많이 먹힌다. 햇빛과 바람이 맛있기에.”라고 했다. 맞는 말
이다. 내가 한 마디 덧붙이면, 산정(山情)에 겨워 술이 취하지를 않는다.
73. 홀아비바람꽃
74. 꿩의바람꽃과 현호색
75. 홀아비바람꽃, 감자밭등 주변에서
77. 큰괭이밥
79. 꿩의바람꽃
80. 얼레지
작년 이맘때 킬문 님이 감자밭등에서 노랑너도바람꽃을 보았다기에 오늘도 있지 않을까 보러간다. 호령봉에서 서쪽
으로 길게 내렸다가 약간 오른 평원이 감자밭등이다. 거기로 가기가 쉽지 않다. 미역줄나무덩굴 숲과 잡목이 울창하
여 한참을 더듬어야 한다. 료오끼치가 『山, 硏究와 隨想』에서 말했던 그런 길이다. “능선 가운데 고약한 곳에서는
산양이 다니고 사람이 걷는 길이 하나가 된다. 고약한 덤불 속에서는 곰이 지나간 길과 사람이 뚫고 나가는 길이 같다.”
너른 평원이 나온다. 오대산에 이런 평원이, 아니 이런 화원이 있는 줄 내 여태 몰랐다. 홀아비바람꽃이 바람이 한들
거린다. 박새는 무리지어 머지않아 이 평원을 장악할 기세다. 노랑너도바람꽃은 찾지 못하겠다. 이 많은 풀꽃 중
노란색이 없다. 그렇지만 쓰러져 이끼 낀 고목 뒤에서 다소곳이 고개 숙인 큰괭이밥을 알아본다. 반갑다. 다들 떠났
는데 늦잠을 잤는지 혼자만 남았다. 영락없이 이외수가 읊은 「풀꽃」이다.
그대
먼 전생
시간의 강을 건너고 건너
첩첩산중 외진 길섶
깨알같이 작은 풀꽃으로
피어 계신다고
제가
못 알아볼 줄 아셨습니까.
83. 홀아비바람꽃
84. 얼레지
86. 꿩의바람꽃
87. 새끼노루귀
88. 오대산괭이눈
92. 흰제비꽃, 부러진 고목에 피었다
다시 호령봉을 오른다. 방금 내린 길을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 헤매다 고약한 덤불숲을 냅다 뚫고 오른다. 더산 님과
동그라미 님은 산을 더 가야겠다고 남릉 연봉을 넘어 영감사 쪽으로 갔다. 우리는 온 길 뒤돌아간다. 고은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 꽃’을 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어느덧 황혼이 가까웠다. 얼레지들은 고개 숙였다. 역광으로 바라보는 얼레지가 엘레지의 주인공처럼 슬픈 모습이
다. 혹은 밀레의 ‘만종(晩鐘)’을 닮았다. 너른 들녘 저편에 석양이 물들어 가고, 밭일을 마친 농부 부부가 고개 숙여
기도하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주춤주춤 내린다. 1,404.2m봉 직전 안부다. 직진하여 1,341.9m봉을 넘다가 서대암 신도나 스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를 숨겨주기커녕 국공에 이를 것이 뻔하다. 왼쪽 골로 간다.
인적 드문 약간 사나운 길이다. 그럴수록 내게는 풀꽃들이 반기니 좋기만 하다. 가래터골이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계곡에는 와폭이 낭랑한 소리 내며 흐르고, 그 주변 어둑한 돌 틈에는 괭이눈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들이 오대
산에서 자생하니 오대산괭이눈(Chrysosplenium alternifolium var. sibiricum Ser. ex DC.)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 등재된 11종의 괭이눈에는 오대산괭이눈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다만 산괭이
눈을 설명하면서 ‘털괭이눈 또는 오대산괭이눈과 비슷하여 혼돈되기도 한다.’고 덧붙이고 있을 뿐이다.
적멸보궁, 중대사자암 갈림길에 들고 참배객을 흉내한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는
산행이었다. 발걸음은 가볍고 배낭은 묵직하다. 오늘 만난 풀꽃들을 가득 담았으므로 그렇다. 다시 그 산길을 가고
싶다. 이근배 시인의 ‘꽃’이 그립다.
내 손금 여울처럼
흘러간 사랑 자국
눈물의 끝 빈 벌판에
피 삭이며 따라가면
상현달 가슴에 띄워
울먹이는 반개화
93. 오대산괭이눈
96. 피나물, 상원사 아래 사면에서
98. 홀아비바람꽃
101. 나도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