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서명희 선생님을 추모하며, 스파인2000 창립 25주년을 맞이하여
저희 스파인2000이 설립된 지도 어느덧 25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그 길 위에서 함께 해 주셨던 많은 분들을 떠올립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고, 제 젊은 시절 마음 깊이 의지했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故 서명희 선생님이십니다.
창립 초기의 스파인2000은 그저 아주 작고 조용한 봉사 모임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날, 고양시에 위치한 한 장애인 기관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그곳 원장님께서 “우리 아이들 독감 예방접종 좀 시켜주세요. 아이들이 한 번도 독감 주사를 맞아 본 적이 없어요.” 하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32살이었고 젊은 혈기로 독감 예방접종 사업을 시작하긴 했지만, 마음 한켠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의사도, 간호사도 아는 이가 없었고, 백신은 어디서 구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저는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그대로였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하라면 아마 못 할 겁니다.
그렇게 인터넷 게시판에 “장애아동들을 위한 독감 예방접종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했고,
답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한 어르신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안양에 서명희 선생님이라고 계신데, 전화해 보세요. 아마 도와주실 겁니다.”
그 전화를 통해 서명희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종로구 ‘라파엘의 집’에서 처음 선생님을 뵈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독감 예방접종 봉사를 함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의 여자친구가 고려대병원 간호사였는데, 두 분이 함께 그 일을 도맡아 주셨던 기억입니다. (23년전 사진인데 제가 참 젊습니다.)
그 후로 수년간, 가을이면 어김없이 장애아동 기관들을 돌며 수백 명 아이들에게 백신을 놔 주셨습니다.
매년 수백 개씩 백신을 지원해 주시면서도, 늘 말씀하셨습니다.
“저한테 고마워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고마워하세요.”
그 미소 띤 말씀과 따뜻한 눈빛이 아직도 선하게 기억납니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늘 하던 대로 전화를 드려 “선생님, 올해도 도와주실 거죠?” 여쭈었더니
선생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왕 회장, 올해는 내가 못 도와주겠어.”
순간 마음 한켠이 섭섭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혹시 건강이 안 좋으신 건 아닐까 걱정되어 수소문해보니, 선생님께서 위암으로 투병 중이시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표현은 하지 않더라도 마음 깊이 의지하고 있는 분이 한 분쯤은 있지 않나요?
저에게는 서명희 선생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제가 오늘날까지 힘내서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또한, 선생님의 따뜻한 뒷받침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알게 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선생님의 조카이신, 우리 스파인2000의 여상화 선임이사님입니다.
또한 탈북청소년학교인 샛넷학교와의 인연도, “샛넷학교를 도와주라”는 선생님의 유언 덕분에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을 찍은 얼마 후, 선생님은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지금도 그곳에서 선생님께서 저희 스파인2000을 위해 기도해 주시며, 함께하고 계실 거라고요.
그 후 선생님의 뒤를 이어 지금까지도 스파인2000에서 꾸준히 활동해 주시는 의료진 선생님들이 계십니다.
정재진 선생님, 김일회 선생님, 김미정 선생님, 노순이 선생님 등 귀한 분들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큰 도움을 받고 있답니다.
서명희 선생님은 주말에도 쉬지 않고 교회에서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서 의료봉사를 하셨습니다.
언젠가 봉사현장을 찾아 뵙고 진료하시며 뛰어 다니시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선생님 힘들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에 "재미있으니까 하는거야, 재미없으면 못 해."하시던 그 모습이 어제인듯 합니다.
언젠가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동안 참 수고 많았어"하며 등을 두들겨 주실 것 같습니다.
어느덧 저도 어느덧 초로의 뒤안길입니다.
물가는 끝없이 오르고, 사람들도 예전같지 않고, 사업 하기가 녹록지 않습니다.
선생님,
많이 보고 싶습니다.
스파인2000의 왕태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