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달, 5월
5월 들어 눈물 흘릴 일이 많았다. 글쓰기를 계기로 진한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슬픔을 시작으로 5월이 상징하는 가정의 달, 스승의 날, 99세 막내 이모님을 찾아뵈었던 일 등으로 감사와 은혜를 생각하면서 속으로도 겉으로도 많이 울었다. 눈물의 많고 적음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심리학에서 통상적으로 우뇌는 감정이나 이미지를, 좌뇌는 언어적 논리적 이성을 지배한다고 하던데 눈물이 많은 사람은 우뇌가 좀 더 발달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우뇌가 좌뇌보다 더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인가. 눈물샘을 자극하는 일이 더 잦아지는 것 같다.
갈헌 이동근 박사는 화랑대 동기 동창생 (同期 同窓生)으로서 첫 인연을 맺었지만, 친구로서의 진한 우정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2014년 글쓰기 모임 소호회(笑豪會)를 결성한 때부터였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정통적으로 국문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획득하였고 풍부한 학식과 훌륭한 인격을 갖춘 동기생으로서 여러 사람의 모범이 되었으며 인생 후반기 나의 롤모델로서 흠모(欽慕)의 대상이었다. 같은 또래의 나이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명철한 눈과 가족을 챙기는 따뜻한 감정을 가진 면에서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미 그때 그는 60여 평생을 살아오면서 정립한 인생철학을 말끔하게 정리한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수필집을 제작하여 자손들에게 진솔한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였다. 그는 동년배이지만 나의 멘토로서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10여 년간 문우회를 이끌면서 나에게 많은 도움과 감동을 선사했던 그가 안타깝게 다시는 볼 수 없는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비보(悲報)를 접했던 날, 나는 사무실 한쪽 구석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였다. 당장 그가 누운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이튿날 빈소가 마련된 경찰병원에 도착하여 그의 마지막 가는 영정사진(影幀寫眞)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오열했다. 특히 그의 사랑하는 아내 박노준 여사를 만나 손을 잡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을 쏟아버리고 말았다. 위로와 격려를 해야 했을 내가 오히려 눈물을 보이는 바람에 위로를 받았다고나 할까. 한참 동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벌써 우리 곁을 떠나기엔 이른 나이가 아닌가. 안타깝고 아까웠다. 친구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5월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상기(想起)하게 하는 달이다. 9살 때 여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으며 54년을 내 곁에서 지켜봐 주시면서 함께 하셨던 어머니의 사랑을 지금, 이 순간에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매년 똑같은 5월을 맞이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늘 새로운 것 같아 눈물을 자아내곤 한다. 요즘 아이들은 잘 부르는 것 같지 않은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노래와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중략)… 낳으시고 키우시는 어머님 은혜∼”와 같은 노래를 입 속에서 흥얼거릴 때가 많다. 나이와 무관하게 누구나 자기를 낳아 길러주신 어버이에 대한 사랑은 모두 같은 감정일 것이다. 5월 달력을 맞이하는 동안 계속 그럴 것이다.
부모님의 형제는 부모님과 같다는 말이 있다. 아버님은 독자셨으니 나에겐 백부나 숙부는 계시지 않았지만, 어머니 형제는 많아 이모님들과 외숙부가 계셨다. 그러나 그들도 이젠 모두 별세하셨고 딱 한 분 막내 이모님이 현재 살아계신다. 그동안 현재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 99세인 막내 이모님을 찾아뵙지 못하다가 얼마 전 대구를 방문하여 만나 뵈었다. 높은 연세인지라 스스로 옥체를 다스리지 못하여 어느 요양병원에서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연명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수년 전 찾아뵈었을 때만 해도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껴안아 주셨는데, 이번엔 침대에 누워 산소호흡기를 코에 꽂은 채로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모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느낄 뿐이었다. 이모님을 뵐 때마다 어머니 생각에 잠기곤 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이런저런 핑계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점이 너무 죄송스러웠다. 지난 2년간 외국에 있으면서 근황도 제대로 알지 못해 궁금하였던 차에 이번에 뵈었지만,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만 이모님을 위해 도와주시는 간호사와 간병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말씀을 나누어 보진 못했지만, 이모님과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또 언제 뵐지 알 수 없는 기약을 하고 나왔다. 한없는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스승은 어버이와 같다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배웠다. 옛날부터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말라고 배웠으며 스승의 회초리는 우리를 사람답게 만든다고 배웠다.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이유도 어버이 못지않게 우리를 길러주시고 교육하여 올바른 길로 유도한 데 대한 고마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학창 시절의 선생님을 한 번도 찾아뵙지 않은 나의 어리석음이다. 초, 중 고등학교 시절 나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선생님 몇 분이 기억에 남아 있지만, 나는 그 고마운 은혜를 제대로 보답해 드리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할 때 주례를 맡아주셨던 중학교 담임선생님마저 나는 그 은혜와 감사에 보답하지 못한 송구스러움을 늘 마음 한구석에 안고 살았다. 이제 그저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고 눈물을 흘릴 뿐이다. 그러나 첫 문장에서 소개한 故 이동근 박사는 생전에 그의 스승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꼭 이맘때나 연말연시엔 학창 시절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비단 학교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스승이 될 만한 선배님을 잊지 않고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그런 선행을 실천에 옮겼던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반성하였다.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다.
이래저래 5월은 반을 눈물로 보낸 것 같다. 그러나 그 눈물은 감동이 있는 것이기에 매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평생 살면서 딱 3번만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고전적인 얘기가 있지만, 나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내 인생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적 판단 못지않게 감성적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나온 이론인 ‘감성경영’도 인간관계를 매우 중시한 경영 이론이다. 물질 만능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의 감정은 메말라가고 있다. 오로지 이성적 판단으로만 세상사를 잣대질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성이 살아있는 인문학 정신이 아닐까. 부모님을 그저 키워주는 사람으로, 스승을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어른을 귀찮은 존재로만 여기는 시대가 되어가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어느 가수가 노래했던가. 눈물을 흘려야 할 땐 실컷 흘리자. 5월은 어찌 보면 눈물의 씨앗의 달이 아닐는지. 나만 그런가….
(2024. 5. 21)
첫댓글 나도 갈헌에 대해서는 월몽과 공감합
니다. 갈헌은 진솔하고 이타행을 하
는 큰삶을 사셨고 나역시 갈헌의
이타행을 롤모델로 삼고있습니다
갈헌의 육체는 우리곁을 떠났지
만 문우회를 사랑하는 갈헌의
영혼은 우리와 함께 할겁니다
나도 갈헌을 보내고 많이 우울
하였고 31문우회를 사랑했던
갈헌마음을 생각하기도 했
습니다.
갈헌은 올초 의정부에 거주하는
김태선씨 칠순 회고록 단행본
초안도 꼼꼼히 교정을 해준
친절도 보였고 함께 칠순행사
에 축하해주었는데~
갈헌의 빈 자리가 너무 큽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 갈피를 잡기 힘듭니다.
갈헌이 순우~하며 나를 부르던 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것만 같네요. 갈헌이 아직도 이승을 떠난 사람아라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네요.
근데 월몽 마음이 마음이 많이 약해진 듯하네요. 인생만사 모든 것들 너무 애끓어하지 마세요. 그렇게 흘러가는게 인생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