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具常과 江
“오늘 마주하는 이 강은 어제의 그 강이 아니다/ 내일 맞이할 이 강은 오늘의 이 강이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 강과 새 사람을 만나면서 옛 강과 옛사람을 만나는 착각을 한다“ 구상(具常) 시인의 ‘그리스도 폴의 江’이라는 연작(連作) 시 중의 하나다.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처럼 띄워 보내는 이 그리움과 영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고 이뤄질 것이다/ 저 망망한 바다 한복판 일런지, 저 허허한 하늘 속일는지 다시 이 지구로 돌아와 설는지 그 신령한 조화 속이사 알 바 없으나/ 생명의 영원한 동산 속의 불변하는 한 모습이 되어/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처럼 띄워 보내는 이 그리움과 영원은/ 그 어느 때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고 이루어질 것이다“ 이 또한 구상 시인의 ‘그리스도 폴의 江’이라는 연작시 중의 하나다.
이 두 개의 시(詩)는 둥글고 큰 화강암에 새겨져 ‘구상 문학관’의 뜰에 우뚝 서 있어 방문하는 이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2024년 6월 1일 나 역시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시인(詩人) 구상(具常) 문학관(文學館)을 찾았다. 지난 3월부터 이곳에 머무르면서 실천하고 있는 이 지방 문화와 역사 탐방 중의 한 코스였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데서 불과 차량으로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라 쉽게 닿을 수 있었다. 세상 살기가 너무 편리해진 탓에 궁금한 게 있으면 스마트폰 검색창에 ‘왜관 가볼 만한 곳’을 치면 좌르르 정보가 쏟아지는 덕분이다. 다음 주에는 나는 이곳을 떠날 예정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은 곳을 검색한 결과다.
‘구상 문학관’은 시인 구상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위치는 대구로 이어지는 67번 국도의 왜관읍 관할 행정소재지에 있다. 그 국도는 낙동강 물길과 방향을 같이 한다. 이곳에 구상 문학관을 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릴 때부터 천주교 신부가 되길 원했던 그는 1919년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구상준(具常浚)이었으며 구상(具常)은 필명이다. 어릴 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부친을 따라 함남 원산 근처 문천군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베네딕도 성당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1938년 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를 수료하고 1941년 일본으로 가서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한다. 1945년 해방 후 북쪽을 점령한 소련 공산군과 그의 괴뢰 정부인 김일성 공산 독재체제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기독교 박해로 이 수도원은 월남(越南)을 단행, 이후 정착한 곳이 바로 경북 왜관(倭館)이었다. 이때 대부분 성당 신자도 함께 왜관으로 이주하였으며 구상 시인은 그중의 한 명이었다. 특히 그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글쓰기로 이름나 있어 원산 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나 1946년 펴낸 시집 ‘응향(凝香)’ 필화사건(筆禍事件) -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로부터 반동(反動) 시인(詩人)으로 낙인찍힘 –에 연루되었던 점도 남하(南下)를 결심하게 한 요인이었다. 월남 후 그는 6.25 한국전쟁 시 국방부 대북 심리전 요원으로 ‘대북 특보’, ‘봉화’, ‘승리‘등에 참여하면서 종군작가로 활동했으며 1955년 금성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원 출생지는 서울이었으나 남하 후 정착지가 왜관의 현재 구상문학관이 자리 잡은 곳이었기에 이곳은 그의 고향이나 다름 없었다. 생을 마감하는 2004년까지 그는 낙동강을 벗 삼아 문학인의 활동을 멈추지 않아 시, 수필, 평론 등 분야에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심지어 영국, 프랑스, 스웨덴, 독일, 일본, 이태리 등 외국에까지 그의 명성은 잘 알려져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6.25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초토(焦土)의 시‘와 ’까마귀‘, ’구상 연작 시집‘, ’유치찬란‘ 등과 자선 시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와 ’구상 시 전집’ 등이 있다.
그가 월남하여 이곳에 안주했을 당시만 해도 경부고속도로와 67번 국도와 같은 교통 인프라가 없었기에 그가 살았던 조그만 기와집의 툇마루에 앉아있으면 낙동강이 저절로 눈 안에 들어왔다. 그가 낙동강을 좋아했던 이유는 어릴 때 살았던 함경도 원산 덕원 마을에 있는 적전강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늘 낙동강을 바라보며 기독교인으로서 시인으로서 ‘江’으로부터 영감을 얻기에 충분했던 게 아니었을까. 강을 단순히 자연의 풍광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인식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으며 그 결과, 위에 소개했던 65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폴의 江‘이라는 연작시가 탄생했다.
구상문학관은 2층 콘크리트 건물과 아담한 한 칸짜리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에는 그의 생애와 작품, 유물 등을 비치하여 방문자들이 앉아서 독서하며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채워졌으며, 아담하게 지은 단층 한옥은 생전에 사용했던 서실을 개축하여 당호(堂號)를 ’관수재(觀水齋)‘라고 붙였다. 그렇게 호명한 근거는 경남 진주의 서예가 은초(隱憔)로부터 받은 편액 ’관수세심(觀水洗心)‘에 있다. 매일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닦으라는 뜻에서 그는 아침저녁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어내곤 하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살기를 근 30여 년. 그의 사상적 문학적 기본 바탕은 자연히 기독교와 강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 폴은 성서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리스어로 구세주를 뜻하는 ’그리스도’와 데려가다 또는 운반하다 라는 뜻의 ’페로‘가 합쳐져 만든 이름이다. 그는 힘이 세어 사람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가난하였지만 노약자와 아이에겐 무료로 서비스했다. 어느 날, 한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너려는데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그 아이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는 것을 느끼고 힘 들어 하는 차에 그 아이가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고 있다. 나는 네가 찾던 이 세상의 창조주이며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하며 강을 건널 때 사용했던 막대기를 땅에 꽂아 보라고 하여 그대로 했더니 큰 종려나무가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그때부터 그는 강을 건너는 모든 이들의 수호성인이 되어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구상의 시는 철저한 기독교 사상과 ’江’이라고 하는 자연에서 출발한다. 성인이 강을 건너는 사람을 도우며 생계를 이루었듯이 구상도 강을 회심(回心)의 일터로 삼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그리스도 폴’처럼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강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녹아 있음을 간파하여 공간의 시간화와 영원성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고자 정진했다. 그것은 곧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生死不二)라는 불교적인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삶이 죽음으로 향하고, 죽음 또한 삶을 낳는다고 하는 영원회귀를 믿었다. 이런 사상은 아래에 소개하는 또 다른 연작 시의 한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저 물이었다 많은 물이었다 많은 물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면서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제자리에 있으면서 순간마다 새로웠다/ 새로우면서 과거와 이어져 있었다. 과거와 이어져 있으면서 미래와 이어져 있었다/ 과거와 미래가 이어져서 오직 현재 하나였다 오직 하나인 현재가 여러 가지 얼굴을 하였다/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서 여러 가지 소리를 내었다 여러 가지 소리를 내면서 모든 것에 무심하였다/ 무심하면서 괴로워하고 괴로워하면서 무심하고 무심하게 죽어가고 죽어가면서 되살아왔다“
그는 강(江)을 사랑했던 시인이었고 평생 구도자의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자“라는 유언에서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의 문학관을 찾아 그동안 강에 대해 품고 있었던 막연한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강을 보아 왔지만, 그 강이 과연 나에게 무엇인지 제대로 답을 얻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지난해 1년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바라보았던 다뉴브강, 40여 년 전에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허드슨강, 영국 런던의 템즈강, 프랑스 파리의 센강, 독일의 라인강, 이집트 카이로의 나일강, 중국의 양쯔강 그리고 내 인생의 반 이상을 서울의 한강을 보며 살았지만 ”나에게 과연 ‘강’은 무엇을 뜻하는지“ 내 마음에 와닿지 못하고 그저 막연하게 ‘도도히‘ ’유유히‘라는 단어 몇 자 밖에는 표현할 줄 모르는 바보였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낙동강 길섶에 자리 잡은 구상 시인의 와당(瓦堂)에 걸려있는 편액 ’관수세심(觀水洗心)‘의 자세로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어 좋았다. 그는 산(山)보다 강(江)을 좋아한 걸 보아 인자요산(仁者樂山)보다 지자요산(知者樂山)에 더 가까운 시인이었던 것 같다.
세계의 어디, 한국의 어딜 가더라도 그곳에는 그곳만이 간직하고 있는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고 있다. 나는 그곳이 갖고 있는 숨은 이야기를 찾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24. 6월)
첫댓글 월몽의 호연지기의 삶이 아름답습니
다. 나도 종종 한강변을 걷는데 우리
는 날마다 새로운 강과 새로운 사람
을 만나다라는 시어를 상기할까 합
니다.
네네 건강하시길♡
월몽 덕에 시인 구상에 대해 많은 걸 알고 배웁니다. 곧 떠나신다고? 부디 건강하시고 유럽에서처럼 보람되게 지내세요.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 김양이란 가수가 불렀고, 한일 노래대결에서 우타고코로 리에라는 일본 가수가 부른《흐르는 강물처럼(川の流れのように)》이란 노래가 떠오르네요.
구상이 원산에서 살다가 탈북을 했군요. 원산이 고향인 화가 대향 이중섭이 월남해 예술인으로서 살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당시 때때로 이중섭을 지극히 아아끼며 도움의 손길을 주었던 연유가 짐작됩니다. 언론인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연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했던 구상의 문학 세계를 찾아 왜관 발길 한번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