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쌓고 채우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비움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이국남 시인의 脫稿 詩選集 『비움의 행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시선집은 역사의 무게와 시대의 아픔, 그리고 개인의 추억과 일상의 풍경을 동시에 담아낸다. 세월호의 상처 같은 사회적 기억에서부터, 어머니의 김밥 같은 소박한 사랑의 기억, 강원의 산천에 깃든 자연의 숨결까지 시인은 모두를 자신의 언어로 불러낸다.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비움으로써 더 충만해진다”는 삶의 지혜다. 그의 시(詩)는 무겁고 진지하지만, 동시에 따뜻하고 친근하다. 거대한 민족사의 장면에서부터 한 그루 꽃, 한 끼의 도시락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모든 순간 속에서 삶의 진실을 길어 올린다. 독자는 시를 읽으며 자연스레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지금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아야 할지를 묻게 된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 책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작가소개>
시인 이국남
춘천에서 태어나 본고장에서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한양대 건축과 및 강원대 경영대학원과 중앙대 건설대학원 등을 졸업하고, 다년간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던 중 2006년 8월 문학마을 신인상으로 등단, 강원문학협회 춘천문협에 소속하여 이사직 활동은 물론, 동인회 삼악시회장, 수향시낭송회장 등등 지역 문학에 기여한 바 춘천예술공로상 및 춘천문학상 심사위원장 등 문력을 키워왔다. 저서로는 시집 「시각의 전환」, 「진주조개와 춘천 크로키」, 수필집 「밍크코트」 등이 있다.
<이 책의 목차>
제1부. 무엇이 우리를 붙잡는가
백두의 안개
요하에서 울던 벌
무엇이 우리를 붙잡는가
카키색 성지
소인국 (1)
소인국 (2)
소인국 (4)
트라우마
유토피아
평창이란 준마
반도여 고하노니
독도여
땅굴도 자신이 싫다
염원의 외침
동갑내기의 죽음
미군기지
관통
무궁화 콜로세움
이산의 아픔
불행한 역사 속 굴레
제2부. 시계 속을 걷다
샤갈
고호의 화필 속에 숨어
추상화
재즈
캣츠
색스폰
빛 일던 등대
레일 바이크
한옥자랑
장독대
해우소
창문
시간이란 손님
시계 속을 걷다
바둑 (1)
바둑 (2)
서랍
진달래
호박꽃
해바라기
마네킹 아가씨
누에 집에 잠들다
이 가을
제3부. 지성의 요람
그리움이 사는 곳
싱거운 달님
아침 명상
아름다운 세상
지성의 요람
서울횡단
봄 그리기
가을을 줍다
하오의 정사
에스프레소 마시기
기차가 그리워요
여름밤의 랩소디
창밖의 소리들
유배지
무념이 저지른 생각
종각 앞에서
라스베가스
바라나시의 새벽 강
태양의 나라
위대한 무지의 성
제4부. 비움의 행로
개똥철학
시인의 길목
생각의 문
시인의 모습
바코드
여름밤 메시지
사막에 가고 싶네
타협된 불면
서녘 놀
어느새
통로
낙수
일상의 그늘
친구의 인사
한계
비움의 행로
사시(斜視)
하늘 문
혼절의 계절
어머니의 김밥
노모의 캔버스
보릿고개
제5부. 강원별곡
대청봉 그 정상
대포항 단상
오대산에 묻은 사념
치악산 전설을 줍다
다시 한번 그 감격
땅굴 탐방기
태백산 민족 성전
소양강에 역사를 심다
그 이름 금강산
경포대 달밤
옛 정라진 단상
장릉 그곳은
정선 오일장
용궁의 길목
오색약수 권하기
철원 주상절리 탐방기
<詩 ‘당신의 빛’ 전문>
언젠가부터 나는
무기력한 무계로도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당신의 괘도 속에
내 정신 묶이고
떠돌이 행성처럼 헤매던
나의 길이 인도되고 있다
알 수 없는 무한 에너지
어디선가 남몰래
마냥 전이하고 있는 당신
당신의 은하계에
나는 한 점 작은 별 되어
멀리서 후덕하니 띄운 빛으로
뜨겁게, 뜨겁게 안주하고 있다
허허로운 창공에 나를 올리고
언제나 빛나게 하는 당신
주 예수 그리스도
<추천사>
이국남 脫稿 詩選集 『비움의 행로』는 삶을 오래 걸어온 한 사람이 언어로 남긴 깊은 숨결이자, 시(詩)라는 형식 속에 고요히 응집된 사유의 결정체다. 건축과 경영, 건설학을 두루 공부하고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던 그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등단하여, 문학과 지역 문화 활동에 헌신하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꾸어왔다. 이번 시선집은 그동안의 여정을 집약한 성숙의 기록으로, 시인이 말하는 ‘다듬기’의 시학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다.
시인의 말에서 그는 “거듭한 나이 버거워질수록 자기 다듬기가 절실히 필요할 즈음”이라고 고백한다. 젊은 날의 시가 감정의 울림에 이끌린 무작정의 기록이었다면, 이제 그의 시는 한 발 물러서서 뒷짐 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얻어낸 차분한 되새김이다. 시를 쓰는 일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자기 삶을 정리하고 가다듬는 행위이며, 그 과정을 통해 그는 또 다른 나르시스의 샘을 찾고자 한다. 그러한 태도 속에서 이번 시선집은 한 인간이 자기 생애를 마주하며 내린 성찰의 문학적 고백으로 빛난다.
이 시선집은 다섯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무엇이 우리를 붙잡는가」에서는 민족사의 상처와 현대사의 아픔이 펼쳐진다. ‘트라우마’는 세월호 참사의 비극을 직시하며, ‘독도여’와 ‘이산의 아픔’은 분단과 상실의 고통을 노래한다. 이 작품들 속에서 시인은 개인의 감정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오랜 역사적 기억을 오늘의 언어로 새겨낸다. 제2부 「시계 속을 걷다」에서는 예술과 일상, 그리고 시간을 소재로 한 시들이 이어진다. ‘샤갈’, ‘고호의 화필 속에 숨다’, ‘재즈’와 같은 작품들은 화가와 음악가들의 세계를 빌려 삶의 본질을 탐색하고, ‘시간이란 손님’, ‘서랍’ 같은 작품들은 시간과 기억의 불가해함을 되짚는다. 그 속에는 건축가 출신으로서 사물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독특한 시선이 배어있다.
제3부 「지성의 요람」에서는 일상 속의 성찰이 더욱 또렷하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그는 ‘한 발짝 물러서 바라보는 그림’을 통해 비로소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아침 명상’은 무질서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얻는 사유의 고요를 그려낸다. 이러한 작품들은 사소한 일상의 풍경을 통해 삶의 본질을 묻는 힘을 지닌다. 제4부 「비움의 행로」는 시선집의 중심이며 시인의 궁극적 메시지가 담긴 장이다. ‘바코드’에서 그는 사회 속에서 매겨진 정체성을 성찰하고, ‘개똥철학’에서는 공허한 언어의 허망함을 풍자한다. 표제작 ‘비움의 행로’에서 시인은 ‘쌀 한입 동전 하나 챙겨 훌훌 떠나시네’라는 구절로, 삶의 끝자락에서 모든 집착을 던져버리고 나아가는 존재의 길을 노래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남은 한과 미련을 내려놓음으로써 얻는 자유와 평화의 순간이다. 마지막 제5부의 「강원별곡」은 고향 강원의 산천과 그 역사적 기억을 노래한다. ‘대청봉 그 정상’, ‘태백산 민족 성전’, ‘소양강에 역사를 심다’ 등은 자연과 전설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을 넘어, 민족적 정체성과 영성을 되새기는 장으로 확장된다. 고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시대와 민족의 기억이 축적된 원천이며, 시인의 뿌리이자 그가 시를 통해 끊임없이 돌아가는 자리다.
이국남의 시는 크게 두 갈래의 결을 동시에 지닌다. 하나는 역사와 공동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웅대한 울림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서정이다. 그는 거대한 담론과 평범한 기억을 함께 끌어안으며, 시를 통해 삶의 전모를 그려낸다. 언어는 장식적이지 않고 담백하며, 때로는 직설적이다. 그러나 그 담백한 표현 안에는 오랜 사유와 무게가 담겨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울림을 느끼게 한다. 이 시선집이 전하는 핵심은 결국 ‘비움’이다. 시인은 삶과 역사, 일상의 번잡함을 껴안은 뒤에야 비로소 내려놓음의 의미를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짊어진 무게를 정화하고 자유로 나아가는 지혜다.
(이국남 지음 / 보민출판사 펴냄 / 160쪽 / 변형판형(135*210mm), 양장본 / 값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