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이라,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선(禪)이란 불지심(佛之心)이요, 교(敎)는 불지언(佛之言)이며, 계(戒)는 불지행(佛之行)이라.”하셨나니, 선(禪)은 범어(梵語) 선나(禪那)의 약칭으로서 당언(唐言)에 정려(靜慮)라 하여 고요한 마음이라고도 풀이하며,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고도 풀이 하나니 우리의 본래 온전한 심경을 이름이니라.
그러나 선은 좌선이 선의 기초가 되어 표준이 되나 앉아서만 선을 하는 것은 대승선(大乘禪)이 되지 못하는지라 동정간(動靜間)에 할 수 있는 선이라야 진선(眞禪)이니, 우리는 시간과 처소를 가리지 말고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선을 수행하자는 것이니라. 환언하면 시간을 따로 정하여 부동심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無時)로 동정간(動靜間) 천만 경계를 응용할 때 그 일 그 일의 처사에 일심이 되고 계 정 혜를 아울러 닦고 보면 그 사람은 비록 직업생활을 하면서도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 가나 오나 앉으나 누우나 선 공부를 하는 사람이 되나니, 어떠한 처지나 경우라 할지라도 무엇을 하려니까 공부를 못한다는 핑계가 없을 것이니라. 무처선(無處禪)이라 함은 우주 곳곳을 선방(禪房)으로 삼으라는 뜻이니 집안에 있으면 집이 선방이요, 들에 나가면 들이 선방이며, 회사에 나가면 회사가 선방이요, 시장에 가면 시장이 선방이며, 변소에 가면 변소가 선방임을 자각하는 등 도처마다 내가 현재 처해 있는 곳이 선을 수련하는 도량(道場)이라는 관념을 가지라는 것이니라.
무시선(無時禪)이라 함은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행주좌와(行住坐臥) 24시간에 항상 선의 심경을 가지고 매매사사(每每事事)를 원만히 처리하는 것이니, 기침시(起寢時)에는 기침하는데 일심이 되고, 식사시에는 식사하는데 일심이 되며, 담화시에는 담화하는데 일심이 되고, 행보하는 때에는 행보하는데 일심이 되며, 살림하는 때에는 살림하는데 일심, 사무를 볼 때에는 사무 보는데 일심, 놀 때에는 노는 것에 일심, 야단을 칠 때는 야단치는데 일심, 잠을 잘 때에는 잠자는데 일심 등 일체 만사를 작용하여 나아갈 때에 한 때라도 원만무결한 선의 심경을 놓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이 곧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이니라. 사람은 반드시 항상 일심불란(一心不亂)의 부동심과 부동행이 있어야 하며, 철주(鐵住)의 중심과 부동여태산(不動如泰山)의 선적생활(禪的生活)이 아니면 도저히 고귀한 인격과 완전한 그릇을 이루지 못할지라, 그래서 옛날 방거사(龐居士)의 선에 대한 음시를 살펴보면, “일념심청정(一念心淸淨) 처처연화개(處處蓮花開) 일화일정토(一華一淨土) 일토일여래(一土一如來). 한 생각 그 마음이 청정하면 곳곳에 연꽃이 피나니, 한 꽃이 한 정토요 한 정토가 한 여래니라”
우리 보통 사람들은 참으로 선(禪)할 경계를 당하면 선(禪)을 하지 않고 도리어 고(苦)를 짓고 공부를 아니하며, 그 선(禪) 공부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나니,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고 일체 경계와 일체 난경(難境)과 일체 역경, 일체 순경(順境)이 선(禪) 공부를 촉진시키는 기회로 알아서 공부의 기회를 잃지 말고 용맹정진 할지니라.
ㅡby 전재만 posted 한울안신문 Nov 15, 2001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