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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생명, 풍성한 생명
고린도후서 4:13-5: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8주일이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간다. 이번 주 토요일에 색동가족 이름으로 단양에 단풍구경을 간다. 마치 고향을 방문하는 기분이다. 가을풍경은 모든 한국인들에게 고향과 같다.
지난 목요일 밤에 아주 둥근 보름달이 떴다. 보았는가? 문득 길을 걷다가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뉴스에서 올해 가장 둥글고 커다란 달이라고 했다.
예로부터 가을이면 보름달 같은 둥근 박이 우리나라 가을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어렸을 적에 아직 초가집이 많이 있었다. 으레 고향이란 시에는 초가집과 둥근 박 그리고 어머니가 등장한다.
초가 지붕 위에 가을이면 둥근 박이 열렸다. 박이 열리려면 박꽃이 피어야 한다. 그런데 박꽃은 밤에만 피고, 아침이면 누렇게 시든다. 그래서 초저녁잠이 많은 사람은 꽃을 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렇게 밤에만 꽃이 피면 누가 수정을 해 주고, 어떻게 박이 열릴까? 그 이유는 박꽃에게 수정을 시켜주는 천생연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곤충을 ‘박각시나방’이라고 부른다. 박꽃과 박가시나방은 천생연분이다.
플라스틱이 없던 시절에 박은 바가지로 요긴하게 쓰였다. 바가지로 쓰려면 단단하고 야무진 박이 필요하였다. 그런 박이 열리려면 씨앗이 든 박속을 처마 밑에 매달아 한겨울을 견뎌야 한다고 한다. 추위와 비바람을 견뎌낸 씨앗은 아주 단단한 바가지를 만들 수 있는 돌박을 만든다.
추위와 비바람을 함께 견딘 씨앗은 단단한 인생을 만든다. 여러분의 인생은 단단한가?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려면 더욱 든든히 자신의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1)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온전한 생명 풍성한 생명’이다. 누구나 단단한 생명을 소망한다. 생명은 내게 주어진 단 하나 밖에 없는 기회 아닌가?
사람들의 경험에 따르면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한다. 비정상적인 것이 너무 많아졌다. 쉽게 병들고, 상하고, 사고를 겪는 위험한 세상이다. 흔히 사람의 몸이든, 기업이든, 공동체든 30년 단위로 워크아웃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쉽게 무너지고, 멀쩡한 회사도 갑자기 흔들릴 수 있다. 워크아웃은 개인이든 기업이든 회생작업, 구조조정을 의미한다. 그래야 건강이 지속될 수 있다.
성경은 위기를 겪는 사람을 향해 워크아웃을 권면한다. 욕심을 내려놓으라, 희망을 가져라. 당장 어려움을 겪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니,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라! 심지어 죽음의 문제까지 극복할 풍성한 생명을 소망하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대단한 낙관주의자이다. 즉 희망의 교사였다. 그는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16)라고 말한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겉사람과 속사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땅의 장막과 하늘의 장막을 대비하면서 말한다. 성경은 인간의 고난이 문제와 이를 극복하는 믿음에 대해 큰 관심을 갖는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0, 12).
바울은 본문에서 왜 인간의 삶은 평안하고, 안락하지 않은가를 묻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한다. 성경은 인간을 향해 누구나 연약한 질그릇과 같음을 일깨워 준다. 사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옹기 항아리와 같이 깨어지기 쉬운 존재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
그럼에도 바울은 깨어지기 쉬운, 보잘 것 없는 질그릇 같은 인간을 향해 격려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8-9).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그 능력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
가까이에 옹기를 수집하는 분이 있어서 이야기를 들었다. 가장 값싸고 서민적인 그릇인 옹기는 쉽게 이가 나가고, 손잡이가 떨어지고, 깨지기 쉬워 사람들이 별로 값어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옹기그릇은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쉽게 버리고, 다시 바꾸고, 부수기 때문에 오래 보존된 옹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현실 때문에 청자와 백자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따지지만, 옹기는 4-50년 만 되면 그만큼 골동품적인 가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 역설이다.
바울은 비록 버림받기 쉬운 존재인 옹기지만, 그 안에 보배가 담겨있다고 말한다. 그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보배를 담은 옹기는 결코 버림받지 않는 법이다. 바울은 참 보배야말로 내 몸에 간직된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생명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
나는 한때 김준태 시인의 시를 암송한 적이 있다. 그중에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를 참 좋아하였다. 이 시는 고린도후서 4장의 질그릇 비유와 통한다.
아주 젊은 시절, 한동안 식사 전에 김준태 시를 마치 주기도문 암송하듯 한 번씩 크게 낭독한 후 밥을 먹기도 했다. 중간 한 대목을 소개한다면 이렇다.
..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구멍이 뚫리거나 쭈그러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그것은 깊은 바다 속의 물고기처럼/ 지느러미 하나라도 잃지 않고/ 이 세상 구석구석을 살아가며/ 때로는 파아란 불꽃을 퉁긴다/
오늘 슬퍼하지 말라/ 오늘 절망하지 말라/ 오늘 좌절하지 말라/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주룩주록 슬퍼하는 자는/ 벼락을 맞아 죽으리라/ 하늘과 땅을 보면서도/ 절망하는 자는, 좌절하는 자는/ 악마와 돼지가 돼버리리라/ 오오, 이 세상은/ 아이에게 젖을 빨리는/ 어머니와 산봉우리로 가득하고/ 밭고랑에 씨앗을 놓는/ 아버지와 봄비와 하느님으로 가득하다..
겉은 언젠가는 낡아지고 부서진다. 그러나 겉만 있지 않고 속이 존재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외적 본성과 내적 본성이 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겉사람과 속사람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
이것은 육체의 노화라는 겉과 영적인 영원함이란 속을 단순히 대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경험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잊혀지고, 반복되고 여전히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영원하고, 풍부하고, 큰 영광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연약한 겉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겉의 모습이 있다면, 속의 모습도 있는 법이다.
2)
바울은 더 나아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대비시킨다. 보이는 것은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시련과 아픔이 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다. 눈앞의 현상, 현실에 매여 있지 않는다. 그것은 잠간 새에 변화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 그것은 믿음의 관심사이다. 사실 우리는 보이는 현상에만 충실할 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까지 희망을 두고 살기가 쉽지 않다.
마를로 모간이 쓴 <무탄트>는 호주 원주민이 문명인 곧 무탄트를 향해 보내는 메시지이다. 문명인이라고 우쭐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지혜이야기다. 이렇게 충고한다.
“평생을 사는 동안에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영원한 본질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데 우리가 실제로 소비하는 시간은 너무나 적다.”
성경은 말한다. 겉사람만 고집한다면 그 순간 너머의 풍성한 생명을 지닐 수 없다. 예수님은 재물만 모으는데 몰두하는 어느 부자를 향해 진정한 속사람의 부요함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신다.
눈앞에 보이는 것에 속지 말라. 당장 보이지 않으나 영원한 소유를 얻기 위해 살라. 풍성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현상이 아닌 원초적인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내 눈앞의 위기와 현실은 어느새 지나갈 것이다. 위기도, 슬픔도, 두려움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말라.
그리스도로 충만한, 그리스도로 부요한 삶은 당장 눈에 띄지 않고 감추어져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속사람이다. 그런 진정한 부요함을 지니기를 바란다.
3)
여러분은 어떤 준비를 하고 사시는가? 누구나 최소한 보험은 몇 개씩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년과 죽음은 모두에게 찾아온다. 그때와 장소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예약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무도 죽음에 관한 한 연습도, 경험도,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다. 홀로 가는 길이고, 그 다음에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 누군들 당당할 수 있을까? 무엇이라고 위로해야 할까?
우리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인 십자가는 바로 죽음의 도구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빼놓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십자가는 희망을 말할 때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창세기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하신다. 우리는 죽을 때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죽음을 옷을 벗어 버리는 것, 벌거벗음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죽음은 옷을 덧입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죽음은 지워버려야 할 인생의 잔해가 아니라, 그 비참 위에 은총의 옷을 덧입히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없어지고, 무의미해지고,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땅의 육신이 하늘의 몸을 입는 것이다. 육신의 장막이 하늘의 장막으로 감싸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1).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믿음의 삶이다. 만일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한다면 그의 삶은 지금부터 부활의 능력으로 나날이 새롭게 창조되는 삶을 살 것이라는 약속이다.
온전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풍성한 삶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목숨을 걸고 희망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한 생명, 풍성한 생명이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생명, 풍성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다.
어제 코로나 시절 한동안 색동교회 2층에 머물러 지냈던 분이 찾아왔다. 여러분이 함께 염려했던 그 사람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어찌 지내는가 궁금했지만, 둘이 만나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아마 여러분도 공감할 것이다.
다행히 아주 밝은 모습이었다. 서울에서 사는데, 1시간 40분 걸려서 온 목적이 있었다. 잔뜩 긴장하였다. 뜻밖에도 나를 찾아온 목적이 3년 전 여름에 자신의 분노에 대해 사과하러 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혔다면서, 사과하는 마음으로 비타500 한 상자를 무겁게 들고 왔다.
오랜만의 만남에서도 평소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질문을 들을 줄 알았는데, 고마운 일이다. 교회에 그의 안부와 사과의 심정을 전하기로 했다. 내가 비타 500을 나누어주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참 “하드하다”고 했다. “목사님은 고난을 받으면 어떻게 하세요”라고도 물었다. 그리고 바로 떠났다. 나는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여러분이 맡긴 얼마 간의 돈을 깨끗한 봉투에 담아 전달하였다. 홀가분했다.
그를 위해 기도한 후 헤어졌다. 하나님께서 길잃은 모든 인생마다 안성맞춤의 피난처를 허락해 주시길 빈다.
바울은 말한다. 비록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연약함 속에도 믿음의 보배를 간직하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온전한 생명을 고민하라!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 가운데, 불완전한 우리 세상 가운데, 예수 십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은 온전하고,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기를 바란다.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위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