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나님 앞에서
사무엘하 23:1-7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인 ‘영원한 주일’이다. 벌써 하나님의 달력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이다. 영원한 주일을 ‘그리스도 왕 주일’이라고도 부른다.
지난 일 년 동안 대림절 첫째 주일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고 창조절을 지키며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교회는 절기를 시작할 때마다 강단색을 바꾸었고, 성찬식을 베풀었으며, 새로운 날들을 축하하고 기념하였다.
교회력은 해마다 한 바퀴를 순환한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늘 ‘영원한 주일’에서 다음 주 ‘대림절 첫째 주일’ 사이는 일 년의 끝과 시작이 서로 맞물려있는 ‘끄트머리’ 주간이다. 끄트머리는 ‘끝이며, 동시에 시작’이다. 앞으로 나는 교회력을 몇 바퀴나 돌 수 있을지 자신의 인생을 셈해 보라.
오늘 강단 장식은 등불과 조개껍데기이다. 등불은 인생을 비추는 희망이고, 조개껍데기는 인간의 순례를 상징한다.
‘등불과 조개껍데기’는 인생이 걸어가는 길을 밝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생은 한마디로 순례이다. 그 순례길 어느 지점에서 내 걸음은 정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 인생을 순례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믿음으로 산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이 ‘끄트머리’ 시기인 대림절 첫 주간에 우리 교회는 ‘등불기도회’를 연다. 어둠이 점점 깊어가는 계절에 등불을 밝히고, 겨울 추위가 임박한 시절에 불씨를 나누려는 기회가 될 것이다.
1)
오늘 본문은 다윗의 유언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마지막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다.
다윗의 유언은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5)는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그가 평생 의지한 믿는 구석이 엿보인다. 그의 믿는 구석이 아닌, 믿는 중심은 무엇인가?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1).
유언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지한 말이다. 지금 죽어가는 사람이 말하므로 결코 흘려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말은 수정이 불가능하다.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두 번의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주의 깊게 경청하고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살아있는 나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어떤 말로 내 삶의 종지부를 찍을까? 내 묘비에는 어떤 짧은 글귀를 남길까?
라틴어 격언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의 상징물 중에 해골이 종종 등장한다. 러시아정교회의 이중십자가에는 반드시 맨 아래 아담의 해골이 존재한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는 십자가 위의 삼위일체를 그린 마사초의 벽화가 있다. 그 아래 길게 해골 상이 누워있는데 그 벽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나도 당신과 같은 모습이었고, 당신 또한 나처럼 이렇게 될 것이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스스로 자랑하는 무용담이 아니다. 남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자기 자랑도 아니다. 내가 결코 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고백하는 하나님 이야기이다.
그것은 죄인이 구원받은 이야기이고, 버림받은 자, 잊혀진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랑고백이다.
2)
이제 죽음이 임박한 다윗은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고백한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2).
그는 시편의 절반을 지은 사람답게 유언도 매우 시적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노래잘하는 자로 평생 하나님의 운율과 박자와 흥겨움으로 살았다. 초대 교회 교부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충만하게 살아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다윗의 유언은 자신이 왕으로서 통치에 대해 먼저 요약한다.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3-4).
한마디로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를 지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았다. 평생 하나님을 존중하며 그 분의 뜻을 기억하며 살았다.
다윗의 삶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생각하고, 사랑했고, 이름을 불렀으며, 기도하였다. 사무엘서를 보면, 수많은 다윗의 시편을 보면 다윗의 생애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바로 다윗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다윗은 마지막 말을 하면서 짧은 순간, 자신을 회고하였을 것이다. 돌아보니 자신의 인생이 순간처럼 지나갔다. 인생은 돌아보면 너무나 짧게 요약될 수밖에 없다. 다윗 역시 부질없는 시간이 많았다. 후회스러운 때도 많았다. 지워버리고 싶은 인생의 그림자는 얼마나 많았는가!
다윗의 인생은 균형 잡힌 삶이 못되었다. 목동으로 살던 어린 무명 시절부터, 골리앗과 싸움으로 갑자기 이름이 알려졌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사울 왕의 질투를 사서 쫒겨 다니고,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맞이하고, 피난처를 전전하며 숨고,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을 하고, 비굴하게 적의 수하에서 꼬리를 감추어야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서 절정에 올랐을 때 치명적인 범죄를 저질렀고 그 대가로 인생은 내리막으로 치달았다. 아무 공로 없이 용서받고, 자격이 없었지만 왕위를 회복하고, 만년의 삶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다윗은 위기를 많이 겪었기 때문에 더 다급히, 더 간절히, 더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았고, 은혜를 경험하였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친밀하였고, 인격적이셨다.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계신 분이셨다. 그리고 그를 만나주시고, 또 결단을 요구하시던 분이셨다.
다윗의 삶은 온통 하나님으로 젖어 있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삶의 기초를 세우는 반석과 같은 분이셨고,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반석과 같은 분이셨다. 다윗은 보이는 모든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았다. ‘나의 방패, 나의 바위, 나의 피난처’라고 부르듯 다윗은 평화로울 때와 위기의 순간 항상 하나님을 찾았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다윗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다윗의 노력 반, 하나님의 은혜 반의 삶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삶이었다.
3)
다윗의 유언의 절정은 여기 이 한 마디에 압축되어 있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5).
다윗은 유언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약속을 하시고 그 언약을 지키신 분이다. 만사에 부족한 것 없이 채우시고, 흔들릴 때 마다 견고히 붙잡아 주셨고, 모든 소원을 들어 주셨다. 이 말속에 그의 자부심과 넉넉함과 감사함이 잘 요약되어있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5).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생은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안다. 모든 시편의 서시인 시편 1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다윗은 자신의 후회에도 불구하고, 범죄에도 불구하고, 비뚤어진 판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과 인정해 주시는 은혜로 살았음을 고백한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은 선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남보다 큰 공로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진실한 ‘속 삶’ 때문이다.
다윗이 지은 시를 보라. 그는 즐거울 때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는 괴로울 때 하나님을 노래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범죄 한 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죽음의 고비고비 마다 하나님을 찾았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다윗은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의지하며 살았다. 지팡이를 통한 인도하심과 막대기를 통한 보호하심, 이것이 그의 최고의 신뢰요, 확신이었다. 어찌 하나님이 그를 내치실까?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이든, 악인이든 모두에게 임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삶을 기억하시고, 개입하신다.
다윗의 말에서 보듯, 의로운 자의 삶은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4)고, 사악한 자의 삶은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6)다고 한다.
행복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창한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그러나 악인의 삶은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공허하고, 버림받는다.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 1:4).
다윗의 유언은 우리를 향해 그러니 네 삶의 방식을 지금이라도 고치라고 한다. 인생을 살되 하나님의 공의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라고 권고한다. 네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는 든든한 반석이신 하나님이심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흔히 인생은 매 순간 선택하며 사는 일이라고 한다. ‘인생은 흔히 B와 D 사이’라는 말이 있다. ‘B’는 Birth(출생)이고, ‘D’는 Death(죽음)이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C들이 있다. ‘C’는 초이스(선택)이다. 늘 순간순간 선택적인 삶을 산다.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대답을 찾아보라.
이처럼 영원한 주일이 있는 주간은 죽음을 생각하는 기간이다.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추모한다. 그리고 지금 연로하신 부모님과 어르신들의 연약함과 외로움을 기억하며 가까이 살펴 드린다. 그 분들은 인생의 종말과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인생을 성찰하며 나 자신도 죽음 앞에서 결코 제외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 삶의 목적과 기쁨과 보람은 무엇인가? 내가 마지막에 남길 유언을 생각하라.
우리는 모두 순례자이다. 평생 정지된 삶을 사는 붙박이 인생은 없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순간순간 선택하고, 나날이 변화하고,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와 동행한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길이기에 등불을 의지한다. 그 등불은 영혼의 창이고, 지혜의 불꽃이며, 역사의 빛이다.
모든 인생 중에 그저 그런 무의미한 삶은 단 하나도 없다. 우리는 누구도 예외없이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 안에서 주를 의지하고, 희망을 두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지금 살아있음을 축하하라. 여러분의 인생을 축복하라. 오늘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마음에 은총의 등불이 켜있음을 감사하라. 다윗처럼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5)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라.
이처럼 ‘영원한 주일’은 내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친밀함을 느끼는 기회이다. 어두운 내 발 앞에 등불을 둔다. 내 길을 비추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 생각해 보라.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들 가운데 가장 첫날이다.’
여러분이 지금 어둠, 공허, 혼돈의 밤을 지나가고 있다면 먼저 하나님의 등불을 찾아라. 그리고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으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영원한 주일, 그리고 다가오는 대림절기.. 내 안에 등불을 켜는 일은 자신 뿐 아니라 남들이 나를 통해 빛을 느끼고 따듯함을 경험하도록 하는 아름다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축복하시고, 은혜 베푸시길 내 영혼의 등불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