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역이 재생산되려면. 중단되지 않게 하라 2 -메콩강소년-
5-1. 쑥짜이 목사의 고향 ‘미지나’ ‘파간’은 세계적으로 품질 좋은 ‘비취’가 나오는 곳이다. ‘카친족 독립 부대’가 긴 세월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다. 그들은 머리 좋은 쑥짜이 목사가 많이 배운 데다 외국인과 함께 일하는 기회를 활용했을 것이다. 그를 통해 보석을 외국에 팔아 투쟁 자금을 마련했을 것으로 나는 추측해 본다.
그는 보석을 먼저 보내고 보석값이 제때 오지 않자 선교부의 부동산을 은행에 담보로 잡혔던 것 같다. 그렇게 은행에서 강제 압류가 들어와 선교부가 쑥대밭이 되었는데도, 두 명의 선교사와 현지 리더 중 누구도 이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미망인 사모님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모든 선교부의 재산이 은행에 압류당하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는 남은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얼마든지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총대를 메려는 사람이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사람은 폐건물을 빌려 신학교 사역과 선교사 비자 쿼터를 가지고 나가고, 한 사람은 방송국을, 한 사람은 출판사를 가지고 독립했다. 개척된 교회들은 도움을 주겠다는 다른 선교단체를 찾아갔다. 힘을 모으면 더 안정적인 해결책을 찾을 것 같은데, 제각각인 게 안타까웠다.
2010년 미국 본부에서 이 선교부를 다시 살려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몽족’ 출신 N을 대표로 선임했다. N은 ‘동남아선교부’가 기른 인재 중 한 명으로 미국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고 태국에 돌아와 자립하기 위해서 한의학을 다시 공부 중이라고 했다. 미국 선교본부에서는 N을 중심으로 ‘동남아선교부’의 선교사 비자 쿼터를 활용해 사역들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하루는 N이 사무간사와 국제변호사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를 처음 보았다. 자기가 한의학 공부를 마치고 태국에 상주할 때까지 몇 년간 나더러 ‘동남아선교부’를 맡아달라고 했다. 미국 본부에서 그동안 ‘동남아선교부’ 비자를 사용하는 외국 선교사들의 자료를 검토한 결과 내가 적합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변호사가 위임장을 내밀며 허락 사인을 부탁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순종하겠다고 했다. 막상 책임을 맡고 보니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넘어야 할 벽들도 많았다. 미국 선교사에게서 자란 현지 리더들의 믿음과 생각이 우리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선교비의 씀씀이도 비교되지 않았다.
미국 본부의 도움으로 치앙마이 외곽에 1만 평 정도의 땅을 사고 사무실과 아이들을 양육할 건물을 완공했다. 선교부 사무실이 새롭게 오픈되고 아이들도 북적이고, 이곳저곳 흩어진 교회와 CBI 동문도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신학교는 다른 미국 선교단체가 하는 신학교와 통합했다. 그러나 방송국과 함께 행정과 재정관리는 ‘동남아선교부’로 일원화했다. 나에게 맡겨진 임무는 선교사 비자와 모든 행정 서류에 사인권을 가지고 감독하는 정도이고 현장 사역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순탄하게 회복해 가던 동남아선교 공동체가 2016년, 또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이번에는 내분이었다(*이 내용은 나중에 자세하게 나눌 기회가 오길 바란다). 직접 담당하는 선교사가 없는 곳에 매월 선교비가 빠지지 않고 오다 보니 그로 인해 현지 리더들 안에 갈등이 생겼다. 돈 관리를 서로 하겠다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도 군중심리에 휘둘려 감정싸움을 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신학교와 방송국의 제정을 독립시키고, 문제가 된 사역의 선교비는 중단해 버렸다. 선교비가 중단되니 현지인들의 싸움도 멈췄다. 자기를 희생하지 않은 리더들의 이기가 자기들을 위한 선한 도움마저 끊어지게 했다.
교단이나 선교단체의 가장 큰 구조 악은 성도들의 헌금을 자리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선교사에게 물질적으로 기대하던 자들은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 자기들이 공간을 가지고 있으면 후원이 이어질 줄 알고, 고집을 부리며 독립하겠다고 나간 사역 지에는 풀만 무성해졌다.
목사로, 선교사로 살면서 고독하고 마음 아픈 것은 악이 강해서가 아니고 선하고 거룩한 일에 무엇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거룩한 일을 원하면서도 정의와 공의를 기준으로 살려는 자를 경계한다는 것이다. 진실한 선교사에게는 말치레로 끝내고, 그의 가난과 고통에 대해 마음을 나누려 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와 선교의 구조 안에 있는 이런 악을 현지인들은 이기적으로 잘 이용하고 있었다.
이 싸움으로 선교사 비자쿼터 업무를 보는 사무실과 새롭게 시작한 몽족공동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 선교부와 현지인들은 내가 전권을 가지고 사무실 운영과 몽족공동체를 회복해 주길 바랐다. 나는 뜻하지 않게 동남아선교부 사역에 부름을 받았고, 원치 않았지만, 그 과도기 임무를 연장하게 됐다. 포기하지 않고 순종의 길을 묵묵히 가다 보니, 시간과 함께 하나둘 질서가 회복되고 사무실과 몽족 공동체도 맑아지고 튼튼해졌다.
5-2. 내가 풀어가야 할 문제는 현지인들의 갈등만이 아니었다. 미국 본부에서 모든 선교비를 전면 중단해 버린 배경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동남아선교부가 가지고 있는 15개 선교사 비자 쿼터를 빌려 사용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협력을 기대한 것이다. 나도 15명의 선교사가 힘을 합치면 선교부 사무실과 몽족공동체 하나 정도는 모범적으로 그 역사를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동남아선교부(SEACS)는 자기들의 선교사 비자를 해결해주기 위한 단체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노동 허가서에 적힌 동남아 선교부의 이름이 정부에 등록된 자기들의 단체이고, 여기를 통해 보고되는 사역이 정부에 등록된 사역이란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들의 사역이 이 단체의 이름 아래서 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복지법인이나 언어 학원을 찾아가 돈을 주고 비자를 구걸하면서도, 정식 선교사 비자를 가진 단체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는 없었다. 정부가 규정한 종교 비자 세를 내는 것에도 인색했다. 정부의 종교성에서 발행하는 종교 비자는 그냥 공짜로 해주는 줄로 알고 있는 듯하다. 우리만 해도 사무실과 사무실 집기, 관리비, 직원 월급, 우편료 등 운영 경비가 있는데 그 경비를 말하면, 어떤 선교사는 정선교사가 비자 장사를 한다며 악의적인 소문까지 퍼뜨린다.
태국 정부의 선교사 비자에 관한 규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태국에서 종교 비자는 받기 어렵다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새로운 선교사들의 귀와 눈을 가두었다. 오히려 바른 정보를 알려주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 와서 사역을 찾는 선교사들에게 동남아선교부의 사역 중 선교사의 도움이 절실한 곳들을 소개해도 별 관심이 없다. 동남아선교부가 50년 전, 처음 시작할 때보다 못한 환경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도 그 역사를 이어 가려고는 하지 않았다.
약 20년 가까이 그들의 종교 비자를 책임져주고 있지만, 한 번도 감사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선교사도 있다.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하기까지 한다. 그러려니 무관심하려고 하지만, 그 사람 됨됨이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첫댓글 감사해야하는 일에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온 부분이 많다는것을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