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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복을 주시는 하나님
시편 67:1-7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이다. 부활절 축하 인사를 나누자.
선창-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후창-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존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이다. 회심은 마음을 돌이켜 회개한 일을 말한다. 웨슬리의 회심은 내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존 웨슬리에게 그 자신의 오순절이었다.
존 웨슬리의 변화는 그의 생애는 물론, 교리와 제도 안에 갇혔던 교회를 향해 커다란 영적 각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 조지아 주에 서바나라는 도시가 있다. 그곳은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세워진 도시인데, 존 웨슬리가 인디안 선교를 위해 영국 성공회로부터 선교사로 파송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웨슬리가 회심하기 전의 일이다. 그는 미국 선교사역에 실패하였다. 치기 어린 연애 사건이 있었는데, 두고두고 그의 명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실패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 더욱 신앙적인 씨름을 하였고, 마침내 가슴이 뜨거워지는 회심의 체험을 하였다. 누구나 존 웨슬리처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신앙적 씨름을 해야 한다.
1)
본문인 시편은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에 대해서 말한다.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다.
그 복은 풍성한 생명의 복이고, 날마다 누리는 기쁨의 복이다. 사람에게 필수적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적인 복이요, 가정을 이루며 살 때 꼭 필요한 물질의 복이며, 나라 사이에도 없어서는 안 될 평화의 복이다.
하나님은 그런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시편 67편은 세 차례나 거듭거듭 강조한다. 여러분 모두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과 늘 동행하기를 바란다.
시편 67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1).
이 말씀은 제사장 아론의 축복문을 압축한 내용이다. 감사절기에 제사장이 축복하고, 백성이 응답하는 형식을 담고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먼저 영적이다. 하나님의 복은 물질과 비교할 수 없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다른 차원이다. 가장 복된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은 물론 민족들에게도 복을 주신다. 민족들을 공평하게 심판하시고, 다스리신다고 고백한다. 복을 받은 백성은 그 은총을 널리 증거 해야 한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4).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과 관련되었다. 물질적인 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송구스러운 일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는 땅의 소산물도 포함된다. 이 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누리게 될 은혜이다.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6).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이다. 유대인에게 최고의 교육방법은 묻고 대답하는 문답법이다.
너는 재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 땅이 최고죠./ 그런데 전쟁이 나면 땅을 짊어지고 도망을 갈 수 있을까?/ 아차! 그러면 금이 좋은 재산 아닐까요?/ 그래, 금도 좋겠지. 그런데 도중에 강도를 만나면 어떡하지?/ 빼앗겨 버리겠죠./ 그렇다면 금도 진정한 재산이 아니겠구나.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라...
아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 생각이 났어요. 복입니다. 부피도 없고 항상 품고 다닐 수 있잖아요./ 그렇구나...
복은 강도가 빼앗을 수도 없고 전쟁과 환난 날에도 안전하며, 다른 사람과 나눌 수도 있으니 복이야말로 진정한 재산이다.
영적인 복을 사모하는 사람은 땅의 복 또한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복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2)
복은 나를 향해 드신 하나님의 얼굴을 통해 맛볼 것이다. 아론의 축복문을 보라. 마틴 루터는 이 축복문을 교회의 축복으로 확정하여 실행하게 하였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아론의 축복문은 셋으로 나뉘는데, 모두 여호와가 주어이다. 하나님만이 복의 주체이시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임을 똑똑히 상기시키고 있다. 아론의 축복문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세 번 사용하고, ‘얼굴’을 두 번 표현한다.
자녀 된 이들을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평강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의 인격과 명예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두려움과 공포감으로 인식되어온 하나님이 복을 베푸시고, 얼굴을 마주하시는 분으로 선포된 것이다.
아론의 축복은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을 향해 선포하도록 위임되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권위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참 의미가 있다.
유대교 랍비들은 백성들에게 경고한다. “당신은 행여 이 초라한 제사장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 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에게 복을 주시는 자는 그 제사장이 아니라 그 제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복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누구든지 사람들은 복을 구한다. 나는 복이란 말을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한국인에게 복 이해는 다양하다. 오랫동안 한국인의 종교였던 샤머니즘이나, 불교와 유교의 전통에 따르면 복은 운명론적이다. 사람들은 잘되는 일과, 잘못되는 일을 모두 복과 연관시켰다. 그래서 복을 대부분 재수, 무병, 횡재, 축재로 이해하고 있다. 복을 남과 비교하고, 또 운이 좋네, 나쁘네 따지는 이유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결코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은 절대적이다. 히브리어로 ‘아쉬레’인데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뜻이고, 헬라어로 ‘마카리오스’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복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려주신다. 복은 하나님의 친밀하심과 평화로움으로 가득하다. 복을 자기 욕망의 실현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이미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얼굴은 자비와 은혜로 가득하다.
3)
신앙은 복의 절대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들의 기록이다. 성경에서 이상적인 인간은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시 1편). 아브라함은 떠도는 나그네였지만, ‘복의 근원’으로서 부르심을 받았다(창 12장). 율법은 과거의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의해 결정되었듯이 앞으로 다가올 역사 역시 하나님의 축복이나 저주에 의해서 결정될 것임을 일러준다(신 28장).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다. 복은 사람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생명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바로 하나님만이 당신의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절대성을 지니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하였다. 존 웨슬리에게 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한 자각’이다. 그의 묘비명에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고 새겨져 있다.
불신자는 아무리 성공하고 번영하여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인은 실패하고 또 죽음이 닥쳐올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행복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 가운데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과 친밀감 속에서 사랑과 신앙이 움트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고백이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한다.
그런 까닭에 여성 신학자 레티 럿셀은 “신앙교육은 삶을 경축하는 행위를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향해 ‘참 좋구나!’(창 1:31)라고 말씀하셨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을 배우는 일이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인간의 주요 목표는... 하나님을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enjoy God forever)라고 하였다. 우리 교회의 달력 모든 날들마다 축일을 두는 배경이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이상적인 인간형은 ‘복 있는 사람’이다. 그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얼굴로 나를 비추고, 그 얼굴을 나를 향해 드신다는 믿음을 소유한다. 이러한 믿음이 나를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집집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날을 기념하였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가정의 행복이다. 우선 가정이 행복하면 행복하다. 환경과 조건 이전에 자녀들이 행복하면 행복하다. 남과 비교할 것도 없이 아내와 남편이 행복하면 행복하다. 부모님이 행복하면 행복하다.
행복은 멀리 날아가는 파랑새가 아니라 바로 여기 있는 나다. 내가 행복 지킴이고, 행복 나눔이가 되면 우리 가정은 행복하다. 그리고 이 모든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행복하려면, 내 자녀를 끝없이 축복하고 기도하라. 찬양하며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라. 세상과 만민을 향해 쉼 없이 평화를 빌라
우리 세상에서 가장 큰 이슈는 언제나 가정이다. 누구나 가족의 위기를 겪는다. 집이 중요하지만, 재산보다 그 집의 구성원인 가정이 더 중요하고, 가정을 이루는 식구들의 낱낱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가족은 인생의 동반자로서 위기를 극복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늘 가정을 통해 힘을 얻고, 사랑을 견고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사람은 누구나 그동안 품에 의지해 살아왔다. 어른은 품이 되는 존재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너른 품을 지녀야 한다. 그런 너른 품으로 복을 나누고,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품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이다. 미국 연합감리교회는 ‘웨슬리 식으로 살아가기’ 곧 따라하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세 가지 아주 단순한 모토를 정하였다. 이것이 ‘세 가지 생활 수칙’(Three Simple Rules)이다.
‘첫째, 해를 끼치지 말라(Do No Harm). 둘째, 선을 행하라(Do Good). 셋째, 하나님과 함께 사랑 안에 거하라(Stay in Love with God).’
내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라. 이름을 부르라. 인도하심을 구하라.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라.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하라. 긍휼히 여겨주시는 마음,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라.
얼마나 중요한 인생의 원리요, 원칙인가? 한국에서 활동하는 찬양사역자 스카렛 브레더는 침례교인인데 우리를 향해 이렇게 충고한 바있다. “감리교인은 형식적인 원칙주의자가 아니다. 규칙쟁이가 아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방법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애초에 ‘메토디스트’란 이름은 고지식한 경건적 태도 때문에 조롱받던 별명 ‘규칙쟁이’였지만, 그 이름 덕분에 자랑스러운 명함으로서 명예를 누렸다. 사실 감리교회만큼 신앙과 인간에 대해 관용과 사랑이 넘치고, 사회 및 역사와 소통하는 신학과 전통을 지닌 이만한 그리스도교 교파를 찾기는 쉽지 않다.
도그마에 갇혀있는 보수적 신앙에 비해 한결 자유롭고, 공동체적이며, 믿음과 행함에 있어서 진보적이다. 우리는 우리 신앙고백에 대한 자부심, 교회 전통에 대한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존 웨슬리의 유언과 같은 말씀이다.
“나는 이 땅에서 감리교회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감리교 정신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웨슬리는 능력 없는 형식적 종교만 남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교파의식을 넘어서, 하나님의 너른 품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그런 작은 복, 큰 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인생에 만복으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