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전씨
주말에 읽는 문중 그 뿌리를 찾아서
역사 속 걸출한 인물들 다수 포진
시조 전유(全侑), 고려 충숙왕때 관성군(管城君)에 봉(封)해 지고,
그의 아들 전숙(全淑)도, 관성군에 습봉(襲封)되어 지역 토착 세력 정착
'옥천'하면 실개천이 휘돌아가는 마을과 질화로를 끼고 옹기종기 돌려앉은 시골 풍경이 연상된다.
우리나라 대표 시인 정지용의 시 '향수' 때문이다. 시인의 향취 때문인지 지금도 옥천에 발길을 들어서면 푸근한 마음이 든다.
시인의 문학적 바탕을 이루고 있는 옥천은 자그마한 소도시지만, 임진란과 동학과 의병 등 우리나라 역사 속 크고 작은 사건 속에서 걸출한 인물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겨져 있다. 이렇게 옥천에서 배출된 인물 중에는 고려말부터 약 700여 년간 옥천에 터를 잡고 토박이로 살아온 옥천 전씨 문중 사람들도 빼 놓을 수 없다.
고려 충숙왕 때 전유가 옥천지역을 관할하는 관성군(옥천의 옛이름 관성)에 봉해지며 이거 한 문중은 후손들이 옥천을 본관으로 삼으며 뿌리내렸다.
전씨의 유래를 살펴보면 백제 온조왕 때 공을 세워 십제공신에 오른 전섭이 환성군에 봉해지며 도시조로 하고 있다.
이후 전섭의 손자 전반이 백제 다루왕 때 한나라에 들어갔다, 전반의 후손 전선이 대광공주를 모시고 돌아오면서 정선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정선을 본관으로 삼아 정선 전씨가 되었다고 한다.
정선 전씨로 뿌리내린 씨족들은 대성을 이루며 본관을 달리하게 되는데, 천안 전씨, 옥천 전씨, 용궁 전씨, 나주 전씨, 경주 전씨 등 많은 분파를 가져온다.
옥천 전씨의 세거지인 옥천은 신라 초기 고시산군이라 불리다 통일 이후 경덕왕때 관성군으로 명명됐다.
그후 1313년 고려 충선왕 때 옥주라 부르던 것을 태종 13년(1413) 옥천으로 개칭한 지명 유래를 갖고 있다. 이곳에 1300년경 전유가 지역을 다스리는 군수로 이거 해오며 전씨 문중은 옥천 본관을 기반으로 옥천 금암리와 학산리, 구일리를 중심으로 씨족들이 퍼져나간다.
옥천 전씨의 시조 전유가 지역 유지로 활동하며 터를 일군 옥천에서 아들 전숙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성군에 봉해짐으로써 토착 세력으로의 정착을 견고히 한다. 그리고 강원도 관찰사로 증예조판서였던 전팽령이 1500년경 금암리에 양신정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지역의 학문적 수준과 기량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문중과 관련된 유물을 살펴보면 세거지 금암리에는 옥천전씨 세거비와 전팽령의 '양신정'과 전식의 영정을 모신 '목담서원', 아버지 전팽령의 시묘살이 때 효행을 보여준 전엽의 '효자정', 전엽의 효에 감동한 호랑이가 우물을 만들어 줬다는 '호천정' 등이 남아있다. 학이 많이 날아든다고 하여 ‘학산’이란 이름을 지닌 학산리에는 시조 전유와 그의 아들 전광운, 전비 3인을 모신 '상덕사'가, 그리고 조헌과 의병을 일으킨 전승업의 '인봉정사'가 유구한 세월을 품고 조상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북열 옥천 전씨 종친회장은 "인봉 전승업 선조는 조헌과 의병을 일으키고, 금산서 의병 700명이 전사하자 700의총 무덤을 만드는 등 큰 공적을 남겼음에도 행적을 드러내지 않아 추모비 건립과 인물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라며 "옥천에 뿌리내린 선조는 후학양성은 물론 나라가 어려울 때 구국의 의지를 보여줬다."라고 들려줬다.
◆ 인물 & 인물
국가적 위기 순간마다 큰 힘 발휘
전승업 임진왜란 때 대승 거둬
충·효 가풍 후손들에 고스란히
고려말 군수로 옥천에 부임 받은 전유는 이곳에 뿌리내리며 옥천전씨의 시조가 된다. 전유에 이은 아들 전숙의 옥천군수(관성군) 부임은 문중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부제학을 전지와 판서를 지낸 전숙은 고려 인물로 가문을 대표한다. 조선에서는 전희철과 전식이 행적이 두드러진다.
전희철은 조선 단종때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영주로 낙향한다. 그리고 단종이 영월에서 죽자 삼년상을 지냈으며, 임종 때 자손들에게 1년에 한 번씩 영월에 찾아가 단종릉에 참배하라고 유언할 정도로 마지막까지 왕에 대한 신의를 지킨다. 그 뒤 인조 때 그의 충을 기리기 위하여 방산서원 공주 숙모전에 배향된다.
전식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공을 세우고, 연원도 찰방이 되었다. 이후 광해군의 실정에 벼슬을 단념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예조정랑에 등용되어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간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인조때 문장가인 전명룡은 도학에도 뛰어나 후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전극항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이름을 떨쳤고 1624년 문과에 급제해 예조정랑에 올랐으나 병자호란 때 순절함으로써 가문을 빛냈다.
중종 19년(1524)에 정치무대에 나간 전팽령은 청백리로 1545년 벼슬에서 물러나 옥천 금암리에 양신정을 짓고 학문을 연구한다. 이는 지역에 학식을 보급하는 서원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전팽령의 낙향은 훗날 지역에 충과 효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전팽령이 죽자 그의 아들 전엽은 3년간 시묘살이로 효행을 옮겼다. 먼길을 걸어가 물을 길어 정성으로 상을 차리자 호랑이가 감복해 우물을 정해줬다고 전해지는 호천이 지금도 효를 증명하듯 샘물을 내고 있다.
청백과 효의 정신은 전엽의 아들 전승업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헌과 의병을 일으켜 청주전투성에서 대승을 거둔다. 전승의 기쁨도 잠시, 금산서 조헌과 의병이 몰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장터로 달려가 의병의 시신 700구와 승병의 시신 300구를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고 제를 지냈다.
이 무덤이 바로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이다. 3대에 걸친 행적만으로도 옥천 전씨 문중의 역할은 국가가 위기에 처한 순간 더 큰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가문의 맥을 잇고 있는 현대 인물로는 전건하 전 청주시의장, 전상하 전 언론인, 전안원 전 유성구의장·서예가, 전원석 홰싸움놀이보존회장, 전북열 전 죽림초교장, 전면하 사업가, 전태익 시인, 전재영 충북총친회 총무, 15대 종갓집 장손으로 옥천의 뿌리를 지키고 있는 전재구씨가 있다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에 있는 목담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 전팽령과 전식, 전유를 배향하고 있다.
충청타임즈
연숙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