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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안토니 프랑소와 프레보의 소설 <마농 레스코와 기사 데 그뤼의 이야기>
대본 여러 사람(6명으로 추정)에 의해 대본화되었는데 최종적으로는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자코자.
초연 1893년 2월 1일 토리노 레지오 극장
배경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아미앵(1막), 파리(2막), 르 아브르(3막), 미국 뉴올리언스 부근(4막)
<2018 리세우 대극장 / 132분 / 한글자막>
리세우 대극장 오케스트라 & 합창단 연주 / 엠마뉴엘 비욤 지휘 / 다비데 리베르모레 연출
마농 레스코................10대 후반의 아가씨...............류드밀라 모나스티르스카(소프라노)
레스코.........................마농의 오빠. 친위대 중사.....데이비드 비지치(바리톤)
레나토 데 그뤼............기사......................................그레고리 쿤데(테너)
제론테 드 라부아르.....재무대신. 나이 많은 부자.....카를로스 쇼송(베이스)
에드몬도.....................학생......................................미켈디 아트샤란다바소(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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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푸치니, 오페라 <마농 레스코>, 2018년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 실황
늙은 데 그뤼가 회상하는 형태로 더 없이 아름답게 연출된 푸치니의 출세작
푸치니의 세 번째 오페라이자 출세작이 <마농 레스코>(1893)다. 9년 전 먼저 초연된 마스네의 프랑스 오페라 <마농>과 차별점을 두고자 대본에 무리가 생겼지만 푸치니는 전혀 다른 이탈리아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오페라의 원작인 아베 프레보의 <기사 데 그뤼와 마농 레스코 이야기>(1731)는 작가가 비극적으로 요절한 옛 사랑 마농을 회상하는 소설이다. 다비데 리베르모레는 이에 착안해 이제 늙어버린 데 그뤼가 과거로 시간여행 하듯 연출했는데, 무대와 전반적 분위기가 꿈꾸듯 아름답다.
미국 테너 그레고리 컨드(데 그뤼)는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2016년 인터내셔널 오페라 어워즈 남성가수상 수상자다운 관록을 뽐냈고, 우크라이나 소프라노 류드밀라 모나스티르스카는 멋진 스핀토 음색으로 마농에게 드리운 어두운 정서를 잘 표현했다.
18세기 프랑스 작가 아베 프레보(1697~1763)는 신학 공부를 하려다 군인이 되었고, 방탕한 삶을 살다가 뒤늦게 다시 수도사의 길을 간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다. 수도원에 머물던 30대 초반에 쓴 <어느 귀인의 회상록>은 8권짜리 연작인데, 그중 일곱 번째가 <기사 데 그뤼와 마농 레스코 이야기>다. 19세기 낭만주의 연애소설을 예고한 선구적 걸작이요, '팜 파탈 문학'의 원조에 해당하는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
마농의 부모는 남자들의 손길로부터 타고난 미모의 딸을 보호하고자 결혼 전까지 수녀원에서 지내도록 결정한다. 하지만 수녀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러 남성의 관심을 사고, 마농은 귀족이지만 아직 학생 신분인 데 그뤼와 도피행각을 벌인다. 하지만 호사스런 삶을 동경한 마농은 이내 그런 생활에 싫증을 내고, 오빠 레스코의 도움으로 역마차에서 관심을 보였던 부유한 고관대작의 애첩이 되어 상류층 생활을 즐긴다. 하지만 다시 첫사랑을 잊지 못해 데 그뤼를 찾는다. 결국 마농은 매춘부란 죄목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 미국까지 쫓아간 데 그뤼는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지만 거친 황무지에서 탈진한 마농은 짧은 삶을 마친다.
같은 원작에 의한 두 편의 오페라 중 9년 먼저 나온 마스네의 <마농>은 상대적으로 프레보의 원작에 충실하고 프랑스 음악답게 감각적이다. 하지만 르 아브르 항구에서 마농이 죽는 피날레는 원작과 전혀 다르다. 반면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은 이탈리아 오페라답게 두 주인공의 노래가 더 직선적이다. 마스네와 중복을 피해 원작에서 다소 벗어났지만 마농이 황야에서 죽음을 맞는 피날레는 원작에 가깝다.
데그뤼 역의 미국 테너 그레고리 컨드(1954-)는 고음에 능한 로시니 전문 레제로 테너로 명성을 얻었지만 나이가 들고 목소리가 무거워지면서 베르디와 푸치니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제 고령임에도 성악적 테크닉은 최고라는 존경을 받는 테너다.
=== 작품 해설 === <다음 클래식 백과 / 최진영 글>
마농 레스코
지아코모 푸치니(1858~1924)
푸치니는 약 3년에 걸쳐 〈마농 레스코〉를 작곡하여, 1893년 토리노 왕립 극장에서 이루어진 초연에서 ‘베르디를 계승할 이탈리아 작곡가’라는 평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푸치니는 이탈리아는 물론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다.
푸치니를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만든 작품
쥘 마스네(Jules Massenet)는 푸치니보다 약 10년 먼저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Antoine François Prévost)의 소설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 이야기》의 원작을 소재로 하여 〈마농〉(1884)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했고, 이 작품은 파리 초연 이후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같은 소재로 오페라에 도전한 푸치니는 모든 노력을 쏟아 부었고, 1890년부터 약 3년의 기간을 걸쳐 작곡하여, 1893년 토리노 왕립 극장에서 이루어진 초연에서 ‘베르디를 계승할 이탈리아 작곡가’라는 평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푸치니는 이탈리아는 물론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다.
여섯 명의 손을 거친 대본
1890년 푸치니는 이 작품의 오페라화를 위해서 리코르디 출판사의 사장과 의논을 하였는데, 사장은 대본 집필자로 당시 무명이었던 청년 레온카발로(그는 훗날 베리스모 오페라 〈팔리아치〉(1892)를 작곡한다.)를 추전 하였는데, 이들의 협력 작업은 도중에 결렬되었고, 푸치니는 당시 베리스모 작가로 좋은 평을 얻고 있던 마르코 프라가(Marco Praga, 1862~1929)에게 대본 집필을 부탁하였으며, 프라가는 친구 도메니코 올리바(Domenico Oliva)의 도움으로 대본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푸치니가 작곡에 착수한 뒤 계속해서 대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수정을 요청하다 이 둘과도 작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푸치니의 음악적 재능을 굳게 믿고 지속적으로 대본가들과의 싸움에서 조율을 계속했던 리코르디가 당시 이미 작가로서 독보적이었던 주세페 지아코사를 소개해 주었고, 지아코사와 함께 작업을 했던 루이지 일리카까지 이 두 문필가는 이후 푸치니가 써낼 대작들의 대본 작업을 하게 된다. 이후 수정 보완 작업에서 가곡 작가인 토스티의 도움도 있었기에, 대본은 총 여섯 명의 손을 거친 셈이 되었다. 리코르디는 이후 이 작품을 출판할 때 문제의 소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 대본가의 이름을 아예 기재하지 않았다.
푸치니풍의 마농
푸치니 오페라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은 원작과 매우 다른데, 특히 마농을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상과 유사하게 바꾸어 놓았다. 사실 프레보의 소설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데 그리외가 주인공으로, 그가 사랑과 쾌락 등을 경험하며 성장해가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푸치니의 오페라에서는 데 그리외를 망가뜨리는 여인, ‘마농’이 주인공이다. 게다가 사치와 향락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 인물을 관객이 동정할 수밖에 없는 인물로 바꾸어 놓았다. 소설에서 마농은 향락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쁜 짓을 하지만, 오페라에는 마치 철이 없어 저지른 ‘한 번의 실수’로 치부되는 모습이다. 푸치니는 등장인물의 성격만 바꾸었을 뿐 아니라 앞서 선공한 마스네의 오페라 〈마농〉을 의식하여 같은 장면을 되도록 피하여 작곡하였는데 그러다보니 원작의 절반 이상이 다를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극적인 의미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푸치니풍의 새로운 마농
1막의 배경은 아미앵의 어느 여관 앞 광장이다. 마차가 도착하여 중사 레스코와 그의 여동생 마농이 내리고, 사람들이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는 가운데 데 그리외는 그녀에게 반해버린다. 마차에서 그들과 만난 늙은 부호 제론트는 마농에게 환심을 사려하고 있다. 데 그리외와 마농은 서로 소개를 나누는데, 마농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수녀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사치와 허영이 심한 그녀를 걱정한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데 그리외는 당신 같은 여성이 수녀원에 가면 안 된다며 저녁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진다. 에드몬도를 비롯한 학생들은 사랑에 빠진 데 그리외를 놀린다.
하지만 곧 에드몬도는 제론트가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마농을 납치하기 위한 마차를 준비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데 그리외와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납치를 막기 위한 작전을 세운다. 그때 데 그리외와 약속을 한 마농이 2층의 객실에서 내려오고, 마농과 데 그리외는 제론트가 준비한 마차를 훔쳐 타고 파리로 달아난다. 제론트가 나타나 마농을 찾지만 에드몬도는 그녀가 떠났다고 말하고, 뒤쫓으려는 제론트를 말리며 레스코는 파리로 가서 천천히 찾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들 뒤에 있는 학생들의 비웃음과 함께 막이 내린다.
2막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있는데, 데 그리외와 함께 파리로 왔던 마농이 곧 헤어지고 제론트의 애첩이 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가난을 참지 못한 마농이 데 그리외를 떠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보러 온 레스코에게 마농은 자신이 사랑을 잃어버려 외롭다고 노래하고, 레스코는 마농에게 데 그리외의 소식을 전한다. 마농은 그리움에 젖어, 그를 버린 과거를 후회하지만, 이내 제론트의 비위를 맞춘다. 이에 제론트는 만족해하며 나간다. 혼자 있는 마농 앞에 나타난 데 그리외는 원망을 퍼붓고, 마농은 뉘우치며 데 그리외에게 매달려 애원을 하다가 결국 뜨겁게 포옹을 하고 침대 위에서 사랑을 불태운다.
그런데 제론트가 나타나 이 광경을 보게 되고, 마농은 ‘당신은 너무 늙었다’며 모독한다. 제론트는 분노한 채로 이별을 고하고 나가고, 마농은 자유의 몸이 된 것에 기뻐한다. 함께 떠나자고 권하는 데 그리외의 말에 마농은 조금 망설이지만 그의 호소에 둘은 달아나기로 결심한다. 그때 제론트의 신고로 온 경찰이 보석들을 챙기느라 출발하지 못한 마농을 체포해 간다.
3막은 마농이 압송된 르 아브르로, 데 그리외와 레스코도 마농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와있다. 하지만 구출은 실패하고, 마농을 비롯한 죄수들이 미국으로 이송되기 위해 배에 올라타는데, 데 그리외는 울부짖으며 선장에게 자신을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선장은 감화되어 자신의 조수로 두기 위해 배에 태우고, 배에서 재회한 연인은 매우 기뻐한다. 뉴올리언스 부근의 황야로 배경이 바뀌고 4막이 시작된다. 수용소에 문제가 생겨 이 둘은 그곳을 도망쳐 나왔고, 황량한 들판을 헤매던 중 마농은 지쳐 쓰러진다. 고열에 시달리며 물을 찾는 마농을 잠시 혼자두고 데 그리외는 쉴 곳과 물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떠난다. 혼자 남은 마농은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예감에 운명을 한탄한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데 그리외가 돌아오고, 죽어가는 마농을 안아주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그리외의 품에서 마농은 마지막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숨을 거둔다.
1막 데 그리외의 아리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인’(Donna Non Vidi Mai)
데 그리외가 1막에서 마농을 처음 마주친 후, 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부르는 아리아로, 마농이 자신을 소개하는 말을 되새기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데, 이 부분의 선율은 유도동기이다. 선율은 서정적이나 점점 고조되는 감정에 휩싸인 가수는 클라이맥스에서 폭발적인 가창을 보여주는데, 이는 푸치니 특유의 아리아 스타일로 이후 푸치니 아리아의 남자주인공 아리아는 대개 이런 식이다.
2막 마농의 아리아, ‘부드러운 레이스 속에서’(In quelle trine morbide)
2막에서 마농을 보러 온 레스코에게 마농이 부르는 노래로, 지금 호화롭고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진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외롭기 그지없다는 내용이다. 데 그리외를 그리워하는 마농의 애절함이 서정적인 선율에 묻어난다.
3~4막 간주곡(인테르메초), ‘르 아브르로 가는 여정’(Intermezzo: Il viaggio a Le Havre)
마농의 체포로 막을 내리는 2막과 마농이 압송된 르 아브르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3막 사이에는 푸치니의 간주곡들 중 가장 유명한 간주곡이 등장한다. 체포되어 르 아브르로 이송되는 마농을 묘사한 간주곡으로, ‘르 아브르로 가는 여정’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현악기와 하프가 구슬픈 분위기를 자아낸다.
4막 마농의 아리아, ‘홀로 내버려져서’(Sola, perduta, abandonata)
4막, 뉴올리언스의 수용소를 탈출하여 황야를 헤매다 기진맥진한 상황에, 목마른 마농에게 물을 구해다 주기 위해 데 그리외가 떠난 사이 마농이 죽음의 공포에 떨며 부르는 비탄조의 아리아이다.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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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2011년 1월 2일 네이버캐스트 / 이용숙 글>
클래식 명곡 명연주
푸치니, 마농 레스코
피사에서 베르디의 [아이다] 공연을 처음 본 열일곱 살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는 감격해 잠을 설쳐가며, "내 갈 길은 오페라 작곡뿐"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가난과 싸워가며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 뒤 오페라 [빌리](1884)와 [에드가](1888)를 초연했지만 젊은 푸치니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893년 토리노 레조(Regio) 극장에서 초연한 [마농 레스코]로 드디어 ‘베르디를 계승할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라는 극찬을 얻은 푸치니는 마침내 가난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대체 [마농 레스코]의 어떤 특징이 그처럼 관객을 매혹했을까요?
프레보의 성장소설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 이야기]
먼저 [마농 레스코]의 토대가 된 프랑스 작가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Antoine François Prévost, 1697-1763)의 원작소설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 이야기L'histoire du chevalier des Grieux et de Manon Lescaut](1731년)에 주목해볼까요? ‘성직자’라는 의미에서 흔히 ‘아베(Abbé) 프레보’로 불리는 이 작가는 군인으로 인생을 출발했다가 베네딕트회 수사(修士)가 되었지만, 20대에 수도원을 떠난 그는 영국과 네덜란드 등지를 떠돌며 자신의 체험을 기록해 8권에 이르는 대작 [어느 귀인(貴人)의 회상]을 펴냈습니다. 그 가운데 7권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 이야기]죠. 오랜 모험과 편력을 마치고 귀향한 프레보는 다시 사제직으로 복귀해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제목의 순서에서 알 수 있듯, 프레보의 소설에서 더 비중이 큰 인물은 데 그리외라는 남자주인공입니다. 몇 년에 걸친 지독한 사랑과 쾌락을 경험한 좋은 집안 청년이 마침내 사회적 의무와 종교적 소명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성장소설’인 셈이죠. 그러나 푸치니 오페라의 진정한 주인공은 데 그리외가 아니라 여주인공 마농입니다. 푸치니는 사치와 향락의 욕구를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이 부정적인 인물을 관객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그래서 동정을 얻는 가련한 여주인공으로 새롭게 창조했습니다. 소설 속에는 두 주인공이 자신들의 향락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삼는 온갖 범죄와 악덕이 가득하지만, 오페라 속에서는 순수하고 순진한 두 남녀가 마치 한 번의 실수로 불행에 빠지게 되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오페라의 주인공은 반드시 관객의 공감과 감정이입이 가능한 인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푸치니는 완벽한 대본을 위해 마르코 프라가, 루이지 일리카, 주세페 자코사,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를 포함해 모두 여덟 사람을 대본작업에 참여시켰고, 자신도 동참했습니다. 자신보다 앞서 오페라 [마농](1884년 파리 초연)을 발표했던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를 의식해 푸치니는 1890년에 대본을 완성해놓고도 작곡이 끝난 92년까지 끊임없이 대본을 수정하며 공을 들였습니다. 결말부분에서 미국 유형 장면을 빼버린 것을 제외하면 당시 마스네의 [마농]은 ‘원작소설을 훼손하지 않고 훌륭하게 오페라화한 모범작’으로 꼽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푸치니와 함께 일한 일리카와 자코사는 이후 푸치니 최고의 걸작들인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의 리브레토도 썼답니다. 어떤 오페라가 걸작이 되는 데는 대본가의 역할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푸치니는 마농이라는 흥미로운 여주인공을 반드시 오페라 무대에 세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칭찬을 받으려면 마스네와 비슷한 대본을 만들어야 할 텐데, 그렇게 했다가는 또 모방이나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을 우려가 있어 고민이었죠. 결국 푸치니는 극단적인 길을 택했습니다. 마농과 데 그리외가 만나는 필연적인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마스네가 오페라에서 다룬 모든 장면을 다 빼버렸던 것입니다.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에는 파리 센 강변의 대로 풍경도 없고, 트랑실바니아 호텔의 도박장도 없습니다. 원작소설의 절반 이상을 과감히 잘라낸 푸치니는 2부로 나뉜 소설의 2부 후반부에 총력을 집중했습니다. 마스네가 다루지 않았던 르 아브르 항구의 극적인 반전이나 유형지 뉴올리언즈 사막의 죽음이 그것입니다.
바그너 화성의 모방, 그러나 가장 푸치니다운 선율
1막은 파리 근교 아미앵의 여관 앞 광장에서 시작됩니다. 대학생 레나토 데 그리외는 마차에서 내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빠 레스코와 함께 내린 마농을 보고 한눈에 반합니다. 마농에게 다가가 말을 건 데 그리외는 매혹적인 10대 소녀 마농이 부모의 강요로 수녀원에 들어간다는 말에 놀라죠. 사치와 허영, 허황된 꿈으로 가득한 마농이 장차 대체 뭐가 될지 우려한 부모의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워진 다음 다시 만나기로 마농과 약속한 그는 마농의 사랑스러운 말투를 되새기며 아리아 ‘한번도 본 적 없는 미인(Donna non vidi mai simile a questa!)'을 노래합니다. 이 아리아는 서정적인 선율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폭발적 효과에 이르는 푸치니 특유의 아리아 스타일을 정립한 곡입니다. 푸치니는 [라 보엠]의 로돌포,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서부의 아가씨]의 존슨이 부르는 대표 아리아를 모두 이와 같은 스타일로 작곡했지요. 이 아리아 중에 데 그리외가 방금 들은 마농의 대답을 되새기는 ‘제 이름은 마농 레스코예요(Manon Lescaut mi chiamo)’라는 멜로디는 시도동기(Leitmotiv)로 계속 되풀이해 나타납니다.
마차를 함께 타고 온 나이든 부자 제론테(제롱트)가 마농을 납치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데 그리외는 저녁에 다시 만난 마농을 마차에 태우고 파리로 도망갑니다. 도망간 두 사람이 파리에서 어떻게 살아갔는가 하는 내용은 보여 주지 않은 채 장면은 갑자기 바뀌죠. 2막은 파리에서 마농이 함께 살고 있는 제론테의 저택입니다. ‘가난을 참지 못하는’(1막 피날레에서 오빠 레스코의 대사) 마농이 데 그리외를 떠났음을 관객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농은 사치스럽고 화려하지만 열정이 없는 이 생활에 다시금 싫증을 낸답니다. 데 그리외가 마농을 다시 찾기 위해 도박판에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는 이야기를 오빠에게 전해 들은 마농은 그리움에 잠긴 채 아리아 ‘이 부드러운 레이스에 감싸여 있어도(In quelle trine morbide)’를 노래합니다.
마농을 찾아온 데 그리외는 그녀의 배신을 맹렬히 비난하는데요, 이때 두 주인공이 노래하는 긴 이중창에는 1889년 바이로이트 극장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을 본 푸치니가 습득한 바그너 반음계 화성의 영향이 나타납니다. 제론테는 두 사람을 현장에서 적발하지만 마농에게 모욕을 당하고는 매춘죄로 그녀를 경찰에 신고합니다. 이들은 마농의 오빠와 함께 서둘러 도망치려 하지만, 마농이 욕심을 내며 보석을 챙기느라 지체하는 바람에 경찰과 제론테에게 붙잡힙니다. 2막과 3막 사이에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만큼이나 아름답고 처연한 간주곡이 연주됩니다. 현악기와 하프가 감미로움과 비장미를 동시에 담아내는 이 곡에는 ‘투옥 - 르 아브르로 가는 여정’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3막은 대서양을 끼고 있는 프랑스 북부의 르 아브르 항구. 죄수들을 미국으로 추방하는 호송선이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데 그리외는 유형지로 떠날 마농을 필사적으로 탈출시키려 했지만, 구출작전은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갑니다. 매춘여성들은 하나씩 호명되어 배에 오르는데, 데 그리외는 선장의 발 앞에 엎드려 ‘아뇨! 난 미쳤어요!(No! Pazzo son, guardate!..).’라는 아리아로 ‘제발 나도 배를 타고 마농을 따라가게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의 간절함에 마음이 움직인 선장은 배의 일꾼으로 데 그리외를 데려갑니다. [마농 레스코]에서 가장 극적이고 감동이 넘치는 장면이죠.
4막은 뉴올리언스의 사막입니다. 수용소 생활 중 마농을 탐내는 정착촌 촌장 조카 때문에 문제가 생기자, 마농과 데 그리외는 황야로 도망쳐 나옵니다. 그러나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그들은 기진맥진해지고, 목마른 마농에게 물을 구해다 주려고 데 그리외가 떠난 사이에 마농은 죽음의 공포에 떨며, 회한에 찬 아리아 ‘홀로 내버려져서(Sola, perduta, abandonata)’를 노래합니다. 물을 구하지 못한 채 데 그리외가 돌아오자 마농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요’라고 외치며 데 그리외의 품에서 숨을 거둡니다.
추천 음반 및 영상물 (마농-데 그리외-레스코 순)
[음반] 레나타 테발디, 마리오 델 모나코, 마리오 보리엘로 등, 프란체스코 몰리나리 프라델리 지휘, 산타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1954년 녹음. Decca
[음반] 미렐라 프레니, 루치아노 파바로티, 드웨인 크로프트 등, 제임스 레바인 지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1992년 녹음. Decca
[DVD] 레나타 스코토, 플라시도 도밍고, 파블로 엘비라 등, 제임스 레바인 지휘,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잔카를로 메노티 연출, 1980년 공연 실황(한글자막). DG
[DVD] 마리아 굴레기나, 호세 쿠라, 루치오 갈로 등, 리카르토 무티 지휘,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릴리아나 카바니 연출, 1998년 공연 실황. TDK
[네이버 지식백과] 푸치니, 마농 레스코 [Puccini, Manon Lescaut] (클래식 명곡 명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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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2011년 3월 3일 네이버캐스트 / 고 안동림 교수 글>
내 마음의 아리아
홀로, 외로이 버려져
푸치니 <마농 레스코>
푸찌니(푸치니, Giacomo Puccini)가 작곡한 세 번째 오페라이며 오페라 작곡가로서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만든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곧 뒤이어 작곡한 3대 걸작에 비하면 작곡기술, 구성능력, 완성도 등이 훨씬 떨어지지만 특히 음악 속에 넘치는 정열과 멜로디 자체의 아름다움이라는 면에서는 그 이상이라고 해도 된다. 이 오페라는 역시 같은 원작에 작곡한 마쓰네(마스네, Jules Emile Frédéric Massenet, 1842~1912)의 [마농]과 비교하여 여러 비평가로부터 원작에 충실하지 않다거나 음악이 지나치게 드라마틱하다는 의견을 듣는다. 그러나 원작은 원작일 뿐 작곡가가 자기 음악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푸찌니에게는 그러한 비난은 전혀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함으로써 푸찌니가 보다 우수한 음악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편이 훨씬 고맙다고 할 것이다. 오페라 대본은 쁘레보(Abbé Prévost)의 소설을 올리비아(Domenico Oliva)와 일리카(Luigi Illica)가 만들었다. 전4막이다.
불행을 몰고 다니는 여인, 마농의 비극 이야기
타고난 미모와 바람기로 지금까지 숱한 남자를 불행하게 한 마농은 더 이상 희생자를 만들 수는 없다고 결심하고 사촌 오빠를 따라 수녀원을 향해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여관들이 많은 거리에서 학생 데 그뤼에게 열렬한 사랑의 호소를 듣고 그가 유혹하는 대로 사촌 오빠 몰래 빠리로 도망가 다시 사랑으로 가득 찬 생활을 즐기게 된다. 그러던 중, 사치스런 생활이 몸에 익은 마농은 분명 사랑은 충만되어 있다 해도 그저 그것뿐인 생활로는 참을 수 없고 또 사촌 오빠까지 돈에 매수되어 돈 많은 부자 노인인 제론트의 여자가 되었다. 마농을 쫓아 데 그뤼는 온 빠리를 찾아다닌 끝에 다시 그녀 앞에 모습을 나타나, 자기와 같이 가서 이전처럼 사랑으로 가득 찬 생활을 보내자고 애원한다. 마침 사치는 하고 있지만 사랑이 조금도 없는 생활에 진력이 나 있던 마농은 다시 도망갈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냥 도망가면 되었을 것을 욕심을 내서 노인의 보석류를 죄다 싹 쓸어가려다 그만 들키고 만다. 바로 두 사람이 떠나려는 순간 제론트가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마농은 미국이라는, 살아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땅으로 유배형(流配刑)을 받는다. 출발하는 날, 배를 탈 죄수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르던 중 마농의 이름이 나오자 절망에 빠진 데 그뤼는 그녀를 구하려고 관리들에게 덤벼들지만 결국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지휘관에게 청소부건 뭐건 상관없으니까 제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울면서 부탁하니까, 그 깊은 애정에 감동된 지휘관은 승낙한다. 황량(荒凉)한 낯선 땅에 정처 없이 헤매는 마농과 데 그뤼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며 데 그뤼의 깊은 사랑으로 감싸인 채 죽음과 필사적으로 싸우는 마농이었으나 이미 다가온 운명은 피할 수 없었다. 마농은 사랑하는 사람의 팔에 안겨 잠든 듯이 숨을 거둔다.
'홀로, 외로이 버려져'
홀로, 외로이 버려져
황야 속에!
두렵다!
내 둘레는
하늘이 캄캄해지고, 아, 나는 혼자다.
이 황무지 안에서 나는 죽는다.
고통스러운 괴로움이여!
아! 홀로 버려져서,
얼마나 불행한 여인인가!
아!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죽고 싶지 않은데,
그럼 모든 것이 끝이야.
이곳은 평화가 있는 땅으로 보였는데!
아! 내가 예쁜 것 때문에
번거로운 일이 차례로 일어나
나를 그에게서 갈라서게 하려 했다.
내 과거의 모든 것이 지금,
몸서리치도록 되살아나,
생생하게 내 바로 눈 앞에 있다.
아! 뜨거운 피 때문에 소문이 나빠졌다.
아! 모든 것이 끝이다!
무덤만이
평화를 주는 장소가 되어 주리라.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아!
싫어!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이여, 도와 주세요!
유배지에 닿은 후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것은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고 이 아리아 속에 대강 이야기 되고 있다. 피로와 굶주림으로 꼼짝 못하는 마농을 그대로 두고 데 그뤼가 물을 찾아 떠난 뒤 그녀는 자기의 비참한 꼴을 눈여겨 본다. 지난날 문득 깨달았던 후회는 두려운 절망감이 되지만, 이 아리아가 끝난 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온 데 그뤼를 나무라지 않고 끝까지 살아 달라고 부탁하고 마농은 오보에와 훌루트(플루트, flute)의 반주 속에 숨을 거둔다. 이 미련(未練)뿐인 죽음에는 조금도 고귀함이나 위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감동을 준다.
[마농 레스코 공연]의 에피소드 : 그리고 무대에는 지휘자와 주역 둘만 남았다
웰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1978년도 브라이톤 축제에서 있었던 일이다. [마농 레스꼬]공연이 순조롭게 공연되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지휘자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합창단은 물론이고 오케스트라 단원이 모두 없어지고 무대에는 주역인 마농과 데 그뤼만 달랑 남아 있었다. 덕분에 지휘자는 텅 빈 오케스트라 박스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입장에 놓이고 말았다. 아마 다른 곳의 정기 연주회(定期演奏會)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연속 과로한 끝에 이번 브라이톤의 연주로 단원 전원이 지쳐 뻗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연일 출연으로 피로한 단원들이 오페라가 끝나가니 자기 몫이 끝난 단원은 가도 좋다고 누군가가 낸 헛소문에 속았던가.
추천 음반 및 DVD
[CD] 세라휜(세라핀, Serafin) 지휘,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합창단(1957) 칼라스(S) EMI
모노랄 녹음이지만 잊을 수 없는 연주이다. 칼라스의 마농은 날카롭고 선명하며 상대역인 디 스테화노(디 스테파노, di Stefano)도 더할 나위 없는 명역이다. 세라휜의 이 드라마의 본질을 확고히 파악한 기반 위에서 만들어 내는 드라마틱한 음악의 향연은 듣는 이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CD] 시노폴리 지휘, 휠하모니아 관현악단/합창단(1983) 후레니(프레니, Mirella Freni, S) DG
이 오페라는 전반(前半) 1,2막이 화려하고 후반(後半) 3,4막은 암전(暗轉)된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가 장점과 단점을 드러낸다. 즉 마농의 실재감(實在感)이 온전하게 노래에 표현되어 있지 않으면 후반이 진지한 비극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후레니는 그 점에서 여자의 본성을 완벽하게 노래하고 있다.
[DVD] 시노폴리 지휘, 코벤트 가든 왕립 가극장 관현악단/합창단(1983) 테 카나와(S) 후리드리히 연출
테 카나와(Kiri Te Kanawa), 도밍고 절정기(絶頂期)의 로이열(로열) 오페라단 공연 실황을 녹화한 것이다. 이 오페라를 어떤 이는 “청춘의 아픈 상처”라고 했지만 그 상처를 연출가 후리드리히(프리드리히, Götz Friedrich)는 시노폴리(Giuseppe Sinopoli)의 치밀한 음악과 함께 음영(陰影) 깊게 그려나간다. 화려한 무대 모습의 테 카나와가 인상 깊은 연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홀로, 외로이 버려져 - 푸치니, [마농 레스코] (내 마음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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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2015년 9월 30일 네이버캐스트 /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김성현 글>
문학과 클래식
오페라의 '타락남녀'
소설 『마농 레스코』와 푸치니와 마스네의 오페라
재즈의 발생지를 찾아서 미시시피 강의 하류로 내려가면 도착하는 최종 기착지가 뉴올리언스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뉴올리언스는 대대로 면화와 곡물을 수출했던 항구 도시였다.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으로 끌려온 흑인들이 첫발을 내딛는 신대륙이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 아일랜드와 독일 등 유럽 전역의 이민자들이 뒤섞이는 도시였다. 뉴올리언스는 탄생부터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였다. 재즈는 이 용광로의 열기로 빚어낸 음악이었다.
1718년 뉴올리언스를 개척한 프랑스는 당시 루이 15세의 섭정공이었던 오를레앙 공(公) 필립 2세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오를레앙(누벨 오를레앙)’이라고 명명했다. 미국 독립전쟁 때는 영국에 맞서 아메리카 식민지의 편에 섰던 프랑스가 탄약과 군수품을 지원했던 통로였다. 1803년 나폴레옹은 뉴올리언스가 포함된 루이지애나주의 소유권을 당시 1,500만 달러의 가격에 미국에 팔아넘겼다. 하지만 신대륙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의 후손인 크레올은 이후에도 프랑스어권 인구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이민을 장려했다. 결과적으로 더욱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뉴올리언스로 유입됐다. 20세기 초까지도 4명 가운데 1명이 프랑스어를 사용했던 ‘미국 속의 프랑스’가 뉴올리언스였다.
1731년 프랑스 작가 아베 프레보(Abbé Prévost, 1697~1763)가 발표한 소설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의 이야기』(『마농 레스코』)의 마지막 배경이 뉴올리언스다. 도박과 사기, 감금과 살인 등의 죄명을 쓰고 추방된 마농과 연인 데 그리외의 눈에 비친 뉴올리언스는 황량한 유배지와도 같았다.
고립무원의 땅, 뉴올리언스
“두 달간의 항해가 끝나고 우리들은 기다리던 해안에 도착했다. 첫눈에 이 땅은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황폐하고 인적이 드문 들판에는 바람으로 벌거숭이가 된 나무 몇 그루와 갈대뿐이었다. 사람이나 동물의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선장의 명령으로 대포를 몇 발 발사하자 누벨 오를레앙 주민들이 환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으러 나왔다.”
프레보, 『마농 레스코』
낡은 관습이나 신분 질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신대륙에서 이들 연인은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18세기 초 뉴올리언스에 몰려든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이곳은 ‘기회의 땅’이었던 것이다. 데 그리외는 마농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사랑의 참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벨 오를레앙에 와야만 하오. 여기서만 질투나 배신 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소. 금을 발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우리가 더욱 값진 보물을 찾은 건 누구도 모를 거요.”
프레보, 『마농 레스코』
하지만 데 그리외는 마농에게 눈독을 들이는 지역 촌장의 조카와 결투를 벌인 끝에 사막으로 달아나고 급기야 마농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 한복판에서 숨을 거둔다. 뉴올리언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공간인 동시에, 퇴로마저 막힌 고립무원의 상징이었다. 더 이상은 갈 곳이 없다는 의미에서 『마농 레스코』는 말 그대로 ‘막장극(劇)’이기도 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지독한 사랑
『마농 레스코』는 사랑의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연인들이 저지르는 탈주와 탈선의 서사시다. 두 번의 납치와 네댓 차례의 절도, 두 번의 살인과 한차례의 화재, 네 번의 투옥과 한 번의 감금, 한차례의 추방과 한 번의 탈출 등 범죄 일람표와도 같은 이 소설은 순전히 자의로 신세를 망치는 이야기다.
주인공 데 그리외도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행복을 거부하고 스스로 최후의 불행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라는 것을. “가장 빛나는 미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운명이나 자연의 혜택을 누리기보다는 어둡고 방랑하는 삶을 선택했다”라는 것을. “불행을 겪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피하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대혁명 직전의 프랑스 사회처럼 신분제의 낡은 질서가 흔들릴 때, 청춘 남녀들 사이에서 번지는 열병이 자유연애다. 하지만 봉건적 사슬에서 막 풀려난 젊은 남녀를 다시 옥죄는 밧줄이 경제적 능력이다. ‘유지하다’는 뜻의 프랑스어인 ‘앙트르트니르(entretenir)’에 ‘첩(妾)을 두다’라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고로 홀로 설 수 없는 자는 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자유연애의 기본 전제는 이제나저제나 경제적 자립인 것이다.
지조 없는 여인 마농은 가난한 학생 데 그리외의 순수한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향락과 쾌락에 몸을 내맡긴다. 데 그리외가 곤궁한 처지에 빠질 때마다 마농은 “세상에 진실로 사랑하는 건 당신뿐이지만, 파산할 지경이라면 정조란 어리석은 미덕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편지만을 남긴 채 어김없이 떠난다. 소설은 세무관리인 B의 정부(情婦)가 된 마농을 “B의 보살핌을 받는다”라고 표현한다. 경제적 지원이 결부된 육체적 관계를 흡사 ‘스폰서’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소설에서 마농은 그를 세 번이나 버리고 달아났다. 데 그리외에게도 마농을 잊을 기회는 세 번이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가 순순히 체념했다면, 이처럼 지독한 사랑 이야기도 애당초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데 그리외를 “선악이 뒤섞여 있고, 양식(良識)과 나쁜 행동이 영원히 대조를 이루는 모호한 인물”이라고 정의했다.
남녀의 어리석은 사랑을 치정(癡情)이라고 부르는 건, 그 사랑이 육욕으로 얼룩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파멸로 떨어지는 줄 알면서도 헤어날 수 없을 만큼 질긴 악연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마농은 처음 만난 데 그리외의 유혹에 흔들려 파리로 달아난다. 데 그리외에게도 성직자가 될 기회가 있었지만 제 발로 수도원을 박차고 나온다. 데 그리외는 자신이 곤란한 지경에 빠질 때마다 사심 없이 발 벗고 도와줬던 수도사 친구 티베르주 앞에서 육욕과 쾌락을 찬양하고, 종교를 모독하는 불경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비록 사랑은 종종 사람을 속이지만 최소한 만족과 기쁨을 약속한다네. 반면 종교는 사람들이 슬픈 고행만 겪도록 바라지 않은가.” 프레보, 『마농 레스코』
작가의 삶이 담긴, 미친 사랑의 노래
이 ‘미친 사랑의 노래’에는 젊은 날 성속(聖俗)을 넘나들며 방황했던 작가 프레보(Abbé Prévost)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다. 유년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고, 엄격한 아버지의 손에 자랐던 프레보는 프랑스 북부 에스댕의 예수회 기숙학교에서 신학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그가 진학하고자 했던 북프랑스의 유서 깊은 두에 대학이 반(反) 프랑스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그는 ‘신학’ 대신 ‘군대’를 택했다. 작가가 불과 16세 때의 일이었다. 그 뒤로도 수사(修士)와 군인 생활, 탈영과 사면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자신이 빚어낸 주인공 데 그리외보다도 더 소설 같은 삶을 살았다.
비극으로 끝난 작품의 주인공들과 달리, 작가의 말년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1734년 베네딕트 수도원의 사제로 돌아온 그는 파리 인근 샹티이의 수도원에 머물면서 저술 작업에 매달렸고 평생 130여 편의 소설과 기행문을 남겼다. 해외를 떠돌던 시절에 작가는 자신을 ‘추방된 프레보(프레보 데그질)’라고 불렀지만, 프랑스로 귀국한 뒤에는 ‘신부 프레보(아베 프레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가 그의 본명이지만, 지금도 아베 프레보로 더욱 친숙하다.
인기를 누린 금서
『마농 레스코』는 일찍이 프랑스 문학사에서 볼 수 없었던 부도덕한 여인의 탄생이었다. 타락한 여인들 사이에 섞여 있는 공주와도 같은 마농의 이율배반적 매력은 어떤 작품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소설에서 각각 17세와 15세로 설정된 이들 ‘철부지 남녀’는 흡사 타락한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같았다.
프랑스에서 이 소설은 1731년 출간과 동시에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됐다. 하지만 네덜란드 등 주변국에서 들여온 해적판이 은밀하게 유통될 만큼 인기가 높았다. 1753년 작가 스스로 논란이 될 만한 장면의 표현 수위를 누그러뜨리고 도덕적 교훈을 덧붙인 개정판을 낸 뒤에야 정식 출판 허가를 받았다. 『마농 레스코』는 연애지상주의 시대의 ‘교과서’인 동시에, 사랑의 극한이 어디까지인지 묻는 ‘시험지’였다.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도 이 작품에 매료된 독자는 적지 않았다. 사드 백작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보다도 『마농 레스코』를 높게 평가하면서 “이 매력적인 작품을 읽은 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는가!”라고 감탄했다. 삼권 분립을 설파한 프랑스 계몽 철학자 몽테스키외도 “데 그리외의 행동이 아무리 저열해도, 그의 모든 행동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고상한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옹호했다. 독일의 괴테는 청년 시절 그레트헨과의 첫사랑에 실패한 뒤 이 소설을 읽었던 경험을 훗날 자서전에 기록했다. “실연과 같은 고통을 자극하는 데 프레보의 소설만큼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라는 독일 문호의 고백에서 그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떠오른다.
마스네의 마농
소설 출간 이후 데 그리외와 마농은 오페라와 발레, 영화까지 예술 장르의 남녀 주인공 자리를 독식하기에 이르렀다. 시기상으로는 1830년 작곡가 알레비의 발레 [마농 레스코]와 1856년 다니엘 오베르의 오페라 [마농 레스코]가 앞선다. 하지만 최초의 세계적 히트작은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Jules Massenet, 1842~1912)가 1884년 발표한 오페라 [마농]이었다.
마스네가 당초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에서 의뢰를 받았던 작품은 『마농 레스코』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의 『포이베』였다. 이 작품의 진척이 여의치 않자 마스네는 위촉을 사양하기 위해 대본 작가 앙리 메이약을 찾아갔다. 하지만 메이약의 서재에서 소설 『마농 레스코』를 발견한 마스네는 그 자리에서 오페라 대본 집필을 의뢰했다. 이틀 뒤에 첫 두 막의 대본을 써온 메이약은 마스네와의 식사 자리에서 대본을 식탁보 밑에 슬그머니 놓아뒀다. 대본을 받은 마스네는 1882년 작가 프레보가 『마농 레스코』를 집필했던 네덜란드 헤이그의 집에 머물면서 작곡에 매달렸다. 마침내 이 오페라는 1884년 초연 이후 35년간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1,000회 공연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야심찬 푸치니의 출세작
마스네의 여주인공이었던 마농 레스코에 도전장을 던진 이탈리아의 후배 작곡가가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였다. 그는 당시 오페라 [빌리]와 [에드가] 등 두 작품을 발표한 ‘신인급 작곡가’였다. 하지만 푸치니는 동료 출판업자가 만류했지만 “왜 마농에 대한 두 편의 오페라가 존재하면 안 되는가? 마농 같은 여인은 하나 이상의 연인을 가질 수 있을 거야”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프랑스인인 마스네가 분칠과 미뉴에트로 작품을 느낀다면, 이탈리아인인 나는 거침없는 열정으로 작품을 바라보겠다”라는 푸치니의 말에는 오페라 본고장 출신이라는 자존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작곡가는 앞선 두 오페라의 반응이 미지근한 데 그치자 [마농 레스코]를 완성하기 위해 모두 5명의 대본 작가를 동원할 만큼 노심초사를 거듭했다. 결국 1893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초연된 [마농 레스코]는 [라 보엠]과 [토스카], [나비부인]을 예고하는 작곡가의 출세작이 됐다.
마스네는 마농의 노래에서 음정과 기교, 색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여주인공의 변덕스러운 성격이나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당대 사회의 모습을 담아냈다. 반면 푸치니의 오페라는 파멸로 치닫는 청춘 남녀의 운명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충실했다. 마스네는 마농이 르아브르로 호송되던 도중에 숨지도록 각색했다. 반면 푸치니는 원작 설정을 그대로 살려 뉴올리언스의 사막에서 숨지도록 해서 처절함을 한층 부각했다. 마스네의 오페라는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속삭이는 파리를 2막의 배경으로 삼은 반면, 푸치니의 오페라 2막에서 마농은 이미 데 그리외와 헤어지고 부호의 애첩이 되어 있다. 이처럼 푸치니는 선배 마스네의 [마농]과 적극적으로 차별화하기 위해 때로 의도적인 비약을 택했다.
하지만 두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숱한 차이점이 하나의 공통점보다 클 수는 없었다. 푸치니의 말처럼 마농은 충분히 두 작품의 주인공이 될 만큼 치명적 매력을 지닌 ‘팜 파탈’이라는 점이었다.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것이 고전의 운명이라면, 이 작품보다 그 운명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었다. 초연 이듬해 영국 런던에서 오페라 [마농 레스코]를 관람한 버나드 쇼는 “그 어떤 라이벌들보다 푸치니는 베르디의 후계자에 가까워 보인다”라고 평했다. 쇼의 이 말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역사를 정확하게 꿰뚫어본 예언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페라의 ‘타락 남녀’ - 소설 『마농 레스코』와 푸치니와 마스네의 오페라 (문학과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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