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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봉 [22대 해병대 사령관]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 범죄자.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 사건의 주동자. 대한민국 해병대의 수치이자 최대 오점. 두 번이나 불명예 전역을 당해 해병대 사령관 출신이지만 공식적으로 의전, 경력 면에서 기수열외를 당한 장본인이다.
2. 생애
1942년 10월 10일,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4]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개신교(예장통합)이다. [5]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고 1966년에 졸업했다. 이후 해병대에 입대하여 간부후보생(해간) 35기로 해병대 장교가 되었다.
해병대로 입대하게 된 계기에 대해 전도봉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도봉 - "... 병사로 가도 2년 6개월 근무해야 하고, 장교로 가면 해군은 4년인데, 해병대만 유독 3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기간이 짧으니까 이왕이면 해병대 가서 군 복무를 하겠다고 해병대를 선택했죠. 그런데 저의 어머니가 많이 반대했습니다. 그때는 어디 해병대를 군대로 생각했습니까? 어머니 말로 “야, 이놈아, 거기는 군대도 아니라카더라. ‘개병대’라 카더라, 근데 네가 거길 왜 갈라카노?” 라고 하셨죠."
질문 - "그때도 ‘개병대’라는 말이 있었나요? 그 말은 굉장히 비하하고 낮게 보는 표현인데, 그때 왜 그렇게 불렀나요?"
전도봉 - "그때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났고, 선배들은 6.25 전쟁을 치렀는데, 전쟁을 치른 군인들은 돌아왔을 때 상처도 입고 정신적으로도 피폐하니까 이상한 행동들을 많이 하잖아요. 저 역시 월남전쟁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똑같은 경험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선배들이 그 당시에 보여주었던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전쟁 후유증이 국민들에게 개병대로 비춰진 것으로 저는 봅니다."
해병대 장교로 임관된 뒤에 소위로 복무하다가 해병학교에서 보수교육을 받던 도중에 1966년 8월 8일에 발생한 해병대의 흑역사인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 사건을 주동하였다. 해병대 측에서 사망자도 나오는 등 큰 사건이었으나,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때라 장교 인원이 한 명이라도 아쉬운 때였던 만큼 참여자 대부분은 주동자를 제외하곤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갔다. 전도봉을 비롯한 주동자급 해병 장교 10여 명은 몇 달간 진해 해군헌병대 영창에 구속된 상태로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결국 제일 핵심 주동자였던 전도봉 소위만 불명예 전역을 당하고 나머지는 현역 장교로 복귀하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전도봉에게 현역 대한민국 육군 병 입영통지서가 발부되었고[6] 이에 전도봉은 육군 병 입대 대신 해병대 장교로 재입대하는 것을 선택했고, 결국 해병대 소위로 다시 임관하게 된다. 즉 두 번이나 임관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첫 임관 때의 동기들(해간 35기)보다 후배(해간 38기)가 되었다. 그러나 언론 공개 이력 등엔 첫 번째 기수인 35기만을 고집한다. 이런 경우는 대개 족보가 꼬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공식적으론 38기지만, 35기 시절에도 동기 중에 리더격으로 행세했기 때문에 35기 동기생들도 사실상 35기 동기로 인정해줬다고 한다. 마치 고등학교에서 사고를 쳐서 퇴학당해 1년 꿀은 복학생이 원래 같은 학년이었던 애들과 말놓는 거랑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968년에 청룡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소위 때 현역 부적합 전역을 당한 것과 대위 때 당한 징계를 당한 것이나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약점 등으로 진급이 어려울 거라 해병대 장교단 내에선 예상했지만 결국 살아남아 1996년에 해병대 사령관까지 영전한다.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은 1966년 습격 사건 당시 공군비행학교[7]의 당직사관이었던 이양호 대위였다.
한마디로 전술한 공군 비행학교 습격 사건 건으로 인해 현역 부적합 전역을 했다가 재입대하여 다시 두 번째 임관했고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사고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해병대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온, 이력서가 매우 해괴한 인물이다. 이에는 마침 정치적인 요소도 운으로 작용했다. 특히 당시 김영삼 정권은 기존의 TK(대구/경북) 세력 대신 PK(부산/경남) 인맥으로 대대적인 물갈이를 하고 있었는데, 전도봉은 김영삼 대통령의 고향(경남 거제) 및 학교(경남고)의 직속 후배라는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베트남전 당시 죄수들로 구성된 이른바 수인소대라는 것을 이끌었다고 한다.
1974년에는 옹진호 사건으로 두 번째로 헌병대에 가기도 했다. [8] 하지만 동정 여론으로 한 달 보름 만에 복귀했다. 나중에 1984년에 자신이 수감됐던 헌병대의 헌병대장을 맡았다. 전역 후에는 환경운동을 하고 있다.
1981년 이후로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유일한 해병대 사령관이다. 1998년에 해병대 진급 청탁 뇌물 관련 비리 혐의로 해병대 사령관에서 불명예 퇴진 당한 후 구속되었다. 이후 재판은 3심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2002년 12월 16일, 대법원 3부(주심 변재승 대법관)로부터 뇌물약속죄 유죄 확정판결을 받고 벌금형 500만원과 자격정지 1년형이 확정 선고되었다. 그리고 이 일로 전도봉은 대한민국 국군 역사 전체에서 '불명예전역을 2번이나 당한 군인[9]'이라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기묘한것은 그 두 번의 불명예전역이 공교롭게도 군생활의 시작과 마무리때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이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의 선대위 상임특별보좌관으로 활동하고# 당선 후에는 취임준비위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에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전혀 연관도 없는 한전KDN의 사장으로 재직했다. 비전문가에 불명예전역만 두 번이나 당한 사람을 선거 캠프에 있었다는 이유로 공기업 사장으로 임명하는[10]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 당시 한전 자회사의 인사는 경영진과 감사 22명 중 14명이 현대그룹,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한나라당 출신 비전문가로, 당시에도 낙하산 인사로 비판이 많았다.####
군시절에 각종 말썽도 많이 일으켰고, 고압적인 데다가 부정부패로 수감되는 등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나름 높은 지명도를 가졌다고 자부해서인지 정치에 도전하기도 했다.
2014년 지방선거 당시에 새누리당 소속으로 거제시장에 나가려고 예비후보 등록하였으나 여론조사 경선에서 권민호 후보에게 밀렸다. 권민호 후보는 49.6%를 득표하여 2위인 유승화 전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16%), 전도봉 전 해병대사령관(6%)을 제쳐 후보가 되었고 거제시장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약 3년 후 권민호 시장은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더불어민주당으로 옮겨갔다.
이재오가 만든 늘푸른한국당에 합류하여 활동한 바도 있다. 그리고 2016년에는 이재오, 최병국(1942) 등과 함께 늘푸른한국당 창당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2016년 12월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다른 공동위원장과 달리 이름이 빠져 있는 상태로 보아 아마도 사퇴한 듯하다.
2020년에 회고록인 <그러나 해병대는 영원하다>를 발표했다. 사관후보생 시절에 남포동에서 깡패들과 100대 1로 싸웠다가 결국 형님 소리 들었다는 허풍이빨부터 시작해서, 공군비행학교 사건을 지나, 베트남 가서도 싸우고, 백령도에서도 싸우고, 휴가 나와서도 싸우고 온통 쌈박질 한 내용들이다. 온통 자기 미화로 가득하나, 해병 중사를 땅에 파묻거나 본인이 부정부패로 콩밥 먹은 내용, 고향에서 정치에 도전했지만 후보는 커녕 예비경선에서도 꼴등(경선 후보자 지지도 여론조사 6%)을 해서 탈락했던 일화 등은 싹 빼버린 전형적인 불쏘시개다.
3. 여담[편집]
부인 류명자 사이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인 전진용과 셋째인 전진윤은 해병대 병으로 복무하였고 둘째인 전진서는 아버지처럼 연세대를 나와 해병소위로 임관하였다.
약 20년전 전역 직후 월간지에 기고한 글, 월남전 파병 시 사회의 전과자나 해병대에서 영창 경험이 있던 해병들을 모아 수인소대가 존재했고 자신이 그 소대장이었다고 주장했다. 워낙 지원자가 부족하여 할 수 없이 영창에 있던 범죄자들을 끌어 왔다고 한다. 여기에 해병대 공군비행장 습격사건의 주범으로 퇴학당하며 인성은 몰라도 깡은 인정받은 전도봉을 장교 부족 때문에 복직시키는 대신 파병 보내 소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수인 출신 해병들은 소대장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두목의 지시에만 따랐다. 결국 참다못한 전도봉이 두목을 영창으로 보냈다. 그러자 해병들이 수류탄 핀을 뽑아 들며 두목을 다시 데려오라고 난동을 피웠다고 한다. 이에 전도봉은 자신의 말빨과 인격으로 그들이 울 정도로 감복시키며 수류탄 핀을 다시 꼽게 했고 이후 부대를 잘 다스렸다고 주장한다. 물론 해병대가 이빨이 워낙 심한 만큼 이 역시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일화이긴 하다.
오직 전도봉만 주장하고 있는 수인소대, 형벌부대의 존재는 실존 여부가 의심되지만, 이와 별개로 예전엔 정부가 사회 "문제아"들을 잡아다가 강제로 군대로 보내버렸던 건 박정희 정권 및 전두환 정권 초기까지도 실제로 있어 왔던 일이다. 흉악범들이 아니고 비교적 죄가 무겁지 않은 사람들, 예를 들자면 동네 건달들이나 정부에게는 골칫거리들이었던 학생 운동가들, 그리고 과거에 무척 많았던 병역기피를 위해 숨어지내던 사람들이 그 주요 대상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군대 갈래, 아니면 깜방갈래"라며 반강제식으로 해병대로 입영시켜버리는 경우도 많았었고, 그 외에도 옛날에는 해병대에 지역별 징집기수들도 많이 존재했다. 하지만 월남에 파병가는 것은 오히려 지원자가 넘쳐서 매번 지원하면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였다.[11] 물론 월남에간 지원자들 중에 "전과"나 "기록"이 있는 군인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지원자가 넘치는데 거기서 수인소대를 따로 만들어 모았다는 것은 의심해 볼 만한 내용이다.[12] 그리고 수기록에는 자신이 "깡"으로 인정받아서 운 좋게 파병 가는 걸로 끝났다는 식으로 적혀있는데, 육군같은 타 부대에서도 장교가 부족해서인지 밀수나 비교적 가벼운 범죄로 걸린 장교들은 형무소 대신 월남 복무로 형을 때우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비교적이다. 밀수도 큰 범죄 맞다.
2020년에 출판된 전도봉 회고록 <그러나 해병대는 영원하다>에서는 이 수인소대의 규모를 자기 자신이 전에 말했던 것보다 또 몇 배로 뻥튀기 시켜놨다. 그 책에 의하면 베트남에서 모든 사고자나 전과자는 살인중대라고 부르는 청룡여단 2대대 5중대로 보내는데 1968년 2월에 자신이 1소대장이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12월에는 '캡부대' 소대장이 된다고 썼다. 당시 해병대는 탈영병이나 교도소 수감자 중 현역 대상자들을 모아 해병대에서 훈련한 뒤 파병시켰는데 처음에는 4개대대에 분산시켜 병사들과 똑같이 근무시켰으나 난동을 자주 부려, 전과자 출신으로 구성된 별도의 부대를 만들었는데 그게 '캡부대'(대대급)라고 한다. 인원은 무려 300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도봉은 여기서 다시 소대장을 맡았다고 주장한다.
청룡부대는 4개 대대로 구성된 여단급으로 조직이 워낙 작다 보니 죄수들이 모인 부대가 소대 규모로만 있었어도 다른 청룡부대 해병들이 모를 리가 없는데 전도봉 외에는 아무도 그런 부대의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회고록에는 판을 더 키워 살인중대 및 전과자 대대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만에 하나 전도봉 장군의 책 내용이 맞다면 해병대 청룡부대는 대원들 중 상당수가 사고자, 탈영병, 전과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허풍 실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신빙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공군과의 패싸움 사건이나 웅진호 사건, 뇌물관련 사건 등으로 깜방에도 여러번 들락거리는 등 트러블 메이커였다고 볼 수도 있으나, 해병대 내부 사회에선 역대 해병대 장교들 중 해병대 "병" 출신들에겐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다른 해병대 장교들과는 달리 해병들의 곤조와 뽀대 및 허세 문화를 인정하고 은근히 장려함으로써 해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즉 해병대 장교였지만 해병대 "병"들과 더욱 코드가 맞았던 부류의 군인이었다. 즉 다른 점잖은 해병대 장군들과는 달리, "행여 사고도 좀 치고 허풍과 허세를 부리며 폼 잡고 다니더라도 사기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게 해병 다운 해병"이라며 병들의 가오를 세워주는 스타일이었으니 골수 해병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것이다. 게다가 골수 해병들의 표현에 따르면 역대 해병대 장교들 중에 '가장 짜세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즉 골수 해병들 눈에는 전도봉은 자기들과 이질적이고 거리가 있는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자기들과 마인드가 비슷한 같은 '병' 선임 같은 느낌이고[13], 해병대에서 제일 짜세나고 체질[14]인 선임이 장군과 사령관까지 올라간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15]
임기 중, 현 해병대 병들이 겨울의 행사나 휴가 및 외박 시 근무복 위에 입는 코트를 제정토록 한 것도 전도봉이다. 그 이전에는 근무복 위에도 실잠바를 입어야 했다. 현재는 해병1191기부터 개인피복으로 바뀌어 신병훈련 때 지급된다. 이 때문에, 해병대원들이 한 때 이 코트를 전도봉 코트라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해병들을 외관적으로 폼나게 하는 것에도 신경을 많이 써주었던 것도 병들 사이에서 전도봉이 받았던 높은 인기의 한 원인이었다.
제1해병사단 군수참모(대령) 시절, 나무 옮겨심는 작업을 하던 해병대원의 실수로 나무뿌리를 감싸둔 흙이 자기 눈앞에서 떨어지자, 이에 분노해 현장 책임자인 중사를 땅을 파고 하반신을 파묻게 했는데, 장기간 방치해 호흡 곤란으로 의식을 잃기 직전 다른 이들이 꺼내주는 살인 교사 사건을 저질렀음에도 아무런 문책을 받지 않는 개병대스러운 개막장 전설을 하나 세웠다. 차라리 때리면 때렸지, 업무 중에 실수했다고 사람을 땅에 파묻는다? 이건 나치, 북한에나 있을 법한 인권유린이다. 이런 막장 범죄를 개병 틀딱들이 오히려 멋지다며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는 건, 그들이 얼마나 범죄가 만연한 비정상적인 병영생활을 일상적으로 보내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쌍팔년대 군대라도 타군에서 이런 식으로 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며, 특히 시대상으로도 선진 병영에 속했던 공군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면 모가지는 기본일 정도로 파장이 컸을 것이다.
해병대 사령관 시절, 예하 장병들에게 FM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은 대놓고 복장 규정을 무시하고 다녔다. 전투복에 철제 계급장 부착은 금지되어 있음에도 이를 달았고, 1998년부터 육군과 해병대 간부는 전투모에 철제 모장 부착은 허용됐으나 전도봉 장군은 육군 및 해병대용이 아닌 해군 개리슨 모에 다는 작은 크기의 계급장을 다는 위규를 저질렀다. 많은 해병 출신들이 그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골수 해병들과 성향과 코드가 맞는 그러한 기행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해사 출신이 아니라서 해군 수뇌부와 부담 없이 각을 세울 수 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16] 그는 같은 지역 출신인데다가 고교 선후배 관계인 김영삼 대통령과 친하게 지냈고 비해사 출신인 그가 등용된 배경을 많은 이들이 이런 지연/학연 인맥이 작용했다고 보았다. 어쨌거나 비해사 출신으로 해병대의 전력 강화 등에 직접적으로 발언할 기회가 많았고 이 탓에 직속상관인 해군참모총장 안병태 제독이나 유삼남 제독과 그리 사이가 좋질 못했다고 한다.
[1] 해간 35기 임관연도
[2] 해간 38기 임관년도
[3] 해간 35기로 임관하여 소위로 복무하던 중에 공군 비행학교 습격 사건으로 불명예 전역을 당하고 다시 재입대. 38기로 재임관하였다. 즉 두개의 해간기수가 있는 셈인데, 공식적으론 38기지만(35기로서의 군 생활은 조기에 끝났으므로), 이력서엔 처음 기수인 35기를 내세운다.
[4] 출생 당시에는 통영군 관할이었다.
[5] 고려대학교 인근에 있는 영암교회 은퇴한 장로다. 영암교회 장로 명단 참조.
[6] 실제 복무 기간이 짧아서 병역을 필한 것으로 인정할 만큼의 기준을 못 채웠기 때문에 병역의무가 여전히 남아있게 된 것이다.
[7] 당시 공군 비행학교가 있던 김해군 부지에 현재는 김해국제공항이 위치해 있다. 해운대구에 있던 수영 비행장을 폐쇄하고 그곳으로 이전해 간 것. 공군비행학교라는 이름의 기관은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이 학교의 역사성을 계승한 부대는 경남 사천에 위치한 제3훈련비행단이라고 볼 수 있다.
[8]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인 옹진호에 휴가 나가는 해병대원을 태우기로 했는데 민간인만 태우고 가려고 하자 해군 고속정이 해병대원을 태우지 않으면 호위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배가 돌아온다. 이에 빡돌았던 해병대원들은 선장과 배의 경찰을 구타했고 배가 인천에 도착하자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9] 소위 때 한 번, 사령관 때 한 번
[10] 한전 및 그 자회사의 사장 임명에 정부의 입김이 강하긴 하나, 이 정도로 관련이 없는 사람이 한전KDN의 사장이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1] 사병 기준으로 파병가면 미국으로부터 약 20~40불을 매달 받았으며 지금 돈으로 치면 엄청난 돈이다.
[12] 실제로 백마부대에서 복무한 참전용사와 청룡부대 출신 참전용사 말에 의하면 사회에 기록이 있는 사람이 월남에 온 적은 있지만, 그들만 따로 모아 부대를 만들었다는 건 처음 들어 본다고 한다. 특히 청룡부대는 여단 규모라 파월 해병대 중 수인소대 같은 파격적인 것이 존재했다면 모를 리가 없다.
[13] 다른 군에서도 그렇지만 해병대는 특히나 계급 간 갈등이 심해서, 병이 진정한 해병이고 해병대에서 간부는 병들의 해병문화를 탄압하는 적 같은 존재라는 식의 세뇌가 만연해 있다.
[14] 해병대에서 후임들에게 가혹행위를 심하게 하고 군기를 빡세게 잡는, 무서우면서도 권위 있는 실세 선임을 가리키는 은어
[15] 타군에서는 이렇게 해서는 진정한 지휘관이라며 추앙받기 어렵다. 타군에서는 효율적 업무 처리 및 전력 향상과 병사 복지에 신경을 쓰는 지휘관이 추앙받는 게 일반적. 대표적으로 공군의 김은기 장군이 항공우주력 투자와 (공군본부 우주과를 만든 그 사람이다. 지금은 공군 항공우주전투발전단과 공군 작사 항공우주작전본부가 이어받음) 장병 복지에 신경을 많이 썼고, 제2롯데월드 건설과 관련하여 자신의 휘하 병력을 롯데그룹 측에서 무단으로 사용하려 하자 노발대발했다. 공군이 추구하는 가치가 전문성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이러한 이유로 김 장군이 진정한 참모총장이라며 추앙받는 것. 성일환 장군도 추앙받긴 하지만 김 장군만큼은 아니다.
[16] 일단 통상 해군참모총장이 상관에다 계급도 높고 무엇보다 해사 선배이기에 해사 출신 해병대 사령관은 해참총장과 대놓고 반목하기는 부담스럽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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