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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정사(歸政寺)는 산동면 대상리에 있다. 백제 무녕왕(武寧王) 재위 15년(서기515)에 세웠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된 유서깊은 사찰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절은 처음에 만행사(萬行寺)라 했다가 귀정사로 그 이름이 바뀌인 데는 까닭이 있다.
옛날 만행산 만행사에는 천하에 이름 높은 고승이 있어 어느덧 이 나라의 왕이 그 이름을 들어 알게 되었다. 그의 설법을 들으면 앉은뱅이가 일어선다 하고, 며칠을 들어도 잠이 아니온다 하고 몸의 괴로움이 스스로 없어진다 하였다.
왕은 그 고승을 한 번 보기가 소원인지라 하루는 백관을 거느리고 만행사까지 행궁하게 되었다. 이 때 왕이 그 고승을 대하니 과연 도사답게 생겨 절로 고개가 수그러지려 한다.
"그대의 설법이 고명함을 듣고 백관을 거느리어 왔으니 불교 교리에 대하여 가르쳐 주어 짐을 즐겁게 할지니라"
이렇게 해서 만행사 스님의 설법이 시작되니 그 오묘한 설법을 듣는 사람, 왕은 물론이요, 누구나 탄복하지 않은이 없다. 설법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모두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왕은 고승의 설법을 하루라도 더 듣고 싶어서, "짐은 이곳서 3일간을 머물러 국정을 살필 것이니 백관들은 이에 따르되 잠시나마 서정집행에 소루함이 없도록 하오" 하였다.
이와같이 왕이 3일간을 머물러 국정을 만행사에서 살피고 돌아갔다 하여 이로부터 사찰 이름을 귀정사(歸政寺)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왕은 그의 설법에 깊이 감동한 나머지 "生之 殺之를 我師 同之하리라"며 탄성을 발했는데 이 말은 "죽고 살기를 스님과 더불어 같이 한다" 는 뜻이 되니 왕이 고승의 설법에 얼마나 탄복하였는지 그 정상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절이 왕의 3일간 행재소가 되니 주위의 산 이름과 지명도 따라 바뀌었다고 한다. 과거의 만행산을 천황봉(天皇峰)이라 하고 그 밑에 좌우 여러 줄기 봉우리를 태자봉(太子峰), 남대문로(南大門路 : 보절면으로 넘어가는 길), 둔병치(屯兵峙 : 보절면 가는 고개)가 있고, 또 대상리(大上里)에서 산동면 소재지로 가는 중간에 당동(唐洞)과 요동(堯洞)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것은 3일간의 귀정사 왕정이 요순시절과 같이 살기 좋았다 하여 이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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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純祖)때 노현일(盧玄一)대사가 지은 대웅전을 훗날 주지 배정순(裵正順) 스님이 보수하려 할 때이다.
상량나무 벽 틈새에서 색다른 종이가 나왔다. 그 종이를 끄집어 밝은 곳으로 가져와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쓰여져 있었다.
"귀정사 경내 여러 불전을 새로 세울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재목을 대웅전 안에 저장하였으며 또 여러 불전 지붕을 덮고도 남을만큼 넉넉한 기와가 사찰 경내에 숨겨져 있으니 후래 주지는 이를 찾아 모든 불전(佛殿)을 골고루 갖추어 세우라"하는 것이다.
배정순 주지는 신기한 나머지 그 기록에 따라 대웅전 천정 위를 올라가 살피니, 과연 그곳엔 크고 작은 목재가 빽빽하게 쌓여 있는데 더욱 놀라운 일은 단청도 말끔히 되어 있고 토끼, 사자, 연꽃, 봉황새, 용틀 따위도 곱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가져다 맞추기만 하면 훌륭한 절이 금새 될 만 하다.
그는 다시 천정에서 내려와 마루장 밑을 살피니 이곳에도 크고 작은 목재가 빈틈없이 저장되어 있는데 습기가 올라와 삭아서 재목이 힘이 없다. 천정위의 것은 금새 다듬어 놓은 것처럼 싱싱한데 마루 밑에 있는 것은 풍화작용을 입어 폐물이 되었다.
백정순 주지는 신기한 소식을 널리 알리기 의해 마을안 서당에 말을 퍼뜨렸더니 구경꾼들이 밀리기 시작하였다. 귀정사는 6.25 동란때 작전상의 필요에 따라 유엔군이 불태웠는데, 순조때 노현일 대사가 남겨놓은 재목은 써보지도 못한채 다 타졌으니 사람들은 참으로 아까운 일이라 섭섭해 마지 않았다. 재목은 대웅전 천정안에 있으므로 쉽게 발견하였으나 경내에 숨겨 놓았다는 기와는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배정순 주지는 물론이요, 그 후임 조희명(曺喜明)와 유남파(柳南坡) 주지 등도 이 기와를 찾으려 애태웠으나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만행산 사찰 경내 땅 속을 뒤지기 전에는 알 도리가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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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오래 묵히면 벌레가 갉아 먹어 벌레 집이 생긴다. 밥을 짓기 위해 이런 쌀을 씻으면 벌레먹은 쌀인지라 대부분 떠 내려가고 또 쌀을 씻은 허연 뜸물은 냇물을 덮어 10리밖 요천강까지 허옇게 물들었다.
귀정사 승려들은 돈도 흔하였다. 돈꾸러미가 집단만치 쌓여 이 역시 처치난 이었다. 쇠붙이는 만지지 않고 오래 두면 녹슬기 마련이다. 몇 10년 몇 100년을 손 한 번 대지 않고 쌓아 놓으니 모처럼 이 돈을 쓰려고 끄집어 내 보면 엽전 겉에 슬은 녹이 돈보다 두껍다. 그러므로 귀정사에서 나온 돈은 녹이 슬어 받아 갈 사람이 없다.
그러니 승려들은 묵은쌀 먹기와 녹슬은 돈 쓰기에 진저리가 날밖에 없었다., 녹쓴 돈은 쓰지 않으면 그만이나 쌀은 버릴 수 없어 끼니마다 먹어야 하니 고통이 여간 아니다.
그들은 이 일로 해서 모이면 한숨이다. "우리는 언제 새 쌀을 먹어 보고 죽을까?" "지금 먹고 있는게 10년전 쌀이라니 올해 거둔 쌀은 10년이나 뒤에 먹어야 하지 않아, 그러니 새 쌀을 먹고 죽기란 엄두도 내지 못하거야." "묵은 쌀은 이제 질렸어. 꼴키한 냄새, 쌀이 뜬 냄새.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가 나." "아마 나는 이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묵은 쌀 먹기 싫어 딴 절로 가야할까봐." 승려들이 이렇게 한 마디씩 한숨 지어 말할 때 어느날 낯선 도사님이 나타나신다.
"듣거라. 너희들이 묵은 쌀을 먹지 않고 새 쌀을 먹으려면 아주 쉬운 일이 있느니라. 대웅전을 뜰 아래로 한 단만 내려 지으면 새 쌀을 먹게 되고 새 돈을 쓰게 될 것이니라."
이렇게 말하고 도사님은 사라졌다. 승려들은 도사님의 말씀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들은 다 같이 일어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합장하였다.
대웅전을 뜰 아래 내려 지으면 새 쌀을 먹게 된다는 바람에 그들은 신이 난 것이다. 총동원하여 목수를 들이 댄다, 도편수를 드리 댄다 하여 부랴부랴 대웅전을 옮겨 지었다. 대웅전을 옮긴 뒤는 어떻게 되었는가?
과연 신기하기 짝이 없다. 몇 년이 지내노라니 묵은 쌀은 차츰 줄어지고 이제는 완전히 새 쌀을 먹게 되었으며 돈은 누구에게 도둑을 맞음도 아니요, 어느 누가 낭비를 함도 아닌데 차츰 줄어져 이제는 오히려 쌀도 딸리고 용돈도 궁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에 따라 6.25사변에 소각된 절을 지금의 주지 유남파가 새로 지을 때 옛날처럼 묵은 쌀을 먹기가 싫을만치 이 절이 다시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荑【? 대웅전을 본래의 자리로 올러 짓고 도사의 말에 따라 한 단 내려진 자리는 지금 뜰과 정원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전설의 영화(榮華)는 이뤄지지 않았다 고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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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면 중절리(中節理)와 운봉읍 권포리(權布理) 사이에 고남산(古南山)이 있다. 높이 856m이며 남원시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운봉 여원재 서쪽 끝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곧 이 산이다. 사람들은 이 산을 태조봉(太祖峰)이라고도 하는데 태조봉이라 부르는데 까닭이 있다.
고려말 우왕(禑王) 6년(1380) 인월리에 본 진을 치고 약탈, 살인, 방화를 서슴치 않으며 장차 공주를 거쳐 서울 한양으로 쳐들어 갈 것이라 호연 장담하는 왜구(倭寇)의 병력은 2천명을 넘었다. 그 우두머리는 아지발도(阿只拔都:18세)인 바 그에게는 알 수 없는 괴력이 있었다.
"자! 이 아지발도를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그 놈은 쇠로 생겨 활을 맞아도 죽지를 않고 몸에 맞은 화살이 튕기져 나온다지". 이런 말이 유포되니 아지발도의 말만 들어도 무서워 떤다.
아닌게 아니라 이제 18세 밖에 되지 않지만 몸이 어찌나 크고 힘이 장사인지 한끼니 밥을 한 말 밥을 먹고, 백근짜리 도야지를 혼자 거뜬히 먹어 치운다.기운이 넘쳐 갑옷을 쇠로 만들어 얼굴만 살이지 온 몸을 철판으로 감았다. 말하자면 쇠옷을 입은 것이다. 그러니 싸움터를 달리되 무서울 것이 없다.
이 때 조정에서도 날마다 묘책을 강구하느라 중신들 회의를 하지만 뽀족한 대책이 서지 않는다. 어느 중신이 이성계 장군을 추천하였다. 장군은 원래 함경도 출신으로 여진족을 대항하느라 무술을 익혀 이제는 천하 제일의 명궁이다.
그 뿐 아니라 여진족의 대장 퉁두란(董豆蘭)이 수하를 이끌고 이성계장군에 굴복했는데 퉁두란의 활솜씨는 신묘하였다. 이제 이장군의 명궁에다 퉁두란의 활솜씨가 하나가 되었으니 고려말 이 두 장군의 활은 신궁(神弓)이라 할만치 위력이 있었다.
이러한 이성계장군이 추천이 되니 우왕도 저윽이 마음을 놓고 곧 이장군에 정왜원수(征倭元帥)를 임명하여 남원으로 출정을 명하였다.
이성계장군은 변안렬(邊安烈)을 참모로 삼고 퉁두란을 아장으로 삼아 한양을 출발, 전주 한벽당에 잠시 들려 쉬었다가 대오를 정비하여 쏜살같이 남원에 도달하였다.
이 때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하게 뽀죽하다. 그래서 이곳에 올라 산신제를 올려 우선 천지신명께 전승을 기원한 것이다. 제단을 쌓아 경내를 신성하게 하고, 창덕암(昌德庵) 약수터에 목욕재계 한 다음, 고남산 제단에 올라 3일간 산신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장군은 황산에서 아지발도를 사살하는데 성공하였으니 어쩌면 고남산 산신제때 어떤 계시를 받았음이 아닐런지?
아지발도는 왜국을 출발할 때 애인이 있었단다. 그 애인은 출전하는 아지발도의 옷자락을 붙들고 하는 말이"장군님의 이번 출정은 대단히 불길하오니 다음 기회로 미루소서. 조선에 가면 황산이란 곳이 있는데 그 곳 산신이 크게 노하고 계십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던 아지발도는 "요망한 계집이로고! 장부의 앞길을 불길하다니 네가 필연코 황산 산신의 화신이 아니냐"? 하며 단칼로 목을 베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애매한 목숨을 죽인 죄값을 황산에서 받은 것이라 하였다. 뒷 사람들이 고남산 정상을 태조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이런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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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면 목동리(山東面 木洞里)에 있는 노거수(老巨樹)인 은행나무는 나무 높이가 약 30m이고 밑 둘레가 230cm나 되는 큰 나무이다.
이 나무는 목동 마을이 생긴지 100여년 후에 마을의 상징과 수호수로서 마을 어구에 심어 놓은 것이 오늘에 이르렀는데 수령은 300여년 쯤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편 해마다 이 나무에서 수확하는 은행 열매는 마을 자산으로 활용되어, 마을 사람들의 협동심 양양에 큰 몫을 하고 있으며, 또 마을 안에서 관혼상제가 있을때는 이 나무에서 수확한 은행을 이용해야 좋다하여 집집마다 은행을 한움큼씩 보관하고 있다가 애경사가 닥칠때면 정성껏 잔칫상이나 제사상에 올려 놓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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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련사(勝連寺)가 서 있었다는 만행산(萬行山)은 산동면과 보절면의 경계에 있어 그 뿌리는 멀리 무주(茂朱)의 덕유산(德裕山)에 있다.
덕유산(德裕山)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장수(長水)에 이르러 두 갈래로 갈라지니 한가닥은 동남쪽으로 뻗어 지리산(智異山) 줄기를 이룩하고 다른 한가닥은 서남편으로 뻗어 만행산이 되었다. | |
이 만행산이 또다시 남으로 뻗어 나즈막한 백공산(百工山)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지금 용성고등학교가 서 있는 산줄기이다. 이곳에 있었다는 승련사(勝連寺)의 옛 이름은 금강사(金剛寺)라 하였다. 비록 규모는 적었으나 이 절에는 홍혜국사(弘蕙國師) 등 고려시대의 이름난 고승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이 절이 처음 세워진 년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고려말 홍혜국사는 이 절을 크게 확장하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니 그 뒤를 이어 대선사 졸암(拙庵)이 주지가 되었다. 그는 일찌기 조계종의 깊은 뜻을 얻어 홍혜국사를 보좌하고 있다가 스승이 입적하니 여러사람들은 그를 받들어 금강사(金剛寺)의 주지를 삼았다. 졸암(拙庵)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먼저 사찰의 대확장 공사를 착수하였다. 그러나 본래 재력의 여유가 없어 충숙왕 12년(서기 1325년) 공사를 시작하여 공민왕(恭愍王) 10년(서기 1361) 봄 준공하니 실로 전후 36년이란 긴 세월이 소요된 것이다.
졸암은 공사를 마친후 사찰 이름을 승련사(勝連寺)라 고쳤으니 이때 그 규모는 불당(佛堂), 선당(禪堂), 빈객실(貧客室), 창고(倉庫)등 무려 110칸에 이르렀다 하며 승려수는 2백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산동면 식련리(植蓮里)는 승련사의 연꽃을 갖다 심고 마을 이름을 식련이라 불렀으니 이 마을은 승련사의 승려들이 거래하던 사찰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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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공민왕 시절에 '금강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이 망하고 90년도에 다시 절을 복원하였는데, 바로 '승련사'가 그것이며 이 절의 둣산에 바위가 있다.
매우 크고 난잡하게 번져 있어 길이나 두께를 잴 수 없었던 것이 아쉽다. 이 바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내용의 유래가 있는데 어떤 것이 더 정확한 것인가는 기록되어 있는 문헌이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 |
먼저, 황종주 씨는 금송아지, 황새, 빈대가 나왔던 바위로 특히, 빈대가 나와서 절이 망했다는 소리도 있으며, 바위가 갈라질 때 금송아지가 튀어나갔다는 소리도 있다고 했다.
정한스님은 첫째, 승려들이 불도는 안 닦고 호위호식하여 바위가 갈라졌다는 내용이 있고, 둘째, 동네 사람들과 스님들이 사이가 좋지 않아 바위가 갈라졌다는 내용이 있으며, 셋째, 바위가 갈라질 때 새 3마리가 각각 창덕암, 귀정사, 청룡사로 날아 갔다는 내용이 있다고 했다. 정확한 바위의 명칭도 아는 사람이 없어 알 수가 없었다. (황종주, 남), (정한스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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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식련마을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모시는데, 새마을 사업 이전까지는 모든 격식을 갖추어 지냈으나 그 이후로 많이 간소해졌다 한다.
마을 앞편에 할아버지 당산이 있고, 마을 안쪽에 할머니 당산이 위치하고 있는데 음력 정월 초사흘날 새벽 3시 정도에 할아버지 당산에서 제사를 지낸 후, 다시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다른 마을과는 달리 새벽 일찍 제를 지내는 이유는 궂은 일을 한 사람들이 올까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 |
목적은 역시 마을의 평안이었고, 제가 끝나면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놀고 먹으며 즐기는 정도라 한다. 제관은 특별한 절차로 선정하지 않고 주로 이장이 하게 되는데, 일단 제관으로 선정이 되면 싸움을 하면 안되며, 싸움하는 곳에 가서도 안된다.
또, 시장에 가서 직접 장을 봐야 하는데, 매우 조심히 장을 봐야 한다. 가령, 음식을 살 때, 가격을 깎으면 절대 아니된다. 음식은 건어물과 과일을 꼭 올려놓아야 하며, 생선은 절대 올려놓지 않았고 비용은 마을 경비로 충당했다 한다.
할아버지 당산나무는 둘레가 374cm이고 그 앞에는 가로 92cm, 세로 61cm,높이 18cm인 제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할머니 당산나무는 들레가 460cm이고 제단은 있지 않았으며 두 그루 전부 느티나무였다. (황종주, 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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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는 새마을 사업이후로 쭉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위치한 소나무가 당산나무인데 옛날에는 정월 초하루날 저녁 7시가 넘어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음식은 당산나무 근처에서 직접 준비하여 마련하였고 그 비용은 부락의 공동자금에서 충당하였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 전, 그믐날부터 당산 근처에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줄을 쳐 놓았고 제가 끝나도 깨끗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당산 근처에 갈수 없었다 한다. | |
예전에 이 마을에 유식한 학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과 이장이 주로 제관이 제를 지낼 때는 마을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굿을 쳤다고 했다. 당산나무의 들레는 173cm이다. (김경철, 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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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는 1980년대 부터 지내지 않는다. 옛날에는 아들 못낳는 사람들이 주도를 하여 많이 모셨는데 지금은 미신이라 생각하여 아무도 모시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마을뒤에 위치한 당산나무에서 정월 초사흘날 새벽 1시쯤에 부락의 평안을 비는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제가 끝나면 서로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고, 다음날 아침에는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겼다고 한다. 제관은 깨끗한 사람이 해야했고, 집 앞에는 금줄을 치고 제의 3일 전부터는 찬물에 목욕을 해야 했다. | |
음식을 마른음식만 올려야 했고 돼지머리도 올렸으나, 생선은 절대 안되었다고 한다. 이 비용은 마을 부락 논에서 충당하였다. 당산나무의 둘레는490cm이고 약 500년 이상된 나무이다. (이두영, 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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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당산제를 지낸다. 그런데 독특한 사실은 당산나무에서가 아니라 마을 뒷산에 위치한 작은 무덤에서 제를 지낸다는 것이다. '할매당산'이라 불리우는 그 무덤에서 매월 음력 정월 초이튿날 오전 11시에 제를 지낸다. 음식은 과일, 돼지머리 등 보통 제삿상과 유사하다. 목적은 역시 부락의 평안이며, 제가 끝나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음식을 먹고 함께 즐긴다. 제관은 마을에서 최고령자인 노인이 하게 되며, 일단 제관으로 선정이 되면 굿은 곳엔 가지 못하며, 집주변에 금줄을 쳐 놓는다. | |
이때,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도 늘 깨끗이 목욕을 하고 있어야 하며 제를 모실 때는 ?M은 일을 당하지 않은 깨끗한 사람만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최영수, 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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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는 갓바위라는 것이 있다. 옛날에 우리나라의 유명한 풍수가이며 조선 조 정조와 순조때 전라감사였던 이서구가 갓바위를 보며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간 적이 있다 한다.
그 이유는, 그 바위가 마을에 '천비(못된 기생)'를 나게 하는 것이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후에, 그 마을에서 실제로 요사스러운 기생이 한 명 나왔다 한다. | |
그 기생은 노름판에서 옷을 풀어 헤치고 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노름에 가산을 탕진하여, 결국 기생은 3백석의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소위 '비천석'이라 하며 천시하게 되었다. (최영수, 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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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는 간소하나마 지금도 해마다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입구에 위치한 당산나무에 7월7일이 되면 간단하게 음식을 차려서 간소하게 제를 지낸다. 특별한 행사는 하지 않고 그저 마을사람들이 함께 먹고 즐기는 정도이다. 제관은 주로 마을에서 제일 어른인 분이 하게 되며 특별한 금기사항은 없다고 한다. 축문도 읽지 않는다고 하니 꽤 간소화되긴 된듯하다. 당산나무는 귀목나무라서 둘레는 305cm이고 나이는 약 500년이 넘는다.(소경석, 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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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마을은 나무가 많아 지어진 이름이고 맨 처음 부안 김씨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는데, 6.25전후에 없어졌다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 모두 지금은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고, 그저 '지냈다'는 말만 듣은 정도라 하여 조사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당산나무는 300년이 지난 팽나무로서 여전히 마을중앙과 마을입구에 각각 한그루씩 위치하고 있었다. 사실 이 당산나무는 원래 더 많았는데, 왜정때 거의 잘리고 지금의 두 그루만 남았던 것이다. | |
마을중앙에 위치한 당산나무의 둘레는 295m이고 마을입구에 위치한 당산나무의 둘레는 193cm이다. 구 당시에 당산제는 정월 보름날, 저녁 9시 이후일 것이라고 기억하고 있었으며, 축문의 내용은 동네의 평안을 비는 것이었다. 제관은 주로 동네 이장이 했던 것 같고, 중요한 음식은 과실이나 돼지머리를 올렸으며 생선은 절대로 금지하였다. 이의 비용은 마을 공동자금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또, 궂은 일 있는 사람은 제사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위의 내용은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고 단지 가물가물한 기억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김기철, 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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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는 한국동란전 까지는 정식으로 지냈는데 그 이후로는 많이 간소화되어 지금은 간단하게 지낸다고 한다.
제사는 특별한 날을 미리 정해놓는 것이 아니라 백중(7월15일)때나 추석때 좋은 날을 선정하여 지낸다. 제관은 부락에서 제일 깨끗한 사람이 하고 특별한 금기사항은 있지 않다. | |
음식은 전이나 떡, 과일 등을 올리는데, 그 때에 따라서 계절에 맞는 좋은 음식물을 올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한다.
결국, 이 마을에서는 특별한 절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날을 정하여 일이 끝나면 농악하고 음식먹으며 간단히 제를 제를 것이다 당산나무는 마을안쪽과 마을입구에 각각 한그루씩 있는데 안쪽에 위치한 나무는 둘레가 495cm이고 약 400년 이상이 되었으며 입구에 위치한 나무는 둘레가 353cm이고 약 300년이 되었다.
이 두그루는 모두 느티나무이다. (박영근, 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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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마을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지내고 있다. 마을의 중간에 위치한 느티나무를 당산나무로 하여 음력 3월 삼짓날(태평의 농기를 만드는 생일날) 오전 9시에서 10시경에 제를 지낸다.
음식은 마을에서 공동재산이나 공동전답으로 주과포를 장만하며, 제의 목적은 동네의 평안이라 한다. 옛날에는 자식이 없는 집에서 논을 동답으로 내어 놓아 자신들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고 한다. | |
지금도 제가 끝나면 음식을 나눠먹고 농악을 치며 함께 즐긴다고 하였다. 제관은 노인층에서 제일 깨끗한 분이 선정되게 되는데, 늘 목욕재계하여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 축문은 옛날에는 읽었지만 요즘은 읽지 않는다고 한다.
당산나무는 원래 큰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6.25때 없어지고 그 대신 한 그루를 다시 심은 것이라 한다. 그 둘레는 262cm이고 약 100여년정도 되었다. (조용정, 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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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구마을은 88고속도로로 당산나무가 없어진 후로 당산제가 사라졌다 한다. 옛날에는 정월 초하루 오전 10시에 제를 지냈고, 음식물은 일반제사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제가 끝나면 굿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음식도 먹고 즐겼다고 한다. 제관은 주로 동네 어른들이 맡아 하였고 일단 제관으로 선정이 되면 궂은 곳엔 가면 안되었고 외출도 될수록이면 삼가야 했다고 한다. (이동수, 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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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는 1990년대부터 당산제를 지내지 않는다. 당산나무는 원래 4∼5그루였는데 한국동란때 없어지고, 그 후 다시 2그루를 마을입구에 심었다고 한다.
예전에 제는 음력 2월 영등제로 지냈으며 부락의 평안을 위한 것이었다. 음식은 과일이나 술 등을 정숙하게 올렸고, 제의 시작과 끝난 후에 굿을 했는데 '들당산'이라 하여 당산제가 시작되기 전 마을밖에서 굿을 한바탕 하고 제가 끝나면 '날당산'이라 하여 당산나무 근처에서 굿을 하는 것으로 행사가 끝났다고 한다. | |
제관은 당연히 궂은일이 없고 깨끗한 사람이 담당했다고 한다. 느티나무로서 왼쪽의 것은 둘레가 150cm이고 오른쪽의 것은 둘레가 170cm이다. (박복문, 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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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데, 정월 초이튿날 밤 9시가 넘어서 제를 지낸다. 원래의 당산나무는 죽어서 없어지고, 다른 나무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데 지금의 그 나무가 마을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은 역시 마을의 평안이며, 음식내용은 다른 보통의 제사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음식준비에 필요한 경비는 동네공동자금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제가 끝나면 조용히 마을회관으로 들어와 간단히 함께 먹고 즐기는 정도로 행사가 끝이 난다. | |
제관은 착실한 사람이면 누구든 될 수 있고, 일단 제관으로 선정이 되면 3일간 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제관의 집에는 금줄을 쳐 놓는다. 또, 매일 저녁에는 목욕을 해야만 한다, 제를 지낼 때는 제관과 몸이 깨끗한 사람들만 제를 지내게 된다.
당산나무인 정자나무는 둘레가 287cm이고 나이는 약 100년 이상이 되었다. (이종문, 남) | | |
첫댓글 이곡 (배실)도 있는데 빠지셨네요 ~~
배실 있어요 배나무가 많앗던곳 이곡 아니나요?
청춘님 ....그게아니고요 우리배실에도 정자나무 그늘도 있는데 위에는 빠져 잖아요 ...전 그걸 야기하는 거예요
옛날에 귀정사 한번 가본가는게 못가보아서 아쉬웠는데 귀정사 내력에 대해서 잘 읽어 보았읍니다. 우리마을 에서는 참남젱이 마을로 해서 귀정사를 가야 했는데 대상마을 에 있나요?
귀정사 내력 정말인지는 몰라도 흥미롭습니다. 흥미롭게 잘읽어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