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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알렉산드르 푸시킨
대본 차이콥스키 & 콘스탄틴 실롭스키
초연 1881년 1월 23일 볼쇼이 극장
<2023 브뤼셀 라 모네 극장 / 148분 / 한글자막>
라 모네 심포니 오케스트라 & 합창단 연주 / 알랭 알튀놀리 지휘 / 로랑 펠리 연출
예프게니 오네긴.....모스크바에서 온 젊은 귀족.....스테판 드구(바리톤)
타티아나...............라리나 집안의 큰 딸..............샐리 매튜스(소프라노)
렌스키..................시인, 올가의 약혼자..............보고단 볼코프(테너)
올가.....................타티아나의 동생...................릴리 외르스타트(메조소프라노)
그레민 공작...........모스크바의 귀족 상이용사......니콜라 쿠르잘(베이스)
라리나 부인...........타티아나, 올가의 엄마...........베르나데타 그라비아스(메조소프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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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차이콥스키,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2023년 브뤼셀 라 모네 극장 실황
러시아 감성으로 충만한 최고의 멜로오페라에서도 빛나는 로랑 펠리의 연출력
연극연출가로 출발한 로랑 펠리(1962~)는 1997년부터 오페라에도 진출해 특히 희가극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어왔다. 하지만 진지한 오페라도 마다하지 않더니 2023년 벨기에 라 모네 극장의 <예브게니 오네긴>에서는 특유의 잔재미와 풍자 대신 간결하고 상징적인 무대와 섬세한 해석을 불어넣었다. 덕분에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명작으로부터 그 숨은 매력까지 이끌어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두 주역가수는 이 오페라에 처음 출연인데, 2022년 인터내셔널 오페라 어워즈 남성가수상 수상자인 스테판 드구는 냉랭한 오네긴에 따뜻한 감성을, 영국 소프라노 샐리 매튜스는 어둡고도 풍요로운 음성으로 타치아나의 내면을 파고든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떠오른 알랭 알튀놀리의 빼어난 해석, 모든 조역들의 호연도 갈채를 받을만하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푸쉬킨의 운문소설이 원작이다. 배경은 19세기 초반 러시아의 한적한 시골 장원(1,2막)과 6년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교장(3막)이다. 타치아나와 올가는 시골 영주의 딸들인데 올가의 연인 렌스키가 도시에서 온 오네긴을 데리고 인사를 온다. 타치아나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세련된 오네긴에게 첫 눈에 반한다. 하지만 오네긴은 밤새 쓴 타치아나의 편지를 외면하고, 그녀의 명명축일 파티에서 올가를 유혹해 렌스키를 자극한다. 결국 오네긴은 원하지 않은 결투에서 렌스키를 죽이고 6년간 해외를 떠돌다가 귀국하는데, 전쟁영웅 그레민 공작의 무도회에서 타치아나가 그 아내가 된 것을 발견한다. 이번엔 오네긴의 연심이 불타오르는데... 렌스키처럼 원작자 푸쉬킨도 연적과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오프닝에서부터 3막의 마지막까지 차이콥스키 특유의 서정적 선율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중에서도 '편지의 장면'이라고 불리는 1막 2장의 타치아나의 긴 아리아, 2막 1장의 왈츠, 2막 2장에서 결투를 앞둔 렌스키의 아리아, 3막 1장의 폴로네이즈, 아내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그레민 공작의 아리아 등은 한번만 경험해도 잊을 수 없는 명선율, 명장면이다. 차이콥스키 인생 역시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작곡할 당시 안토니나 밀류코바라는 옛 제자의 구애 편지를 받았는데, 오페라 속에서 거절당한 여인의 심리적 격통을 떠올리면서 마음이 흔들렸고, 자신의 동성애에 대한 소문을 잠재우고자 제자인 그녀와 결혼까지 하지만 결국 큰 실수로 귀결되고 말았다.
스테판 드구(1975-)는 현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바리톤이다. 가수들의 개성을 느끼기 힘들다는 바리톤 음역에서 아주 독보적인 음색을 갖고 있는데, 그 따스함이 주는 감동은 특히 프랑스 음악에 잘 어울린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그의 첫 러시아 오페라 도전이었지만 우려와 달리 오네긴의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절찬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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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2013 뉴욕 메트 실황 내지 해설 / Thomas May / 황진규 번역>
1막
가을. 라린 가문의 영지에 사는 과부 라리나 마님은 결혼하기 전 시절을 되돌아본다. 당시 그녀는 나중에 남편이 된 사람에게 청혼을 받았지만 실제로 사랑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소작농들이 농지에서 돌아와 춤과 노래로 수확을 기뻐한다. 라리나 마님의 딸 올가는 잔치에 끼려 하지 않는 언니 타니아나를 놀려댄다. 타티아나는 자기가 읽는 낭만적인 소설들이 더 좋다고 말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올가의 구혼자인 시인 렌스키가 불시에 친구 예프게니 오네긴과 함께 도착한다. 오네긴은 타티아나에게 궁벽한 시골에서 어떻게 지루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우아하고 잘생긴 낯선 이의 질문에 댱황한 타티아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기만 한다.
밤에 타티아나는 자기 침실에서 유모인 필리프예브나에게 첫사랑과 결혼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하고 온 밤을 새워 오네긴에게 열정적인 편지를 쓴다. 아침이 되자 그녀는 편지를 필리프예브나에게 내주면서 그녀의 손자에게 편지를 전달하도록 이르라고 지시한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의 응답을 기다린다. 그는 타티아나의 편지에 감동받았다고 시인하면서도 자신이 머잖아 결혼 생활에 싫증을 내게 될 것이며 오로지 우정만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다른 남자가 그녀의 순진함을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감정을 절제할 줄 알라고 충고한다.
2막
이듬해 1월. 라린 가문 영지에서는 타티아나의 명명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한창이다. 렌스키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사실 때문에 짜증이 난 오네긴은 올가와 춤을 추면서 시시덕거림으로써 복수한다. 타티아나의 프랑스어 선생인 트리케 씨는 타티아나에게 그녀를 기리는 노래를 들려준다. 춤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렌스키는 질투심이 극도에 달한 나머지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파티는 파한다.
렌스키는 새벽에 지정된 장소로 나와 오네긴을 기다린다. 그는 자신의 짧은 삶과 시, 올가에 대한 사랑을 돌이켜본다. 렌스키 측 입회인이 뒤늦게 도착한 오네긴과, 다소 무례한 방식으로선정된 오네긴 측 입회인을 알아본다. 렌스키와 오네긴 모두 후회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채 자신들이 무의미한 결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누구도 결투를 그만두려 하지 않는다. 오네긴이 렌스키를 죽인다.
3막
몇 년 뒤, 상트 페테르부르크. 오네긴은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삶에 무료함을 느낀다. 무도회장에 온 그는 우아하게 차려입은 타티아나를 발견하고, 무도회 주최자인 그레민 공작이 그녀를 자기 아내라고 소개하자 충격을 받는다. 공작은 2년 전에 타티아나와 결혼했다고 설명하고 그녀가 자신의 삶을 구원했다고 이야기한다. 타티아나는 몇 마디 정중한 대화를 나눈 뒤 양해를 구하고 퇴장한다. 오네긴은 불현듯 자신이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다.
오네긴은 타티아나에게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오네긴은 타티아나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간청한다. 그녀는 자제심을 잃지 않은 채로 이제는 재산과 지위 때문에 자신을 바라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오네긴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남편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하고 나가버린다. 오네긴은 혼자 남는다.
=== 작품 해설 === <다음 클래식 백과 / 이진경 글>
예브게니 오네긴 Op.24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
차이콥스키가 남긴 10편의 오페라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차이콥스키 특유의 멜랑콜리한 선율과 극적인 오케스트라가 매력인 작품이다.
서정적인 장면: 내적 세계의 표현
가장 사랑받는 러시아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음악극으로 바꾸는 것은 콘트랄토(contralto, 알토) 라브로프스카야의 제안이었다. 그 제안에 코스탄틴 실로프스키를 찾아간 차이콥스키는 이 대단한 작품을 음악극으로 구성하자고 설득하였고 마침내 두 사람은 대본 작업에 착수하였다. 대본은 푸시킨의 운문을 거의 대부분 유지하였다. 푸시킨의 소설이 진부한 내용을 담고 있긴 해도 언어의 화려함, 사회 비판, 완벽한 묘사, 미묘하면서도 세밀한 인물화가 우수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를 잘 인식했던 차이콥스키는 리얼리즘의 걸작으로 만들어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차이콥스키 스스로는 이 작품을 오페라라기보다는 ‘서정적인 장면’으로 불렀다. 작품 자체도 무대 연출이나 동적인 장면보다는 심리 묘사나 주인공들의 내적 세계를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여주인공 타치아나의 편지장면과 젊은 시인의 결투 장면 등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한 여인의 순수한 사랑
〈예브게니 오네긴〉의 줄거리는 가볍고 진부하며 또한 단순하다. 이야기는 한 시골 처녀가 대도시에서 온 젊은 남자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골 영주의 집에 올가의 약혼자 렌스키가 방문하면서 그의 친구 오네긴을 소개한다. 오네긴을 본 타치아나는 오네긴 생각으로 잠 못 이루고 결국 그녀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오네긴은 타치아나에게 손님에게 그런 식의 편지를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설교한다. 또한 자신은 남편감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하며 냉정하게 그녀를 뿌리친다.
타치아나의 영명축일에 파티에 온 손님들이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을 들은 오네긴은 이런 저급한 파티에 자신을 데려온 렌스키에게 화가 나 일부러 렌스키의 약혼녀인 올가와 춤을 춘다. 이에 화가 난 렌스키는 결국 격렬한 논쟁 끝에 결투를 신청한다. 이 결투는 렌스키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 불행한 사건으로 오네긴은 외국을 방랑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오네긴은 귀국하게 되고 그레민 공작과 결혼한 타치아나와 재회하게 된다. 오네긴은 사교계의 여왕이 된 타치아나에게 반한다. 타치아나 역시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오네긴에게 마음이 흔들리지만 결국 그의 구애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불행을 딛고 완성한 작품
차이콥스키는 타치아나의 편지 장면으로 작곡을 시작하였다. 이 장면은 제자 안토니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결혼에 이르게까지 해준다. 작곡가는 첫 4개의 장면을 실로프스키의 국가 사유지에서 6월에 작곡하였다. 그리고 작곡가의 결혼과 파국이 벌어진다. 이는 작곡가의 생에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작곡가를 괴롭힌다. 이후 서유럽에서 휴식을 보낸 차이콥스키는 4번 교향곡 착수 후 다시 오네긴을 작곡하기에 이른다. 1막은 10월 말에 풀 스코어로, 1878년 1월 25일에는 오페라의 전체가 완성되었지만 2막 2장의 장면은 제외되었다. 마지막 성악 음악은 이탈리아에서 작곡하였고, 전체 작품은 2월 1일에 완성하였다. 개인의 불행에도 작곡가가 〈예브게니 오네긴〉을 작곡하는 데는 총 8개월의 짧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러시아적 정서를 담아내다
오페라 자체는 서양 본고장의 화성과 오케스트레이션, 오페라의 형식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2막 왈츠 장면은 독창과 합창의 절묘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의 무도회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여기에 러시아 정서를 담아내었다. 1막 시작 부분의 농부들의 노래가 대표적인데, 러시아 민족의 투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정서가 담겨 있다. 또한 주인공들의 독창에서는 차이콥스키 개인 정서를 표현하는 섬세하고 센티멘탈한 면모에 러시아적 색채를 담아내고 있다.
1막 2장 타치아나의 아리아. 편지 장면 ‘이걸로 끝이라 해도’(Puskai pogibnu ya)
차이콥스키는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이 편지 장면을 가장 먼저 작곡하였다고 한다. 사실 작곡가에게 있어 이 편지 장면은 주인공인 타치아나에게 상당히 강하게 동조를 하였으며, 오네긴에게 분개하고 있었다. 이는 그의 제자 안토니나의 편지에 대해 답장을 쓰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이 기억났기 때문일 것이다. 작곡가는 5월 16일 안토니나에게 두 번째 편지를 받았고 이 편지 장면 작곡에 착수한 것도 편지 도착 2주 후의 일이었다고 한다.
타치아나의 편지 장면은 이 오페라에서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장면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의 하나이다. 대사는 원작 소설과 거의 같다. 작곡가는 타치아나의 심리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세 개의 뚜렷한 선율을 통하여, 사랑 고백, 어린 시절의 추억과 궁금증 등을 나타낸다. 19세기 초 러시아 가정이나 주부 로망스의 관용적인 표현이라 일컬어지는 것보다 음정이 넓게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6도로 가득하다. 장면은 ‘이걸로 끝이라 해도’(Puskay pogibnu ya), ‘당신에게 씁니다’(Ya k vam pishu), ‘아니, 나의 마음을 드릴 자 그 밖에 없네’(Net, nikomu na svete ne otdala bï serdtsa ya!), ‘누구죠 - 나의 수호천사는?’(Kto tï: moy angel-li khranitel) 총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2막 2장 렌스키의 아리아 ‘어디로 가버렸나, 내 젊음의 찬란한 날들은’(Kuda, kuda, kuda vi udalilis)
오페라에서 편지 장면과 함께 내적 심리 묘사의 최고로 여겨지는 아리아이다. 오네긴과 약속한 결투 장소에 나타난 렌스키는 결투의 입회자 자레키와의 대화가 끝난 후 이 아리아를 부른다. 그는 올가에게 작별을 고하는데, 오네긴의 손에 죽을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가사의 내용은 자신의 무덤에 그녀가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상하로 움직이는 셋잇단음표가 그러한 렌스키의 슬픔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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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해설 === <2011년 12월 7일 네이버캐스트 / 이용숙 글>
명곡 명연주
차이콥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푸슈킨의 운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토대로 한 오페라
1879년 3월 17일 모스크바 말리 극장에서 초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알렉산데르 푸슈킨(Aleksandr Pushkin, 1799-1837)의 창작 가운데는 오페라로 새롭게 탄생한 작품이 여럿 있습니다.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 등의 오페라가 모두 푸슈킨의 서사시, 운문소설, 희곡 등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인 [예브게니 오네긴]은 러시아 최초의 본격 리얼리즘 소설로 불리는 푸슈킨의 동명(同名) 운문소설을 토대로 작곡가와 콘스탄틴 쉴로브스키가 함께 대본을 쓴 작품입니다.
푸슈킨의 원작소설은 제정 러시아 중류 귀족가문의 주인공 오네긴(러시아 식 발음은 ‘아녜긴’)이 죽음을 앞둔 부유한 친척 아저씨의 집에 와 유산상속을 기다리며 그의 병상을 지키는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도회지 생활에 익숙한 오네긴은 아저씨에게 상속 받은 시골의 저택에서 권태를 느끼다가 시인인 친구 렌스키의 소개로 동네 지주 집안의 두 딸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책에 빠져 사는 타치아나, 또 하나는 렌스키의 연인 올가입니다.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읽고, “푸슈킨은 러시아의 젊은이들을 대표하는 오네긴과 타치아나라는 두 전형을 창조했다”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사생활과 ‘편지 장면’
1879년 3월 17일 모스크바 말리 극장에서 초연한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의 오페라는 주인공 오네긴이 아닌 여자들의 장면으로 막을 엽니다. 지주 집안인 라린 가의 뜰에서 미망인 라리나(메조 소프라노)는 나이든 유모 필리피예브나(메조 소프라노)와 함께 일을 하며 두 딸 타치아나와 올가가 집안에서 부르는 사랑의 듀엣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노래를 듣고 라리나도 역시 옛 추억에 잠깁니다.
소작인들은 추수한 작물을 지주 라리나에게 가져와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소작인들이 가고 이웃에 사는 렌스키가 친구 예브게니 오네긴을 데리고 라린 저택에 찾아옵니다. 타치아나는 오네긴을 보자 첫눈에 반하고, 오네긴 역시 활달한 성격의 올가보다 사색적인 타치아나가 훨씬 낫다고 렌스키에게 말합니다. 올가와 렌스키가 자기들만의 시간을 갖는 동안 타치아나와 오네긴은 이야기를 나누죠.
타치아나는 이날 오네긴에게 격정적인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열에 들떠 밤새도록 씁니다. “이제까지의 제 인생은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을 뿐입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신가요? 교활한 유혹자인가요, 아니면 제 수호천사인가요? 제 운명을 이제 당신 손에 맡깁니다...” 아침이 오자 유모에게 부탁해 편지를 오네긴에게 전하게 하죠. 오네긴은 아침에 편지를 읽고 곧장 타치아나를 찾아오지만, 기대와 두려움에 차 있던 타치아나는 그의 냉정한 훈계를 듣게 됩니다. 자신은 결혼할 생각이 없으며, 처녀가 섣불리 남자에게 이런 편지를 쓰다가는 못된 남자에게 걸려 불행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얘기입니다. “스스로의 열정을 이성으로 다스리는 법을 배우셔야겠군요” 이런 오네긴의 말에 타치아나는 죽고 싶을 만큼 수치와 고통에 시달립니다.
한편, [예브게니 오네긴]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이 타치아나의 편지 장면은 차이콥스키의 사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요, 자신에게 편지로 열렬한 사랑을 고백한 모스크바 음악원 여제자 안토니아 밀류코바를 거부하지 못하고 그녀와 결혼한 것이 바로 그 중대사건입니다. 제자에게서 편지를 받은 시점이 마침 이 편지 장면을 작곡한 직후였고, 차이콥스키는 오네긴 같은 비정한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군요. 그러나 일찍부터 우울증에 시달렸고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심리적 고통이 더욱 과중했던 차이콥스키에게 문학적 환상에 기초한 이 결혼은 엄청난 재앙이 되었죠. 차이콥스키가 자살기도까지 한 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다고 합니다.
타치아나의 수치와 절망을 표현하던 비장한 음악이 화려한 선율로 바뀌면서 2막이 시작됩니다. 그녀의 영명축일 축하 무도회에 온 손님들이 떠들썩하게 잔치 분위기를 칭찬하죠. “세상에, 군악대까지 불렀잖아요! 정말 대단한 무도회군요!”라는 합창과 함께 경쾌하고 화려한 왈츠 선율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파티에 온 손님들이 외지에서 온 오네긴에 관한 뒷말(도박꾼, 바람둥이, 프리메이슨 회원)을 수근대자 오네긴은 이런 수준 낮은 파티에 자신을 데려온 렌스키에게 짜증이 나서, 일부러 올가를 유혹해 그녀와 계속 연인처럼 시시덕거리며 춤을 춥니다. 이에 분노한 렌스키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하죠.
결투 입회인 자레츠키가 기다리는 가운데 렌스키가 먼저 결투할 곳에 도착해, 이 세상과 올가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어디로 가버렸나, 내 찬란한 젊은 날은? 아침이면 다시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겠지만 나는 무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리라. 다만 올가, 그대만은 내 무덤에 찾아와 울어주겠지. 나 얼마나 그대를 사랑했던가. 무덤에서 언제까지나 그대를 기다리리라.’ 오네긴이 뒤늦게 나타나 두 사람은 결투를 벌이고, 렌스키는 스스로 예감했던 대로 오네긴의 총에 쓰러집니다. 이 장면은 훗날 자기 아내를 연모하던 남자와 결투를 벌여 서른 여덟의 나이로 죽게 되는 푸슈킨의 운명을 마치 예고한 듯합니다.
오네긴과 타치아나 - 러시아 젊은이의 전형
경솔한 행동으로 소중한 친구를 죽인 데 대한 자책감에 시달리던 오네긴은 넓은 세상을 떠돌다가 몇 해만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 그레민 공작 저택의 파티에 참석합니다. 이 장면에서 차이콥스키의 멋진 폴로네즈가 연주됩니다. 여기서 오네긴은 퇴역 장군 그레민 공작의 아내가 된 타치아나를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죠. 공작은 사기꾼과 아첨꾼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타치아나 같은 순수한 아내를 만나 참으로 행복하다는 내용의 노래, ‘사랑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 법’을 부릅니다. 철없는 시골처녀에서 성숙한 귀부인이 된 타치아나의 기품 있고 세련된 모습을 보자 오네긴은 갑자기 강렬한 회한과 열정에 사로잡혀 그녀에게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 뒤 오네긴은 타치아나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며 열정을 토로하고, 이곳을 떠나 함께 살자고 애원하죠. 그러나 타치아나는 이미 자신이 결혼한 사람임을 오네긴에게 상기시키면서, 남편에게 충실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자신도 여전히 오네긴을 사랑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타치아나는 방을 나가고 오네긴은 “이 치욕, 고통, 내 비참한 운명!”이라고 외치며 무대의 막이 내립니다.
사색적이고 진중하며 소박한 렌스키는 사실 타치아나와 통하는 유형이고, 가볍고 유머러스하며 향락적인 올가는 오네긴과 더 어울리는 성격입니다.그러나 렌스키는 자신이 갖지 못한 면을 지닌 올가에게 이끌리고, 타치아나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오네긴에게 빠져들죠. 오네긴은 방대한 분량의 독서로 머릿속에 위대한 사상들을 지니고 있으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좌절하여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결국 냉소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푸슈킨 시대의 나약한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들은 혁명정신을 실현하지 못하고 도박이나 주색에 빠지는 등, 결국 정치에 등을 돌리고 사회참여를 거부했습니다. 작가는 이런 오네긴에게 공감과 연민을 지니는 동시에 약간의 경멸과 혐오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푸슈킨의 원작에는 오네긴이 결투를 하고 떠난 뒤 타치아나가 오네긴 서재의 책들을 읽고 그의 사고방식과 인간성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들어 있습니다. 또 긴 여행 중에 겪은 오네긴의 체험담들도 들을 수 있죠.
오페라 [오네긴]이 음악은 탁월하지만 연극적 효과 면에서는 문제점이 많다는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지적에 대해 차이콥스키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 오페라의 무대효과가 빈약하다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무대효과’라는 것을 무시했습니다.” 애당초 차이콥스키는 이 오페라에 ‘서정적 장면들’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사건의 발전에 따른 극적 긴장의 고조 따위는 차이콥스키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베르디의 [아이다]나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같은 대규모 스펙터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다만 각 인물의 내면세계와 성장의 아픔, 그리고 회한을 그림처럼 고요히 펼쳐 보이려 했을 뿐입니다.
추천 음반 및 영상물 (오네긴-타치아나-렌스키 순)
음반] 토마스 알렌/미렐라 프레니/닐 쉬코프 등, 제임스 레바인 지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라이프치히 방송합창단, 1987년 녹음
[DVD] 마리우쉬 크비에첸/타티아나 모노가로바/안드레이 두나예프, 알렉산더 베데르니코프 지휘, 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드미트리 체르냐코프 연출, 2008년 파리 국립오페라극장 실황
[DVD]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르네 플레밍/라몬 바르가스 등,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로버트 카슨 연출, 2007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실황(한글자막)
[DVD] 베른트 바이클/테레사 쿠비야크/스튜어트 버로우즈 등, 게오르크 숄티 지휘,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존 올디스 합창단, 페트르 바이글 감독, 1988년(영화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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