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2월17일(금)■
(누가복음 22장)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묵상/눅 22:14-20)
◆ 유월절의 실체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룬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유월절은 출애굽시에 제정된 절기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았고, 그렇지 않은 집은 장자의 죽음이 임했다. 애굽인이든 유대인이든 가리지 않고 그 집 문설주에 피를 발랐느냐 아니냐로 생과 사가 갈렸다.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계속 기념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런데 사실은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것을 알리는 예표였고 그림자였다. 하나님께서는 무려 15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를 위해 죽으실 것을 암시하는 절기를 만들어놓으신 것이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유월절이 본래 말하려고 했던 그 실체를 이루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15)라고 하심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실 가장 큰 사명이 바로 이것이었음을 시사한다.
병자를 고치고, 배고픈 자에게 먹이시는 것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 사역이야말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다.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신다는 말씀은 이제 천 년이 넘도록 시행해온 유월절의 진짜 의미가 곧 성취될 것임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하루만 지나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진짜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실 것이다.
이제부터 성도들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 양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단 종파에서는 유월절 날짜를 제대로 알고 지켜야 진짜 유월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날짜는 자기들만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런 주장 자체가 스스로 사이비이고 이단임을 드러낸다.
우리가 지키는 유월절은 유대인이 지키던 유월절과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이 되셨다.
날짜를 정해서 지키는 절기가 아니라, 매일 삶 속에서 십자가를 묵상함으로써 지키는 유월절이다. 매일 매일 그리스도를 묵상하여 순전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켜내는 유월절이다(고전 5:8).
◆ 성만찬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주님께서 성만찬을 시행하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기념하라'는 말을 1년에 한 차례 추도식 하듯이 하라는 말로 오해하기 쉽다. 이 말은 헬라어 '아남네시스(αναμνησις)'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기념식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잊지 말고 늘 기억하라는 의미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단어를 '기억하게 하는 것'(히 10:3)이라고 번역했다.
초대교회에서 성만찬은 매일 식사 때마다 이루어졌다(행 2:46). 다시 말해서 밥 먹는 것이 일상생활이듯이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일상생활이었다. 성도들이 식사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음을 말하고 우리가 주님의 은총으로 한 식구가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십자가 중심의 일상생활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주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매일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으로 죽고 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더 진실하고 온유했다. 예수님을 본받은 결과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기 의'에 도취한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에 동화된 사람들이었다. 이 차이는 놀라웠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찢기신 몸과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흘리신 피를 기억하는 일은 일 년에 한 번 하는 행사가 아니라, 매일 매일 이루어져야 하고, 우리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중국 형제들이 매주 하는 성만찬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성만찬을 매주 하면 식상하지 않을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밥을 매일 먹는 것이 식상합니까? "
만일 우리가 진짜 음식을 먹지 않고, 그림으로 만든 음식을 먹는 척하는 것이라면 금방 식상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음식을 먹는 것이라면, 끼니마다 챙겨 먹는 것이 절대 식상하지 않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그냥 교리 속에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생명의 주님을 묵상하는 것이라면 묵상할 때마다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의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어떻게 식상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은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라고 믿는다. 물론 설교가 예수님을 높이며, 믿음을 뜨겁게 한다면 매우 좋겠지만, 많은 경우에 그렇지 못하다. 설교자는 마이크 잡고서는 온갖 잡담을 늘어놓는다. 솔직히 말해서 예배를 망치는 가장 큰 요인이 '설교'가 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차라리 설교를 없애고 성만찬을 거행하라. 그러면 아무리 짧은 멘트일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말할 것이 아닌가?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이며, 그를 기억하며 경배하는 것이 예배의 핵심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성만찬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예배드리러 모였다'라는 말보다는 '떡을 떼러 모였다'는 말을 사용하였다(행 20:7).
나는 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릴 때도 성만찬을 한다. 지루한 설교보다는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선포하고 고백하는 성만찬이 훨씬 더 은혜롭다.
일부 교회에서는 성만찬은 목사님만 거행하는 특별한 예식으로 믿는데, 말도 안 된다. 그것은 소위 짝퉁 유대교에서나 할 법한 사고방식이다. 유대교에서는 제사장 외에는 누구도 제사를 드리면 안되며, 짝퉁 유대교에서는 예배당을 성전, 목사만이 제사장이라고 믿으니 그런 논리가 생긴 것이다.
목사만이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가 제사장이며(벧전 2:9), 또한 성만찬은 제사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일이다. 십자가를 기억하는 일에 누가 자격을 논하는가? 주님께서는 모든 성도가 기억하길 바라시며, 또 그래야 한다.
성만찬을 그냥 의식으로만 대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서 십자가의 의미와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라. 그러한 일은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를 닮은 새 언약의 성도로 성장시킬 것이다.
주님,
저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림자를 붙잡지 말고 실체를 붙잡게 해주시고, 생명의 삶을 제대로 살게 해주십시오.
첫댓글 좋은 주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