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행록(槎行錄」
1) 개요
「사행록」1)은 사서선생이 1625년(인조 3년) 8월 3일부터 1626년 4월 15일까지 약 9개월 동안 중국 명나라에 성절사 겸 동지사의 정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남긴 기록으로, 「사서집」에 수록되었다.
「사서집」 권1에는 사행을 하면서 체험한 시(詩)가 총 29제 34수2) 실려 있고, 권5 잡저 편에
「사행록」이 수록되었다.
사서 선생이 사행을 갈 시기(인조 3년, 1625)에는 청(淸, 후금)나라가 건국된 지 10년이 되던 해이고 이미 청 태종이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을 피해 육로3) 대신 해로를 통해 당시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다녀와야 했다.
해로는 요즈음의 항해술이나 선박의 제조 기술 등을 고려할 때 목숨을 건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즉 바람을 만나야 하고, 바람이 불면 한밤중에도 출발해야 하며, 어떤 때에는 배 속에서 흔들리면서 하룻밤을 보내거나 사행선이 침몰하여 목숨을 잃는 등 육로와는 달라 여러 가지로 힘든 여정이라 하겠다.
실제로, 1620년(광해 12년) 진향사4) 유간5)과 진위사(陳慰使) 박이서(朴彝敍) 등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다가 전원 익사하였으며, 1621년 진위사, 1625년의 성절사, 1627년의 성절 및 동지사, 1629년의 동지사와 진하 겸 사은사의 일행이 배가 침몰하거나 익사하는 사고를 경험하였다.6)
명·청의 교체기인 1621년부터 명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1637년(인조 15년)까지 지속되었고, 기존의 육로와 구분하여 요동지역이 청(후금)에 의해 점령당하자 바닷길을 이용하여 북경을 왕래하였는데 이를 ‘해로 사행’이라 하였다. 이 기간에 1621년 귀국길에 해로를 이용한 진향사를 시작으로 1637년까지 17년간 약 30여 차례의 대명(對明) 사행이 왕래하였다.7)
사서 선생이 정사로 임명된 것은 1625년 5월 13일이다. 이 「사행록」은 1625년 8월 3일 배표한 일로부터 사행선 4척이 출발하여 1626년 4월 15일 선사포(宣沙浦, 旋槎浦로 개명)에 4선(船)이 도착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사서 선생의 사행은 종전의 일반적인 사행선과 달리 정사와 서장관으로만 구성하였기에 4척의 배를 이용하였는데, 1선에는 사서 선생이, 2선에는 서장관이, 3선과 4선에는 역관들과 군관들이 타고 있었으며, 승선 인원은 1척의 배에 40명씩 총 160명 정도라고 하였다.
사서 선생의 사행은 많은 사고가 있었다. 가는 길에 일행 중 1명이 급사(急死)하였고8), 풍랑을 만나 간신히 배를 정박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제3선이 침몰당하는 안타까운 일9)도 발생하였다.
「사행록」에는 날짜별로 도중의 경로와 만난 사람들, 날씨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여정별 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5가지로 크게 나뉜다.
① 배표(拜表)~ 등선(登船):1625(인조 3) 8.3. ~ 8.26 (24일간)
1625년 8월 3일 배표 → 4일 발행(發行), 벽제(碧蹄), 파주(坡州) → 5일 장단(長湍), 송도(松島) → 7일 금교(金郊), 평산(平山) → 8일 총수산(蔥秀山), 서흥(瑞興) → 9일 검수(劍水), 봉산(鳳山) → 10일 황주(黃州) →11일 중화(中和) → 12일 평양(平壤) → 14일 순안(順安) → 16일 안주(安州), 가산(嘉山) → 17일 정주(定州) → 23일 곽산(郭山) → 24일 선사포10) , 장계(狀啓) → 26일 치계11) (馳啟)
② 발선(發船) ~ 등주(登州)12) : 9.1. ~ 9. 30. (30일간)
9월 1일 발선, 신미도(身尾島), 웅회도(熊回島, 북양 유박) → 4일, 선사포12) → 가도(椵島), 사포(蛇浦)13) → 출선(出船, 12일), 신도(薪島) →13일, 녹도(鹿島) → 14일, 석성도(石城島) → 15일, 장산도(長山島, 18일까지 유박)14) → 21일, 광록도(廣鹿島) → 23일, 평도(平島), 황성도(黃城島)15) → 29일, 타기도(鼉磯島), 묘도(廟島)16) → 등주
③ 등주 ~ 북경(北京) 동악묘(東嶽廟) 옥하관(玉河館): 10. 10 ~ 11.3(24일간)
10일 황현(黃縣) → 11일, 황산참(黃山站) → 13일 내주(萊州) → 15일 창읍(昌邑) → 16일 유현(濰縣) → 17일 창악현(昌樂縣) → 18일 청주(淸州) → 19일 금령진(金嶺鎭 → 20일 장산현(長山縣) → 21일 추평현(鄒平縣), 장구현(章丘縣) → 22일 용산(龍山), 왕가장(王家庄) → 23일 제남(濟南), 제하현(濟河縣) → 26일 덕주(德州), 하간부(河間府) → 29일 구현(丘縣), 막주점(鄚州店) → 30일 백구하(白溝河), 신성(新城) → 11월 1일 신교(新橋), 유리교(琉璃橋) → 2일 장점(張店), 대정점(大井店) → 3일 북경 동악묘, 옥하관17)
④ 북경 체류: 1625.11.5~1626.3.8 (약 4개월간)
11월 5일 조천관(朝天館) 습의(習儀) → 7일 제독(提督) 서응추(徐應秋) 견관례(見官禮) → 14일 예궐(詣闕) 행하례(行賀禮) → 22일 동지하례(冬至賀禮) → 23일 하절례(賀節禮) → 12월 15일 하마연(下馬宴) →17일 알궐 사연(謁闕 謝宴) → 22일 제독에게 정문(呈文) 올림 → 1626년 1월 1일 알권 참하반(參賀班) → 4일 견관례(見官禮) → 2월 9일 태학관(太學館), 천단(天壇) → 20일 사상례(謝賞禮) → 3월 4일 사조(辭朝) → 8일 동관(東官) 발행(發行)
⑤ 옥하관 ~ 선사포: 1626년 3월 9일 ~ 1626년 4월 15 (35일간)
3월 9일 옥하관 출발 → 10일 통주(通州), 사하점(沙河店) → 11일 양촌(楊邨) → 12일 한가수(韓家樹), 대왕촌(大王村) → 24일 등주(登州) 계선처(繫船處) → 26일 견궁례(見宮禮) → 27일 승선(乘船) → 4월 1일 발행(發行) → 2일 양중지숙(洋中止宿)18) → 3일 황성도19) → 4일 철초(鐵硝)와 여순구(旅順口), 평도(平島) → 5일 삼산도(三山島), 광록도(廣鹿島) → 6일 거우도(車牛島)20) → 9일 선사포 →15일 4선(船) 도착21)
으로 마감하였다.
3선에 승선한 사행원 40명이 사망한 것을 거슬러 보면, 정주목(定州牧)에서 있었던 일로 1625년 9월 19일 조에서, ‘상선(上船)의 목재가 썩어서 3선과 상선을 교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매사가 급작스럽게 처리되니 우려스러운 일이다.22) 라고 하였다. 실제로 사서 선생은 3선이 자신이 탈 배였으니 사행의 책임자로서의 죄책감이 더했을 것으로도 짐작이 된다.
이 사고에 대한 조정의 사후 조치를 보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조정에 휼전(恤典)을 거행하였다. 즉 그 유가족들에게 쌀과 베를 지급하고 복호(復戶)23)를 내렸다.24)
즉 성절사의 제3선이 침몰된 것으로 인하여 휼전 지급을 명하였는데,
상께서 조익(趙翼)에게 하교한 비망기(備忘記)에는,
“성절사의 제3선이 침몰당하였다 하니, 내가 매우 놀랍고 측은한 생각이 든다. 그들이 나라를 위해 바다를 건너가 만리타국에서 겨울을 나며 고생하다가 끝내 바닷속에 빠져 죽고 말았으니, 이는 그들만의 원통한 일이 아니라 국가로서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중외(中外)의 해당 관아에서는 그들 모두에게 별도의 휼전을 내려 억울한 넋을 위로하도록 하라.”25)
고 하였다.
호조가 그들에 대하여 미포(米布)를 줄 것과 아울러 복호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 아뢴 대로 하라. 역관 등에게는 모두 증직(贈職)하고, 그들 처자에게는 앞으로 3년 동안 요지(料米)를 주도록 하라.”26)
또한 『승정원일기』 4월 22일 자 기사에는, 서장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역관과 관원 6명과 주자(廚子), 격군(格軍) 등이 침몰한 3선에 타고 있었음이 확인되며, “성절사로 갔다가 빠져 죽은 역관 김성립 등에게 미와 포를 지급할 것 등을 청하는 호조의 계”에는,
□□□가 호조에 말로 아뢰기를.
“전교하셨습니다. 성절사의 제3선이 난파를 당하여 물에 빠져 죽은 역관(譯官) 김성립(金誠立)·□□□· 최충립(崔忠立)· 최두남(崔斗南)· 이진남(李震男)과 수로(水路) -7자 원문 빠짐- 등 6원(員)의 휼전은 매 1원마다 미(米)와 태(太)를 각 3석(石), 무명 각 –2자 원문 빠짐- 제급(題給)하고 그 나머지 주자와 격군 등에게는 본도의 감사에게 미와 포를 헤아려 지급하고 호역(戶役)을 경감해 주게 하여 그 처자식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는 원문에 빠짐]27)
고 하여 복호의 은전을 베풀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후대에서 육로 사행에서는 없는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사서 선생의 「사행록」이야말로 어려운 해로에서의 여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아 남겨진 사행록으로서 백미라 할 수 있겠다.
1) 전식, 『사서 선생 문집』(권 5) 「잡저·사행록」 지금까지 학계에 소개된 사행록은 조익의 『황하일기(皇華日記)』를 비롯하여 40여 종이 발표되었다.
2) 조창록, 2011, 앞의 논문, 68쪽
3) 육로(陸路)로는 압록강을 건너 심양,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수운(水運)이 발달되지 못하고, 해상의 사고가 잦은 해로(海路)에 비해 수월했다.
4) 진향사(進香使): 중국에 국상이 났을 때 제문(祭文)과 제폐(祭幣)를 가지고 가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임시로 파견하던 비정규 사절 또는 그 사신. 정사는 진위사, 부사는 진향사가 되고, 한 사람의 서장관(書狀官)이 진위·진향을 겸찰(兼察)하였다. 이밖에 종사관(從事官)·통사(通事·통역) 및 의원(醫員)·사지관(寫字官·서자관)·화원(畫員)과 노자(奴子) 등을 합하여 일행은 40인 내외였다.
5) 유간(柳澗, 1554~16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노천(老泉), 호는 후재(後材) 1598년(선조 3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병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요양이 함락되어 명나라로 들어가는 육로 교통을 이용할 수가 없어 수로를 개척·이용하였다. 귀한 도중 배의 침몰로 진위사(陳慰使) 박이서(朴彝敍), 서장관(書狀官) 정응두(鄭応斗) 등과 함께 생을 마감하였다.
6) 정은주,「명청교체기 대명 해로 사행 기록화 연구」,『명청사 연구』 제27호, 명청사학회, 2007
7) 조창록, 위의 논문, 65쪽
8) 「사행록」 19일 갑자(甲子) 조, 제3선의 격군 1명이 원인을 모른 채 급사하여 그를 장산도(長山島)에 묻음
9) 돌아오는 해로에서 사행선 4척 중 1척(제3선)이 침몰하여 이 배에 탔던 전원이 사망하였다. (「사행록」4월 4일과 4월 5일 조 및 4월 15일자 「도엄해제인(掉渰海諸人)」 한시(漢詩) 참조
10) 격군들의 가포(價布)가 도착하지 아니하여 며칠간 지체함
11) 보고서를 올린다는 뜻
12) 등주(登州):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용구시(龍口市) 지역. 당시 요동이나 한반도, 일본과 통하는 항구였음
13) 가도에서 사포에 도달할 무렵 모(毛) 도독(모문룡)이 사포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포에 정박함. 이때 모 도독 휘하의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고, 조선 국왕이 자신들을 홀대한다는 이유로 사신들의 접견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사서 선생은 4알부터 11일까지 사포에 머묾(조창록, 위의 논문, 69쪽)
14) 「사행록」 19일 갑자(甲子) 조, 제3선의 격군 1명이 원인을 모른 채 급사하여 그를 장산도(長山島)에 묻음, 장산도는 상당히 큰 섬으로 여기에서 땔감과 물을 공급하고 바람을 기다린 곳임
15) 늙은 사공 안량(安良)의 만류를 듣지 않고 배를 띄워 도중에 풍랑을 만나 도중에 곶은 부러지고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서 간신히 황성도에 이르러 해조사(海潮寺)에 4일간 머묾, 이 과정에서 제2선은 파도에 밀려 다른 곳에 정박함 「사행록」 23일 무진(戊辰)조
16) 서장관이 탄 배를 만남. 「사행록」 29일 갑술(甲戌)조
17) 옥하관(玉河館): 북경(北京)에 가는 사신(使臣)들의 숙소를 말함
18) 타기도에 못 미쳐 역풍을 만나 바다 가운데에 돛을 내림. 「사행록」 2일조
19) 날이 어둑해지자 바람이 크게 불면서 3선이 북쪽으로 떠밀려 갔으며, 상선(上船,1선)도 밤새도록 풍파로 인해 키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고, 바람이 더하여 배를 놓아 맡겨 두고자 하자 그렇게 명을 하였다. 「사행록」 3일조
20) 거우도에서 선사포까지 거리는 180리 정도이다. (조창록, 위의 논문 78쪽, 각주 25 재인용) 또한 7일 기묘(己卯)조 기사에서, 3선을 기다렸으나 2선이 쫓아왔다. 여타의 소재를 물으니 횡풍에 떠돌다 양도에서 4선과 3선을 만났으나 역풍으로 홀로 항해하였다 하니 2척을 잃은 셈이라 참담해하였다.
21) 1선과 2선이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던 중 4선이 도착하자, 저녁에 3선의 침몰을 슬퍼하는 시를 지음. 4월 15일자 「도엄해제인(掉渰海諸人)」 한시(漢詩) 참조
22) 「사행록」 “留聞上船朽敗 以三船替上爲令 凡事忙遽 價慮”
23) 조세의 일부와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는 일
24) 「인조실록」12권, 1626년(인조 4년) 4월 20일 자 및 『승정원일기』 1626년 4월 20일 자, 4월 22일 자 참조
25) “以備望 傳于趙翼曰, 聖節使第三船復沒云 予甚驚惻 此輩爲國涉海 萬里他鄕 經冬辛苦 終末渰死 非但渠輩之冤痛 抑亦國家之不幸也 令中外該官 恤典 各別擧行 俾慰冤魂.” 『승정원일기』 1626년 4월 20일 임진 기사 조
26) “壬辰/ 上下敎曰: ”聖節使第三船覆沒云, 予甚驚惻 此輩爲國涉海 萬里他鄕 經冬辛苦 終末免渰死海中 非但渠輩之冤痛 抑亦國家之不幸也 令中外該官 另行恤典 以慰冤魂。“戶曹請給米布 且令復戶 答曰: 依啓。譯官等竝贈職 其妻子三年給料.” 「인조실록」12권, 1626년(인조 4년)4월 20일 조
27) “□□□以戶曹言啓曰 傳敎矣 缺第三船致敗渰死人譯官 金誠立·□□□·崔忠立·崔斗南·李震男, 及水路□□□□□□□等六員恤典 每一員 米太各三石 木各□□題給 其餘廚子及格軍等 令本道監司 量給米布 蠲除戶役 以慰其妻子之心 何如? 傳曰, 允. 「승정원일기」 1626년 4월 22일 갑오 기사 조).
[출처] 옥동서원지 (옥동서원지편찬위원회)
송조천객귀국시장도
橫幅, 絹本彩色, 絹表裝堆朱의 軸頭, 送朝元客歸國詩章의 題字, (林厓 의書)있음. 畵面에 약간의 損傷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