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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주양씨대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청장년회 총무 양도월
우리 국민들이 누구나 암송하고 있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의 시조의 작가이자 조선 4대 명필가인 봉래 양사언 선생의 문중이 바로 청주양씨 문중입니다.
봉래 양사언 선생의 묘
청주양씨의 시조 상당백 충헌공 양기는 본래 원나라의 정승으로 고려말에 노국공주를 모시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귀화하여, 당시 원나라에 보내는 사대세공 곧 동녀(童女) 5천인, 준마 3만필, 비단 3만동, 모시 6만필을 삭감 받아와 나라를 태평하게 하였습니다.
그 공훈으로 벽상삼한창국공신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지고 해주 · 송화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이때 관향을 청주로 받아 청주양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사후 시호를 충헌(忠憲)을 받았습니다.
이런 청주양씨 시조 충헌공을 모신 사당이 바로 이곳 보성 벌교읍 마동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청주양씨 정승공파 보성종중은 8세손 양연 입향조를 시작으로, 약 500년 동안 조상의 유업을 이어오고 있는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곳이 바로 벌교 마동리에 살고 있는 청주양씨의 후손들입니다.
마동리에 위치한 충헌사는 일찍이 낙안향교 삼현사와 사충사에 모셨던 충헌공의 위패를,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부득이 마동 용강서실로 모셔와 제향을 지내다가, 1911년 후손들이 지금의 충헌사를 건립하고 지역의 유림들이 200년 동안 제향을 모셔 오고 있습니다
다만 황해도 배천이 기반이었던 상당백 충헌공을 이 멀리 남도 땅에 오시게 된 배경에 대해서 누구도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역대 보성종중 회장들께서 보성 충헌사지를 발간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해 차일피일 미루다, 양현수 현 종중회장이 취임한 후 본격적인 보성종중의 500년 역사과 충헌사의 역사를 연구하여 ‘충헌사지’ 발간을 준비해왔습니다
지난 2020년초 보성종중회에서는 한학자이자 청주양씨대종회의 종보편찬위원장과 대동보편찬위원회 교정, 감수위원 그리고 현 계남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인 양경직 선생을 중심으로 ‘충헌사상임위원회’와 일가가 모여서 ‘보성충헌사지편찬위원회’ 현판을 걸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습니다
이곳 보성에 500여 년을 세거한 문중답게 여기저기 보존되었을 문헌과 유적을 조사하는 ‘유물 전수조사’를 그해 1월 30일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러나 양경직 선생은 이미 연세대학교 도서관이나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보성종중과 관련한 문헌을 찾아다니면서 양시화 선조의 문집을 찾아내는 성과를 냈다.
우선 1차 유물 전수조사는 양시화의 묘지와 묘갈비를 시작으로 장장 2년여에 거친 유물 전수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곳 산기슭에 수풀로 덮인 묘소를 벌초하고 묘갈비를 번역하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500년의 역사 흔적이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양시화 공의 숙부인 은진송씨 비석도 확인하였으며 벌교 초입에 주성된 정3품행 태천군수 양시화 진휼비 조사도 이루어졌습니다
양시화 진휼비는 1901년 극심한 가뭄으로 굶주림에 많은 지역의 백성들이 아사지경에 이르자 백성을 구제하고자 양시화가 곡식을 풀어 어려운 이웃을 규휼했다는 송덕비다. 당시 면장을 비롯한 14개 마을의 이장단에서 사재를 털어 양시화 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입니다.
조사 첫날부터 역사의 숨겨진 비밀 바코드가 풀리기 시작하자 마침 인디아나존스의 영화처럼 하나하나가 흥미롭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사실 경기도 부천에 거주하는 양경직 선생이 사전에 공지하고 2박 3일씩 혹은 4박 5일씩 답사를 와서 진행하는 어려움 속에 유물 전수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보성 일가 중 양희철, 양희석 일가에서 보존하고 있다는 고문헌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긴급하게 찾아갔습니다.
커다란 보자기에 쌓인 고문헌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논어, 맹자, 자치통감 등 용강서실 교제용 서책들 다수와 1807년(순조 7년)에 발행된 정묘보의 족보가 잘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종중에서도 당시 몇 권의 서책이 남아 있다지만 이처럼 잘 보존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월 7일 2차 조사에서는 충헌사 가는 길목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수십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조상님들의 묘지 조사를 했습니다
이곳은 양연 입향조의 묘소와 양춘걸, 양춘발 등의 후손들 묘소가 있는 보성종중의 정신적인 중심지였습니다.
최근 입향조 양연의 묘소가 새롭게 조성이 되어 있었으며, 특히 양춘걸의 비석이 부러진 형태가 발견되어 차후 정확한 조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충헌사 서고에 보관된 여러 가지 유물 및 문헌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현판들과 서책 그리고 1928년 무진보 족보와 1957년 정유보 족보 등이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특히‘용강영당지장’관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낙안향교에서 충헌공의 위패를 모셔와 충헌사를 건립하기 전까지 용강서실에서 모시면서‘용강영당지장’이라 관인을 새겨서 사용한 것입니다.
결국 용강서실의 존재도 확인되고 이곳에 충헌공을 모셨다는 역사를 입증하는 소중한 자료인 것입니다,
그리고 양대백(楊大伯, 1814-1879)의 향시(鄕試) 과거시험 답안지 두 개가 두루마리 형태로 발견되어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1926년에 양동식이 황해도 송화 수증사 충헌공영당에 가서 개모해 온 영정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화공이 고려시대 관복이 아닌 조선시대의 갓을 착용케 하는 오류를 범했지만, 이에 복식 전문가는 일제시대의 작품이라고 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양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벌교 원당의 당산나무 뒤편의 묘지 답사를 했다 이곳은 송재 양병규의 묘지 등 여러 조상들의 묘지들이 잘 보존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조사에서 나온 여러 가지 문헌들은 즉시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조사를 한 양경직 선생은 이번 조사 중에서 가장 의미 있다고 암시를 하여 궁금증을 자아냈습니다
제3차 조사는 2020년 2월 13일 충헌사에서 보성종중 일가들의 임시회의를 개최하여 그간의 유물조사 과정을 설명하고 각 가정에 보존된 유물을 체계적으로 조사하도록 하자는 결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에 무엇인지도 모르게 쌓여있을지 모르는 유물이 있으면 이참에 조사를 통하여 확인하자는 제안에 일가들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기로 했습니다
제4차 유물 전수조사는 추진위원회 회의를 통하여 조사 범위 문제는 의논하여 기왕 하는 조사 이번 기회에 철저하게 조사하자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제5차 유물 전수조사는 지난번 3월 31일에 조사했던 양희석 일가의 가정에서 다른 유물이 있다고 해서 다시 찾아가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고흥군 대서리에 송방현 님의 조상이 충헌사 제향과 관련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찾아가서 여러 문헌과 자료 등을 조사했습니다
당시 고흥 보성 등의 유림들이 매년 충헌사를 찾아 제향에 동참했다는 기록물들을 여기서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충헌사 도유사를 하고 계시는 문산면의 선병국 어르신 댁에서 그간 제향에 사용된 자료와 문헌을 조사했고 낙안향교까지 찾아가서 충헌공의 흔적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4월 2일 제6차 유물 전수조사는 지난 2월 8일 제2차 조사에서 나온 유물의 1차 번역한 결과물이 나왔는데, 머나먼 이곳 낙안향교에서부터 이곳 보성 충헌사에 충헌공을 모시게 된 이유가 명백하게 풀린 것입니다.
1822년과 1823년에 전라도 낙안향교 중심이 된 전라도 지역 부안, 김제, 광주, 남원, 나주, 전주, 익산, 장성, 창평, 흥덕 등 총 15개 지역 향교의 유림 88명이 서명하여 올린 문건이 보성중에서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곧 전라도 지역 유림들이 충헌공께서 나라에 끼친 지대한 공훈에 대하여 은혜를 갚고자, 충헌공을 낙안향교 삼현사에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성균관을 비롯하여 낙안군수 그리고 전라도관찰사와 주고받은 문서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전라도 지역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충헌공이 전라도 벌교 땅에 오시게 된 연유다. 이후 낙안향교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충헌공의 공덕을 잊지 않고, 1823년부터 올해 2023년까지 200년 동안 제향을 함으로써 조선의 명가 청주양씨의 위상을 확인한 소중한 유물 전수조사를 한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충헌사의 유림들이 만든 충헌사상임위원회에 보고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와 아울러 청주양씨 문중의 소중한 자산인 「수교문」이 이곳에서도 발견되었다. 수교란 임금의 특별 명령을 기록한 책으로 곧 충헌공께서 나라에 끼친 공훈이 지대하였기에 그의 후손들에게는 군역과 부역을 면제하라는 왕의 수교를 발급받은 문헌이 이곳 보성종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수교문은 1760년 정승공파 후손 양필휘가 예조에서 등급받아 온 것으로 이에 대한 번역이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했습니다
양필휘는 정승공파 남양종중으로 자는 취서이며 가선대부 행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인물이었습니다
청주양씨는 이 말고도 서원백파 양형수 씨가 소장하고 있는 「수교문」도 존재한다. 결국 청주양씨는 전국 어디에 살든지 충헌공의 후손으로 나라에서 인정받는 조선의 명가임이 입증된 것입니다.
이어진 4월 13일 제7차 조사는 충헌사를 문화재로 등록하고자 이에 필요한 재조사하기 위한 현장 측량을 하는 등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5월 4일 제8차 유물조사는 추진위 회의를 한 후, 다음날 마을회관 마당에서 양선자 일가 집에 보관된 고문헌 및 문서들을 하나하나 조사하였습니다
저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글씨체!
역시나 조선 최고의 명필가인 양사언 선생의 글씨체가 보여 살펴보니 『해동역대명가필보』라는 책에 이성계부터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등 조선시대 유명한 분들이 남긴 서체였습니다.
우리 조상의 글씨가 눈에 확 들어온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 몸에 흐르는 유전자가 있기는 있나 보다’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보성종중 양상석 총무가 책 속에 들어 있던 문서 한 장이 자꾸 바람에 날려서 주워서 양경직 선생에게 주었는데, 양경직 선생이 그토록 오매불망 찾고 싶었던 문서였습니다.
그게 바로 지난 2월 8일 전수조사에서 밝혀내지 못한「수교문」과 양필휘 그리고 보성종중과의 관계를 풀어준 열쇠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2012년 임진보인 대동보를 편찬하면서 양경직 선생은 오래전부터 생몰연대가 이상하다고 수차례 의문을 주장했으나 이를 입증할 기록이 없다 보니 베일에 쌓였던 것이었는데,
이번 양필휘의「수교문」과 종중에서 문서가 발견됨에 따라 보성종중의 근본까지 풀리는 의미 있는 유물 전수조사가 된 것이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유물조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메모지를 들고 눈물이 글썽해하는 양상석 총무의 얼굴이 눈이 선합니다.
이 메모지에는 중국의 사지공 양진의 계보부터 정승공파의 계보가 기록된 것이어서 그간의 의문을 정리하는 쾌거를 이룬 것입니다.
이에 5월 22일 제9차 유물 전수조사를 통해서 그간의 전수조사를 보고하고 출판의 범위 등을 논의했다. 그리고 출판에 앞서 지난 2차 조사에서 일부 문제가 풀리지 않은 양춘걸의 비석 중 부러진 일부를 찾기 위해 장비를 불러서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머지 사라진 부분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8월 22일 제10차 조사를 통해서 편찬위 회의와 일부 미진한 부분에 대한 조사를 마감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제보가 와서 11월 12일 제11차 유물 전수조사는 마을 전체의 호적표가 발견되었고, 원당의 양정수 일가 댁에 서는 흔히들 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의 문헌과 유물들이 쏟아져서 큰 수확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그간의 수집돤 문헌과 자료 등을 번역하고 보완하여 2021년 5월 가본을 발간해서 오탈자 및 수정을 했으며 드디어 2021년 8월 20일 충헌사 제향에 맞춰서 ‘보성 충헌사지’를 발간하였습니다
이번 청주양씨 보성종중회에서는 자체적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난 500여 년의 역사를 규명하기 위한 유물 전수조사를 통해서 풀리지 않은 역사의 비밀을 풀어내고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이는 어느 성씨도 하지 못할 일을 지방의 소 문중인 보성종중회에서 이뤘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조상의 소중한 문헌을 버리지 않고 보관한 보성종중의 일가님들 그리고 충헌공의 공덕을 기리고자 나라에 상소하여, 낙안향교에 배향하고 지금의 충헌사에서 매년 유림제향을 봉행하는 지역의 유림회 어르신들게 청주양씨대종회를 대신하여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갈수록 조상에 대한 얼을 잊고 살아가는 요즘 시대에 조상의 흔 것을 찾고자 노력한바 이제는 관계 기관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 보존할 방법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의 명가 청주양씨!
상당백 충헌공 양기 선생 유림향사 200주년!
이 모든 것은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길이길이 보전해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일문의 종중의 역사지만 그들이 스스로 문화재 전수조사를 통하여 밝혀낸 역사적인 비밀은 역사스페셜 이상으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의 명가 청주양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