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소개 [ 지탄집(止灘集) (止灘 全以復 지음) ]
Ⅰ. 문집목록
책 명 | 저 자 | 관작(官爵) | 파 | 서문 | 발문 |
지탄집(止灘集) | 전이준(全以俊) | 산림(山林) | 정선(旌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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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청장년회 http://www.jeonc.org/
Ⅱ. 旌善全氏 四十四世 全以復
[1626.09.13.(인조4년) ~ 1685.11.07.(숙종11년), 享年 59세] (인조, 효종, 현종, 숙종)
字 득립(得岦) 號 지탄(止灘) 初諱 이준(以峻)
인조4년 1626년 丙寅 9월 13일 生
나이 10세 때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의 난리를 만나 어머니 대부인(大夫人) 면천한씨(沔川韓氏)를 모시고 충주 강서 입석촌(忠州 江西 立石村)으로 피난을 갔는데 문장과 기량이 출중하였다.
당시의 정승은 민암(閔黯)과 민희(閔熙), 목래선(睦來善)과 권대운(權大運)으로 더불어 우리나라를 호위하고 있는 삼공(三公)이요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었다.
공(公)이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이 차츰 쇠해지고 선비의 기풍(氣風)이 퇴패(頹廢)함을 민망(憫惘)하게 여겨 ‘붕당만언소(朋黨萬言疏)’를 지어 한당송(漢唐宋)으로부터 흥(興)하고 쇠(衰)함을 논하고 사(詐)와 정(正)을 변명(辨明)하여 상달(上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역(周易)의 둔괘(遯卦)가 나와서 ‘붕당만언소(朋黨萬言疏)’ 원고(原稿)를 불태우고 지탄집(止灘集) 2권을 지었으니 주자(朱子)의 일과 비슷하였다.
공(公)은 그때 민암(閔黯)과 목래선(睦來善) 두 정승을 찾아보고 말하기를
“대감들의 성명이 먼 시골의 가난한 선비의 협사篋笥 [문서•의복 등을 넣는 방형의 상자]에 있을 수 없고 시골 선비의 성명이 외람되게 대감의 안독案牘 [관청(官廳)의 문서(文書)]에 있으니 후일(後日) 다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생각하여 왕복 되는 편지에 성명을 쓰지 않도록 합시다.” 하였다.
은둔하기로 하고,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문밖을 나서지 않음이 13년으로 세속과 인연을 줄이고 오직 학문(周易)에만 열중하였다.
현종 때에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 학문이 조정에 알려져 공(公)을 가선대부 충위(嘉善大夫 忠衛)로 특별제수 하였다.
숙종11년 1685년 乙丑 11월 07일 卒
※ 원묘(原墓)는 충주 기탄리(충주시 용탄동) 간좌(艮坐)에 모셨다가 1983년 3월 12일에 강원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 산204 자좌(子坐)로 이폄(移窆)하였음
원로들의 증언(전찬진, 전찬득)에 의하면 그 당시에 위토(位土)와 현지 묘소 관리인이 있었고
매년 강릉에서 충주로 시향을 보러 다녔다고 하였음.
※ 350여 년 전에 쓴 문집이 6.25전란, 수재(병자년 포락), 화재 등 암울한 세월을 걸치면서 아직 보관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보관하고 계신 후손이 있으면 연락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原文]
字 得岦 號 止灘 初諱 以峻
仁祖 一六二六年 丙寅 九月 十三日生
公十歲 遭丙亂 沔川韓氏 避兵 忠州 江西 立石村 以 文章器量 卓越 于世時 閔黯及熙與睦來善
權大運 許以邦國台衛儒林宗匠 公憫朝綱陵夷 士風頹廢 製朋黨萬言疏 字漢唐宋論與賛辯詐正 欲上達而 遇易之遯卦 焚稿作 止灘集 二卷 與朱晦庵事 若合公時 往見閔睦相 曰 貴閣姓名不敢鄕谷寒士之篋笥 鄕儒姓名稷濫於貴閣之案牘 後日往復以勿書姓名爲信 則公豫料後日耳目 玩索
易理杜門謝客 不出戶庭 十三年免於世 顯宗朝以山林事聞 特除爲嘉善忠衛公職 不仕
[출처] 정선전씨대동보
1) 충주 강서 입석촌(忠州 江西 立石村)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감노로”인 것으로 추측함
2) 충주 강서 기탄(忠州 江西 歧灘)
“충북 충주시 용탄동”인 것으로 추측함
3) 충의위 [ 忠義衛 ]
조선 시대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충좌위(忠佐衛)에, 충찬위(忠贊衛) ·파적위(破敵衛)와 더불어 속해 있던 군대.
1418년(세종 즉위)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佐命)의 3공신의 자손들을 위한, 특수층을 위한 일종으로 우대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이 부대에 속한 군병은 공신의 자손이나 그 첩의 중승자(重承者)로 편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의위 [忠義衛] (두산백과)
4) 둔괘 [ 遯卦 ]
육십사괘 중 건괘(乾卦:둔괘 )와 간괘(艮卦:둔괘 )가 겹쳐서 둔괘의 형상을 이루는 괘를 말한다. 하늘 아래에 산이 있음을 상징한다. 은둔을 뜻하는 괘로써, 군자(君子)가 그 지위에서 물러나 세상을 피해서 산다는 뜻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둔괘 [遯卦] (두산백과)
5) 산림 [ 山林 ]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준말로, 학덕은 높으나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던 고명한 선비를 말함.
6) 민암[ 閔黯 ]
조선 후기 현종, 숙종 때의 문신. 본관 여흥(驪興). 자 장유(長孺). 호 차호(叉湖). 1668년(현종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지평(持平),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남인으로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처형문제에 강경론자였다. 1691년 우의정이 되었고, 1694년 갑술환국 때 대정(大靜)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암 [閔黯] (두산백과)
7) 민희 [ 閔熙 ]
조선 후기 효종 때의 문신. 시호 문충. 한성부윤, 우찬성·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경신대출척으로 관작이 삭탈되고 유배되었으나 후에 풀려났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신원되었다.
본관 여흥(驪興). 자 호여(皡如). 호 설루(雪樓) ·석호(石湖). 시호 문충(文忠).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급제,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거쳐 한성부윤, 1677년 우찬성 ·우의정, 1680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관작이 삭탈되고 유배되었으나 후에 풀려났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신원(伸寃)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희 [閔熙] (두산백과)
8) 목내선 [ 睦來善 ]
조선의 정치가. 자는 내지(來之), 호는 수옹(睡翁). 본관은 사천(泗川). 허목(許穆)에게 배우고 1650년 문과에 급제, 교리ㆍ판결사 등을 역임하고, 1672년(현종 13)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형조 판서(1675 ; 숙종 1)ㆍ대사헌(1676)을 거쳐 예ㆍ호조의 판서가 되었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남인이었기 때문에 파면되었다. 1683년 다시 형조 판서로 기용되어 우참찬을 거쳐 1689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 해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서인을 제거하고, 좌의정이 되었으나 갑술옥사(1694)로 5년간 유배되었다. 서예에 능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목내선 [睦來善]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9) 권대운 [ 權大運 ]
조선 중기의 문신. 숙종 때 예조판서·병조판서, 우의정에 승진했다. 남인의 중심적 인물로 처신했다. 기사환국으로 영의정에 등용, 서인 영수 송시열을 사사하게 했다. 검소, 청렴해 명망이 높았다.
본관 안동. 자 시회(時會). 호 석담(石潭). 1642년(인조 20) 진사가 되고, 164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등용되고, 지평 ·헌납 ·이조정랑 ·응교 ·사간을 역임하고 승지가 되었다. 이어 형조 ·병조 ·예조의 참의와 한성부우윤 ·형조참판 ·개성유수 등을 거쳐 1666년(현종 7)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대사간(大司諫)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1670년 호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형조판서 ·의금부판사를 지내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당대 남인의 중심적 인물로 처신하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자 중추부판사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당하고 영일(迎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풀려나 영의정에 등용되고, 같은해 6월 유배중인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사사(賜死)하도록 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정국이 반전됨에 따라 관직이 삭탈되고 절도(絶島)에 안치되었으나 1699년 고령이라 하여 고향에 돌아가 죽었다. 비록 당정에 휘말려 굴곡이 심한 관료생활을 하였으나 생활이 검소하고 청렴하여 명망이 높았다. 죽은 뒤 왕의 특명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대운 [權大運] (두산백과)
10) 陵夷능이
능(陵)은 구릉을, 이(夷)는 평하(平下)를 뜻함. 처음에는 성(盛)하다가 나중에는 점차 쇠퇴(衰頹)함을 뜻함.
한국고전용어사전
11) 豫料예료
미리 헤아림. 「선취(先取), 예상(豫想)」이란 뜻으로 칸트철학(Kant哲學)에서 쓰는 말.
12) 玩索 (완색)
☞ 완역(玩繹)
玩繹 (완역)
(글이 지닌 깊은 뜻을) 생각하여 찾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