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종정 만암, 근대 한국불교를 다시 세우다”
- 30년 불교 전문기자가 사료로 복원한 평전 『석문의 지도자 만암 스님』 출간
1957년 1월 16일 밤, 장성 백양사에 함박눈이 쏟아졌다. 한 노승이 문을 열어 달라 청했다. 눈 내리는 모습을 지긋 이 바라보던 스님이 말했다. ‘눈이 많이 내리니 올해는 풍년 일 게야.’ 전쟁과 재해로 굶주리던 사람들을 걱정하는 그 한 마디가 세간에 남긴 마지막 음성이었다. 잠시 후 스님은 서 쪽을 향해 단정히 앉은 채 마지막 숨을 거둬들였다.
동국대학교출판문화원이 시리즈로 출간하고 있는 ‘동국의 빛-이 사람을 보라’의 하나로 1954년 종명을 회복한 조계종 초대 종정 만암종헌(曼庵宗憲, 1876~1957) 스님의 평전 『석문의 지도자 만암 스님-근대 한국불교를 다시 세우다』(이재형 지음)를 펴냈다.
30년간 한국불교를 취재해온 저자가 법보신문에 연재한 원고를 대폭 보완해 묶은 책으로, 스님의 적멸 장면으로 문을 열어 여든 해의 생애를 거슬러 오르는 수미상관의 구조로 짜였다. 책은 임제종 운동에서 종명 회복까지, 한국불교의 정체성 회복에 평생 앞장서 실천했던 만암 스님의 삶을 ‘평화적·자주적 정화’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만암 스님을 이렇게 요약한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한순간도 어긋나지 않은 수행자, 그것이 만암 스님이었다.”
은사 취운도진 스님 첫 규명,
반선반농의 선각자 재정립
이 책은 기존 학계의 연구 성과를 최대한 반영하고 사료를 일일이 대조해 만암 스님의 생애를 고증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이름만 전해오던 은사 취운도진(翠雲道珍, 1858~1922) 스님의 실체를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복원했다. 1935년 만암 스님이 백양사 부도전에 직접 세운 「취운선사 사은지탑」 비문을 1차 사료로 삼아, 나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백양사로 입산하고 대강백 한양용주 스님을 만 16년간 시봉한 취운 스님의 생애를 밝힌 것이다. 만암 스님에게 은사는 “지혜가 깊고 덕이 높은 ‘고불(古佛)’”이었고, 훗날 결성한 고불총림(古佛叢林)의 이름도 여기에서 연원했음을 책은 보여준다. 조계종 종정의 출가 인연과 사자상승의 계보가 비로소 온전히 규명된 셈이다.
통설의 정정도 이 책의 성취다. 근대불교에서 선농일치의 선구자로는 으레 학명 스님(1923년 내장사)과 용성 스님(1927년 화과원)이 거론돼 왔다. 그러나 저자는 만암 스님의 반선반농(半禪半農)이 이보다 앞선 1917년 백양사 중창 과정에서 시작돼 해방 이후까지 지속됐음을 『만암문집』 등의 기록으로 입증하며 “실질적인 반선반농의 선각자는 만암 스님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연간 양곡 40석에 그치던 백양사가 10년 만에 800여 석을 생산하는 호남 굴지의 거찰로 거듭난 과정이 그 실증이다. 반선반농은 살림의 방편을 넘어 근대 한국불교 자립의 길이었다.
광성의숙에서 정광학원까지,
평생을 교육에 바치다
책이 각별히 공들여 복원한 것은 교육자 만암이다. 스님은 1909년 백양사 청류암에 근대식 학교 광성의숙을 세워 전통 교학과 신학문을 함께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1928년 불교전수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뒤 1930년 이를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로 승격시켜 초대 교장을 맡았다. 불교계의 숙원이던 고등전문교육기관이 마침내 세워진 것이다. 불교계가 운영하던 보성고보가 재정난에 처하자 학교를 지키려 끝까지 분투했고, 해방 직후에는 발 빠르게 백암산 자락에서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한글 강사 자격을 갖춘 36명의 수료생은 각자의 사찰과 마을로 돌아가 다시 ‘한글의 씨’가 됐다. 이어 5대 본산을 연합해 정광학원을 설립했다. 저자는 이 40여 년의 행보를 “한국 근대불교 가 식민지의 굴레와 전쟁의 폐허를 가로지르며 인재 양성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가장 단단한 자취”라고 썼다. “교육사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던 스님의 신념이 낳은 인재들이 훗날 한국불교 근현대 지성의 뿌리가 됐다.
“스님의 정화는 응징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책이 제시하는 가장 주목할 만한 해석은 만암 스님의 평 화적이고 자주적인 정화사상이다. 해방 후 정화의 필요성을 처음 공론화한 것은 만암 스님이었고, 1954년 6월에는 종헌 개정으로 ‘조계종’ 종명 회복과 도의국사 종조 명문화를 이뤄냈다. 스님은 회복된 조계종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60여 년간 교육과 포교의 현장에서, 결혼을 했더라도 불사와 전법에 헌신한 승려들의 공로와 불심을 직접 보아온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스님이 설계한 정화는 그들의 헌신을 끌어안으면서 청정승가의 본래 모습을 회복 해가는 점진적 정화였다. 비구를 정법중과 호법중으로 나눠 수행과 포교·행정의 역할을 맡기고,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승가의 질서가 회복되도록 한 설계였다. 저자는 기 혼승 도반의 죽음 앞에서 “두 눈이 실명한 듯 캄캄하였네”라고 애통해한 만암 스님의 추도시를 드러내 이 정화관의 내면적 뿌리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이 구상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스님은 “교단정화라는 목적이 국가권력 개입이라 는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신념으로 교단의 자율을 지키고자 했고, 종조 변경을 ‘환부역조(換父易祖)’라 통탄하며 종정에서 물러난 뒤 태고사 종조의 부도 앞에 엎드 려 호곡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남긴 것은 원망이 아니라 “화쟁(和諍)의 문호”와 “화동(和同)의 길”이라는 호소였다. 정화의 대의를 누구보다 먼저 주창했으면서도 그 길이 분열로 치닫는 것을 가장 아파했던 노승. 저자가 “종단 내부 갈등이 외부 법정으로 옮겨가는 오늘의 흐름도 그 뿌리는 1954년에 닿아 있다”고 짚었듯, 갈등과 분열이 반복되는 오늘의 한국사회에 만암 스님의 길이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승가를 넘어 사부대중으로,
중앙을 넘어 지역으로
책은 만암 스님의 활동 반경을 온전히 담았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일상에 불교 의례를 새겨 “사찰 중심의 신앙을 가정 도량으로 옮긴” 재가신행의 규범화, 마을 단위 포교소로 민중과 직접 호흡한 백양사의 풀뿌리 포교, ‘무불(無佛)의 섬’ 제주에 26개 포교소를 세운 제주불교 복원까지 아우른다. 또 서옹·금타·석산 스님이 선과 수행의 자리에서, 석 파상만·월하덕림·수산지종 스님이 교육과 실천의 현장에 서 스승의 법을 이어간 궤적을 추적했으며, 에필로그에는 김광식·황인규·김상영·김순석·한동민 교수와 금강 스님 등 학자들의 평가를 수록해 객관성을 높였다. “오늘날 만암 스님의 정화 해법을 다시 검토하는 것은 스님이 제시한 방법이 원론적이며 평화적이기 때문”(김순석 전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이라는 학계의 재평가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집필 동기를 이렇게 밝힌다. “만암 스님이 추구한 것은 급진적 축출이 아니라 점진적 회복이었고, 권력에 기댄 정화가 아니라 자주적 정화였다. … 만일 그 길이 한국불교의 주류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 질문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고, 결국 이 책으로 이어졌다.”
저자 소개
이재형 |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수료했다. 30여 년간 법보신문에서 한국불교의 역사와 사상, 수행과 문화유산 등을 다루어 왔다. 학술기자, 편집국장 등을 거쳐 현재 법보신문 대표로 있다. 「만암 대종사 행장에 관한 고찰」, 「불교계 친일행적 어떻게 볼 것인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신 미의 역할」, 「초기불교 연구 현황과 전망」 등의 논문을 썼고, 공저로 『월산 대선사 생애와 중도선 사상』(조계종출판사)이 있다. 한국불교 기자협회 취재 부문 및 대상,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언론문화상 교계 신문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별지] 책 속에서
1. “이제 돌아갈 곳은 없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여읜 소년에게 허무가 지병처럼 들어앉았다. 산다는 게 무엇일까.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죽음은 정녕 피할 수 없는 것일까. 번민은 물속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깊어져 갔다.” -2장 입산 (46쪽)
2. “얼마나 지났을까. 망념의 구름이 걷히고 몰록 ‘나’라는 집착이 끊겼다. 한 생각이 일지 않자 지혜가 환히 빛나고 고요한 가운데 모든 게 밝게 드러났다. 문 없는 문을 꿰뚫고 일천의 성인도 전하지 못한 언어 이전의 언어를 깨친 것이다.” -7장 정진과 오도 (99쪽)
3. “호미를 잡는 손과 화두를 드는 마음이 둘이 아니었다. 새벽의 예불과 한낮의 밭일과 저녁의 좌선이 하나의 일과로 이어지는 도량, 그것이 만암 스님이 백양사에 일군 새로운 가풍이었다. 백장 선사의 옛 정신은 이렇게 백암산 자락에서 되살아났다.” -12장 반선반농 주창 (152쪽)
4. “일제의 통치와 외래문화의 물결 속에서 백양사 포교소는 단순한 신앙 공간을 넘어섰다. 신행과 교육으로 민중이 ‘스스로 일어서는 힘’을 기르도록 도왔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켜내는 보루가 됐다. 마을 단위 포교소가 민중에게 건넨 위로와 안식은 그 자체로 시대에 맞선 저항이었다.” -17장 백양사 포교소 운영 (203~204쪽)
5. “백양사에서 실시되며 체계화된 재가신행 규범화로 불교는 근대의 문턱에서 다시 일상의 통과의례로 걸어 들어왔다. 의례를 통해 일상을 불교적 의미로 채우고, 가정을 수행의 공간으로 바꾼 만암 스님의 작은 혁신과 따뜻한 애도의 감 성이 재가불자의 불교 생활화를 이끌었다. 사찰 중심의 신앙을 가정 도량으로 옮긴 만암 스님의 의례 개혁은, 근대 한국불교가 잃어가던 ‘생활 종교’로서의 자리를 재가자의 일상에 다시 새긴 사건이었다.” -19장 재가신행 규범화 (225쪽)
6. “1909년 백양사 청류암에 광성의숙을 세워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함께 가르쳤던 그 길은, 36년 뒤 해방의 첫 새벽 한글강습회로 이어졌다. 백암산 자락에서 울려 퍼진 한글의 소리는 한국불교가 해방 직후 민족의 언어 회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먼저 끌어안은 자리였다.” -20장 한글강습소 운영 (235쪽)
7. “광성의숙에서 시작돼 중앙불교전문학교를 거쳐 정광 학원으로 이어진 만암 스님의 40여 년 교육 행보는, 한국 근 대불교가 식민지의 굴레와 전쟁의 폐허를 가로지르며 인재 양성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가장 단단한 자취였다.” -21장 정광학원 설립 (245쪽)
8. “스님의 정화는 응징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정법의 기치 아래 사부대중이 함께 정진하는 불교 공동체의 복원이었다. 교육자이자 종단 지도자로 오랜 세월 활동하며 지켜본 불교 현장의 다층적 현실에 기반한 것이었다.” -22장 정화사 상의 형성 (249쪽)
9. “만암 스님은 고불총림을 통해 선의 본래 정신을 되살려 새로운 시대의 수행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역대 선지식들이 지켜온 정법의 빛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기존 체제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모범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고 보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오랜 구상’과 ‘당대 비판’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렸다. 가슴 깊이 담아온 이상이 있었기에 현실의 한계가 더 선명하게 보였고, 그 한계 때문에 이상 실현의 시기는 더 늦출 수 없었다. 고불총림은 그 교차점에서 탄생한 결사였다.” -23장 고불총림 결성 (258~259쪽)
10. “갈등이 격화될 때마다 더욱 강경한 유시가 나왔고, 그때마다 불교계의 분열은 더 깊어졌다. 만암 스님은 불교계 지도자들이 국가권력의 의도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 흔들리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교단정화라는 목적이 국가권력 개입이라는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 스님의 신념이었다.” - 27장 권력의 개입 (300~301쪽)
11. “사퇴 직후 만암 스님은 북한산 태고사로 향했다. 종정이 태고보우 국사의 부도 앞에 선다는 것은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종단을 대신한 통한의 표현이었다. 만암 스님은 부도 앞에 엎드려 곡을 했다. 한국 선불교의 종통이 흔들린 자리에서, 종조의 부도 앞에 엎드린 노승은 눈물을 쏟아냈다.” -28장 환부역조 (309쪽)
12. “1957년 1월, 팔순의 스님은 거동이 불편했으나 병세가 뚜렷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스님이 세상과의 인연을 접겠노라고 예고한 것은 입적 7일 전이었다. 예로부터 고승들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렸다. 언제 죽게 될 것임을 알아맞히는 ‘예언’이 아니라 언제 입적하겠다고 밝히는 ‘예고’였다. 육신이 극히 노쇠하거나 자신의 법을 다 펼쳤다고 판단하면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지 않았다. 삶에도 끌려다니지 않지만 죽음에도 끌려다니지 않았다. 만암 스님은 삶의 주인인 동시에 죽음의 주인이었다.” - 1장 적멸 (32쪽)
13. “1957년 새해가 밝았다. 스님은 평소처럼 새벽 예불에 나섰고,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행동에는 마무리하는 이의 평안이 깃들어 있었다. 제자들은 그 평안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1월의 백암산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적멸의 시간이 다가왔다.” -29장 마지막 호소 (322쪽)
14. “만암 스님은 제자들에게 똑같은 길을 강요하지 않았다.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불법을 구현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 스승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정신을 자기 시대와 역할에 맞게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것. 만암 스님의 위대함은 이런 다양성을 허용하고 격려했다는 데 있었다.” -31장 제자들(하) (341쪽)
15. “만암 스님이 걸었던 길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되새겨야 할 화두다. 만암 스님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지키고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다시 묻고 있다.” -에필로그 (351~3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