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파 전원발의 가계소고 ( 菊坡 全元發의 家系小考 ) 1
선생의 행장을 중심으로 ( 先生의 行狀을 中心으로 ) -
강경모(姜慶模)
서론
고려 말(高麗 末의) 대학자들은 대부분이 영남인(嶺南人)들로 흔히들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호칭하는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를 위시하여 야은 길재(冶隱 吉再), 목은 이색(牧隱 李穡) 선생 등, 모두가 이 지역 출신들이며, 이 외에도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왕조교체기(王朝交替期)에 정치·문화 등 사회 전반 지도력을 발휘하였던 수많은 인재 중에 당시 상주목(尙州牧)에 속하였던 용궁현(龍宮縣), 지금의 문경시(聞慶市) 영순면(永順面) 달지리(達地里)에서 출생한 고려 말의 문신인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 선생의 행장을 중심으로, 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고로, 역사의 고장이며 인재의 보고(寶庫)라고 하는 상주의 영예(榮譽)는 다름 아닌 이 지방에서는 한 시대마다 영향력 있는 학자 내지는 정치인들이 많이 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의 가계를 살펴봄은 한 사람의 가계가 아닌, 고려 말 왕조교체기의 영향으로 자료의 빈곤을 겪고 있는 고려사에 미약하지만 한 부분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이 시대 제지 사족들의 움직임에 대하여도 단편적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는 계기(契機)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1.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의 생애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은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생몰년이 기록되지 않아 정확히 고증할 수는 없지만, 고려 충숙왕(忠肅王) 2년(1315)에 문과(文科) 현량공거(賢良貢擧)에 급제하여 원(元)나라에 입국하였으며, 이후 원에서 실시하는 과거에 장원을 하였으며, 원에서의 벼슬은 금자영록대부 병부상서 겸 집현전 태학사(金紫榮綠大夫 兵部尙書兼 集賢殿 太學士)에 올랐으며, 공민왕(恭愍王) 3년(1354)에 원(元)에서의 39년이라는 긴 외국생활을 마치고 고려에 귀국하니, 이때가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13년이다.
선생이 귀국할 당시 국내외 정세는 매우 혼란스럽게 변하고 있었다. 공민왕(恭愍王)이 원(元)에서 돌아와 등극하기 전 해인 1351년에 중원에서는 하북성 영평에서 한족인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난을 일으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러 표식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홍건적(紅巾賊)이라 불렀으며, 이들은 중원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원 나라 각지를 침략하고,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韓林兒)가 유복통 등에 의해 추대되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송(宋)이라 일컫기에 이른다. 그중의 한 무리가 심양(瀋陽)으로 진출했다가, 원나라 군대의 반격을 받아 고려의 영토로 밀려 들어와 고려는 홍건적에 의한 두 차례에 걸친 큰 전란을 맞게 되며, 또한 귀국하기 전 해인 1353년에는 명(明)의 시조인 주원장(朱元璋)이 군사를 일으키니 중원은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가 되었다.
원에서 귀국할 때 황제에게, 고려에 설치한 정동성(征東省)의 횡포와 너무 과다한 세공(歲貢)을 감하여 줄 것을, 특히 금(金)·은(銀)·견(絹)·마(馬)의 공납을 줄여 줄 것을 청원하여, 이를 대폭 삭감을 시켜 고려의 국고를 튼튼히 하고 백성의 노고를 덜게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국내정세는 물론 국제정세마저 혼란에 빠지니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致仕를 청하여 향리인 용궁현으로 낙향할 때 공민왕(恭愍王)은 선생의 나라에 대한 이러한 공로를 嘉賞하여 竺山府院君에 封하고 향리의 省火川 一區를 下賜하였다.
향리인 용궁으로 낙향하여 성화천변에 정자를 지어 淸遠亭이라 제호하고, 시문과 풍영으로 세상을 관조하며 만년을 보내셨다. 선생은 당시의 대학자인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난계 김득배(蘭溪 金得培)· 척약재 김구용(惕若齋 金九容) 등 제선생(諸先生)들과 교유하셨다. 교유한 인사들인 김득배는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난에 모두 출정하여 공을 세웠으나, 간신 金鏞의 모함으로 尙州 山陽에서 참수당하였으니, 그 해가 1362년(공민왕11)으로 귀국하여 선생과 교유한 기간은 불과 9년뿐으로 짧았으며, 이제현(李齊賢)은 선생보다 1년 먼저인 1314년에 원 나라에 들어가 충선왕(복위 1308~ 1313)이 연경에 세운 만권당에서 공부하였으며, 공민왕이 즉위하자 귀국하여 1367년(공민왕 16)에 졸하였다.
원나라 조정에 있을 때는 서로가 고려에서 온 외국인으로 자주 만나 교유하였겠지만, 귀국하여서는 만나 함께 하였던 기간은 불과 13년이며, 김구용은 1338년(충숙왕 복위 7)에 나서 1384년(우왕 10)에 중국의 濾州 永寧縣에서 병졸(病卒) 하셨으니, 선생이 귀국하여 교유하였던 시기는 공민왕 때로 보이며, 김구용 또한 1375년 (우왕 1)에 원나라에서 온 사신의 처리 문제로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친원파에 밀려 竹州로 귀양을 가서 7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기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선생이 金得培에게 和贈한 유일한 詩 한 편은 급변하는 당시를 직시하고 초야에 은거하여야만 하였던 시대상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詩로 보인다.
2.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의 가계
전씨(全氏)의 시조(始祖)는 백제 온조왕(百濟 溫祚王)때의 십제공신(十濟功臣)이며 환성군(歡城君)인 섭(聶)으로 본관은 정선(旌善)으로 하며, 가계(家系)는 오랜 세월 기록의 인멸로 인하여 상계는 고증할 길이 없다.
다만 28세 조가 고려조에 문과에 올라 한림학사 문하시랑 평장사 용성부원군(翰林學士 門下侍郞 平章事 龍城 府院君) 방숙(邦淑)이며, 그 후 자손들이 세거하여 모두 용궁으로 분파하여 비조가 되었다.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은 용궁파 비조로부터 6세 손이 되며, 원에서의 벼슬은 금자영록대부 병부상서 겸 집현전 태학사(金紫榮綠大夫 兵部尙書兼 集賢殿 太學士)로, 귀국하여서는 공민왕으로부터 원에서의 공적을 찬양하여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封)해지고, 이후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용궁의 구호(舊號)이며, 피봉된 축산(竺山)을 아관(亞貫)으로 하여 정선(旌善)에서 분파하였다.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낸 방숙((邦淑)은 5대조(5代祖)이며, 고조부는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낸 정민(正敏)이시며, 증조부는 전법총랑(典法摠郎)을 지낸 충경(忠敬)이며, 조부는 판도총랑(版圖摠郞)을 지낸 대년(大年)이며, 부는 민부전서(民部典書)를 지낸 응양군(鷹揚君) 진(璡)과 모부인 상산김씨(尙山金氏)의 장남으로 지금의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서 나셨다.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의 가계도〉
국파 전원발의 선계(先系)는 정선(旌善)이며, 국파의 5대조(5代祖)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 방숙(邦淑)께서 시호를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을 받으시어 용궁(龍宮)에 세거하는 자손들이 용궁을 관향(貫鄕)으로 하였으며, 국파(菊坡)공께서 려말(麗末)에 다시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의 시호를 받으시니 이후로 축산(竺山)을 관(貫)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축산(竺山)은 용궁의 옛 이름이다. 이를 알기 쉽게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자료제공] 경북 상주 농산 전상룡
※ 人事篇 / 治道類
科擧
[0412]東人參中國榜眼辨證說
全元發、
【號菊坡。登文科。又登制科第三人。官翰林學士。壽城人。在于光下。】
출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 治道類 > 科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