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빛 본 금척리(金尺里) 보고서
금척리 고분군은 영천서 중앙선을 타고 경주로 가다 건천역을 지나서 왼쪽 차창으로 보이는 고분군을 말한다. 지날 때마다 저 고분의 어디에 금척(金尺) 즉 금으로 만든 자(尺)가 들어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다행히 경주박 물관에서 고분을 발굴하여 귀중한 문화재를 발견하였다니 반갑기 그지없다. 다음은 동아일보에 게시된 기사를 올려보고 참고 자료도 올려본다.
경주 외곽 고분 속 유물에… 신라 6부 지배층, 중앙 귀속과정 담겨
동아일보 신문기사
‘대릉원’서 17km 떨어진 고분군이며 대릉원보다 1세기 앞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곽묘→적석목곽묘 무덤 축조 변화… 모량부 등 신라 6부 지배 세력들 4세기 전부터 활동하다 변모한 듯… “경주시내 중심에서의 연구를 확장 해야 한다.
경북 경주시 대릉원에서 북서쪽으로 17KM 떨어진 건천면 금척리 고분군 전경
경주시 금척리 고분군이 대릉원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보다 1세기 앞선 4세기부터 조성된 사실이 발굴조사 결과 밝혀졌다. 신라 6부(六部·건국 주체가 된 6개 정치단위체) 중 하나인 모량부(牟梁部)가 5세기 등장한 신라중앙의 마립간(麻立干·신라시대 왕의 칭호)에 앞서 금척리 일대를 지배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학계는 이번 조사 결과를 신라 6부 체제를 규명할 핵심 자료로 보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1981년 실시한 금척리 고분 18기 발굴조사 결과를 최근 40년 만에 보고서(‘경주 금척리 신라묘’)로 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 1065점을 토대로 무덤 조성 시기를 4세기 초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추정했다. 이 중 덧널무덤(목곽묘)인 10호분은 내부에서 4세기 초엽의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표면에 격자무늬나 끈 무늬가 새겨진 토기) 4점이 나와 가장 이른 시기의 무덤으로 분석됐다. 10호분과 맞붙어 조성된 2, 4호분이 목곽묘보다 늦은 시기의 묘제(墓制)인 5세기 적석목곽묘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금척리는 모량부의 중심지로 신라 중앙의 대릉원에서 북서쪽으로 17km 떨어져 있다. 5세기 후반 적석목곽묘인 1호분에서 94.5cm 길이의 은 허리띠가 출토되는 등 금척리 고분군에 모량부 지배층이 묻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부족 연맹체였던 진한(辰韓)에서 씨족 집단으로 구성된 6부 체제가 등장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6부에는 모량부 외에도 급량부, 사량부, 습비부, 본피부, 한기부가 있었지만 현재까지 고분이 확인된 곳은 모량부가 유일하다. 신광철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금척리 고분군을 통해 마립간 등장 전 모량부의 규모와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라 6부중 하나인 모량부 지배층의 무덤이다. 금척리 1호분에서 출토된 ‘은허리띠’(왼편 사진)와 6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 이 지역 지배층이 묻혔음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학계는 모량부 연구를 통해 중앙집권을 추구한 마립간 시기가 도래한 과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립간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이미 4세기 이전부터 지배력을 행사한 모량부 등 6부 세력이 점진적으로 중앙에 귀속되는 과정을 밟았다는 것.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증왕비와 진흥왕비 모두 모량부 출신이다. 신라 김씨 왕조가 모량부 지배층과 혼인관계를 맺어 중앙집권의 기틀을 다졌다는 것이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금척리 고분군은 4세기 목곽묘에서 5∼6세기 적석목곽묘로 바뀌는 무덤 축조 양식의 변천을 볼 수 있다”며 “이는 경주 외곽의 지배세력이 성장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모량부 핵심세력이 교체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풀이했다. 금척리 고분군 연구를 토대로 신라 6부 체제 내부의 지배세력 변화도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학계는 이번 발굴조사 결과가 신라 초기 지배층 고분의 조성 시기를 더 올려볼 여지를 줬다고 보고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는 “금척리 고분군 일대를 추가로 조사하면 2∼3세기에 조성된 목곽묘가 더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경주시내로 한정된 조사연구를 외곽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김재홍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는 “그동안 대릉원 등 경주 중심에 집중된 신라사 연구 흐름을 외곽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서라벌문화재연구원은 지난해 6월 금척리 고분군의 남쪽 경계에서 목곽묘 1기와 적석목곽묘 6기, 석곽묘 1기를 추가로 확인했다. 국가사적에 포함된 고분 52기 외에도 지배층 묘역이 더 넓게 분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참고 자료>
1.금척리 고분군 사진들
금척리 고분군의 옛 사진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들
1-A호 은제 허리띠ㆍ드래개, 길이 65.0cm
2.금척리 고분군의 전설
금척리 고분군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다른 고분군과는 달리 38기가 한곳에 집중적으로 있다는 점이다. 예사롭지 않은 그 분위기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금척(金 尺)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가 옛 부터 전해지고 있다.
옛날 신라에 금자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金尺)로 한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당나라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