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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72년간 알아보려고 노력한 결론,
모든 고통을 소멸시키고,
진짜 행복을 찾는 방법이 이 글에 전부 들어있습니다.
저 임희동이 보장합니다.
제가 청혜스님의 가이드로 잠시 깨어나고 보니,
'나'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또 모두가 '나'였습니다.
https://cafe.daum.net/happyOK/L9si/315?svc=cafeapi
이렇게 의식은 아무 것도 없기도 하고, 전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식은 축소되기도 하고, 확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식은 잠을 자기도 하고, 현실을 살기도 하고, 꿈을 꾸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식은 몸을 가지기도 하고, 몸을 가지지 않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식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식은 부자이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식은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식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식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식은 아프기도 하고 건강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식은 고통을 가지기도 하고, 평안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유롭습니다.
이 의식은 신비함[아무 것도 없음-알 수 없음- 모름]입니다.
1]
https://www.youtube.com/watch?v=9NAWhElsgvg
위 유튜브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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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탐구에서 우리는 단순히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거나
그 변형인 '이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라고 묻습니다.
이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찾아보면, 당신은 아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경험하는 주체는 경험될 수 없습니다.
눈이 눈 자체를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만질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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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찾기로 되어 있는 어떤 것을
계속해서 찾아 헤매기 일쑤입니다.
아무 것도 찾지 못할 때, 어딘가 다른 곳을 찾아 헤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알지 못함-모름-모른다]', '무'가 답일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답을 찾아서 마음으로 돌아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기억을 뒤적거리고, 좋은 답을 상상합니다.
'질문 자체에 머물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하는 자기 탐구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흥미진진하고 군침도는 육즙이 없습니다.
그런 경험은 그다지 풍요롭지 않기 때문에 곧 마음이 싫증이 나서, 그만 두고 맙니다.
마음이 보기에 그 안에는 별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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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온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거기에 달린 것처럼 혼신을 다해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질문을 하면, 마음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을
넘어서 갈 수 있습니다.
온 가슴으로 질문을 했지만 답을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냥 거기에, '알지 못함'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로 그냥 내버려 둡니다.
거기에는 그 공간 외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 공간에 그저 깨어 머뭅니다.
우리의 눈 뒤, 우리의 생각 뒤, 우리의 느낌 뒤, 거기에 아무 것도 없으니,
존재함을 의식하면서 말입니다.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을 때는, '있음의 세계'로 돌아오지 말고,
그냥 거기, 아무 것도 없음 속에서 머물면서,
그 자체에 호기심을 가져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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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
그것은 어떠한가요?
'무'를 찾고 구하는 가운데, 우리가 발견한 것은 훨씬 더 너른 공간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하면, 공간이 활짝 열립니다.
'무'의 공간은 매우 넓습니다.
그 안에는 자리가 아주 많습니다.
'무' 안에서 머물 때,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이, 결코 실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실재하는 수많은 것들이 그 공간에 존재함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큰 사랑, 대 자비, 크나큰 통찰, 거대한 기운 같은
존재의 참된 특성들입니다.
'무' 안에 내내 존재해 온 이 특성들은 우리가 '무'와 함께 머물 때,
명백해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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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 계속 초점을 두면서 지니는 한 가지 방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무'를 경험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할 때'도 그 질문과 더불어 사십시오.
그냥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 라고 묻기만 하십시오.
'무'는 그것의 모든 특성들과 더불어, 아무리 아름다운 경험이든,
고통스런 경험이든 상관없이, 모든 경험 안에 현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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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거의 모든 경험의 스펙트럼을 통하여, '나'라는 지각[생각]이,
경험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나]'이라는 지각이 또한 존재합니다.
그것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존재의 지각,
'어떤 정체성'의 지각이 거의 항상 존재합니다.
슬플 때는 슬퍼하는 것이 '나'인것 같습니다.
깨달았을 때는 깨달은 것이 '나'인 것 같습니다.
돌멩이가 발등에 떨어졌을 때에는 아파하는 것이 '나'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나'라는 '지각[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경험을 하든 '나'라는 지각'은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 그러한 경험을 '통제하거나 조정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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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리가 있어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경험'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경험을 하고 있고, 그러니 나는 그것을 고치거나 더 좋게 만들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고통'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항상 현존하는 이 '나라는 지각'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로 일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자신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 때문에 야기됩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때는 거기에 대해서 내가 뭔가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유지할 것이지?
하는 문제로 나는 전전긍긍하기 일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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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
자신이 '무(無)'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을 때마다 '나라는 지각'은 줄어들고, '무'에 대한 지각은 늘어납니다.
여전히 '나'라는 지각[생각]이 있지만, '나'는 더 작아지고, '무'는 더 커집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왜냐하면 다루어야 할 '나'는 줄어들고,
아무런 관리도 필요없는 '무'는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무'는 유지비가 아주 적게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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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바로 모든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아차립니다.
천장의 선풍기도 '나'고, 저 그림도 '나'입니다.
모두가 다 '나'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 한계가 없는 것처럼,
얼마나 '큰 존재'인지 또한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행복이고, 세상의 모든 슬픔이며, 세상의 모든 돈이고,
세상의 모든 빈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지극히 적습니다.
모두가 나 자신이니,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고통을 제거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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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첫번째 것을 자기 탐구[불교]로,
두번째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헌신[복종-기독교]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탐구를 통해서는 자신[에고-나라는 생각]이 '무[무아]'임을 깨닫는 반면,
헌신을 통해서는 자신이 모든 것[하나-님]이라는 정체성을 깨닫습니다.
나는 저것이고, 나는 저것이고, 나는 저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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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선악과를 따먹음]'은 마음의 초점을 '문제', 예를 들어 불편한 느낌이나 경험에 맞춤으로써,
'나'라는 것을 창조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문제를 고치려고 애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판단[심판]은 당신의 의식을 좁힘으로써, 불편한 것을 차단하기도 하고,
불편한 것이면 무엇이든 고치려 드는 발판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이때 당신의 모든 호기심은,
당신의 경험은 모두 허용하면서,
거기[경험]에 관심을 갖기[이렇게 사는 것이 평안의 삶입니다] 보다는,
그 경험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 줍니다[이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당신의 주의가 일어나고 있는 것의 일부분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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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문제'를 창조하고 있는데[본래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정체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우리 마음도 뭔가 할 일이 생깁니다.
우리의 문제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죠.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문제'를 가진 사람이고, 그 문제를 풀어야 할 '사람'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나의 본질이고, 내가 '나의 삶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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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현실을 고치려면,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판단은 사실 '우리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아름답고, 심오하고, 만족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아주 '사납고 거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항상 편안하고, 안전하고, 쉬운 형태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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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판단하는 경향'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판단'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아이였을 때, 우리가 배운 판단들은 우리 '존재의 범위와 크기'를 관리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어릴때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끊임없이 점검하는데, 상대적으로 효과가 있었던,
수많은 판단들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존재의 어떤 범위가 수용될 수 있는지를 재빨리 습득 했습니다.
그 범위 바깥으로 벗어날 때면, 어김없이 부모, 교사, 형제 또는 다른 인물들로부터
나무람을 들었지요...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존재라고 부르는 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관리하기 위한
이러한 전략을 자기것으로 소화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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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좋은 판단이든, 나쁜 판단이든, 수많은 판단들로 끊임없이 '존재'를 통제하면서,
그것을 더 좋게 만들려고 듭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판단하지만,
결극에는 자신을 주변 사람들 마음에 들게금 만들거나 고치기 위해,
우리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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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이
의식을 확대시켜 주는 어떤 영적 비법 같은 것에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의 판단에 계속 초점을 맞추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애당초 정해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실제 해결 방안은 얼마나 자주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지를 그냥 '알아차리는데' 있습니다.
'의식'이 애초 취하도록 되어 있는 입장은 사실 더욱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8:03
판단에 대한 진실을 알고나면, 우리는 판단을 제거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쉽지만,
그것은 단지 판단 위에 판단을 쌓는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판단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는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판단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판단 자체를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냥 알아차리기[알아차림]만 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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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이 얼마나 피곤란 것인지를 경험하고, 무슨 경험이든
그냥 경험하도록 '허용'[수용-환영하기]하기만 하면,
의식은 자연스레 확대됩니다.
그렇게 하면 경험이 말할 수 없이 풍성해 집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슬픔을 느낄 수도 있지만,지금 여기에 있는 슬픔 자체를 느끼는 건
아주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슬픔은 진짜니까요...
그것은 '경험의 다른 치원'을 발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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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게 몰두하고 있다가, 한 순간 내내 새가 울고있었음을 문득 알아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자기 경험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알아차림]'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이런 겅험을 하면, 자신이 거기에 압도당할까봐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의식이 어김없이 축소될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경험 안에서 그냥 편안히 쉰다면[쉬어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공허함이나 분노 또는 그와 비슷한 모든 것들이 더 진실하고,
'더 깊이 있는 무엇'으로 채워줍니다.
의식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생생히 '살아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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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험이든 그것과 함께 머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어떤 것도 '당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슬픔과 분노와 고통은 '당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더 가깝습니다.
슬픔은 정말로 그렇게 나쁠까요?
그건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진짜니까요...
그냥 그것 자체에 '호기심'을 가져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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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에 고통이나 슬픔이나 분노라는 딱지를 붙이기 전에, 그것은 어떠한가요?
'있는 그대로를 향한 이 흐름'이 당신의 본질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의식이 확대되든, 축소되든, 아무 상관 없다면,
그것을 '축소시키거나 확대시키려고' 애쓸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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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씀이 없다면 고통도 없습니다.
'축소되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 보십시오.
이 흐름은 어느 쪽으로든 나아가기를 즐깁니다.
자유란,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거기에 당신의 전부를 쏟아 붙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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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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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ttps://www.youtube.com/watch?v=L37bASToAXs
위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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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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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바라봄만이 있을 뿐, 보는 나는 없다.
단지 들을 뿐, 듣는 나는 없다.
보고, 듣는 것에
'나'라는 '해석자'가 개입할 때,
왜곡이 시작되고,
허구의 세계가 창조된다.
그 해석자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대로 믿는다.
그때 우리는 한 그루 나무, 한 송이 꽃,
한 사람의 인간에게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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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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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의식이 행하는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의식이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아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떤 사물을 보거나 만질 때는,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우리를 둘러싼 외계가 자신이 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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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뇌가 외부의 사물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 관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의식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주제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자명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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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의식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으니, 그걸 다시 생각해본다는 게, 이상할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우리가 우리의 의식으로 의식을 연구한다는 게,
흡사 눈이 눈을 연구한다는 것과 같을 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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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의식에 대해 무관심하는 또 다른 이유는 늘 지니고 사는 의식을 너무
쉽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의식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평상시에 의식하는 의식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의식의 전부인 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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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가 평상시에 갖고있는 의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전체 의식에 비하면, 아주 얇은 층에 불과하다.
의식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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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은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심오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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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라는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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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들 보다 앞서, 지금 여기에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깨어 있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늘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대단히 일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난 '광대한 의식'입니다.
경험 도중에도 경험 이후에도, 경험과 경험 사이에도
그것이 항상 , 지금 여기 존재함을 알아차리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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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것들이 이 광대한 의식 안으로 들어옵니다.
수많은 감각들이 당신의 지각을 통하여 지금 의식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수많은 생각들이 이 단순하고도 일상적인 의식 안에서 지금 오가고 있습니다.
또한 감각과 생각 아래쪽에서는 우리가 느낌이라고 부르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욕망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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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감각과 생각과 느낌과 욕망 가운데, 어느 것도
그것들 이전에, 사이에, 이후에 존재하는 이 신비롭고 깨어있는 신성한 존재를
충분히 담을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그 중 어느 것도 당신의 참된 본질을 충분히 담을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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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에 아무리 관심을 주어도 그것들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것들에 당신의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 것은 다른 뭔가를 더 찾게 만들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만큼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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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과 욕망의 계속되는 흐름 너머를 보고,
그것들 보다 훨씬 더 진실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 보십시오.
진정으로 믿을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항상 현존하는 것입니까?
왔다가 가버리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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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항상 여기에 있어왔기에, 너무나 평범하고 친숙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야 말로 완전한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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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 말을 듣고 있습니까?
무엇이 느낌을 느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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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맺어지길 바라는 것, 거리를 두기를 바라는 것,
동시에 둘 다 이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이 일어나는 마당이 되는 이 신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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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까이 바라보고자 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마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카메라로는 그 카메라를 찍을 수 없듯이, 영적인 체험까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이 신비는
당신이 다른 모든 것을 발견했던 방식으로는 찾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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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것을 구하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 당신은 이런 사실이 다소 두렵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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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 신비와 접촉하고 있지만, 거기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묘사하거나 알 수 있는 그 무엇도 찾아낼 수가 없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더 익숙한 것으로, 당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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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알지 못한다는 그것이 사실은 큰 위안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매순간 속에 의식이 존재할 가능성을 허용해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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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무엇으로 관조되기 이전에,
의미를 띠기 이전에,
문제가 되기 이전에,
광대한 의식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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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경계도 한계도 없고, 따라서 우리는 그 깊이와 풍요로움을 탐사하는 일을
결코 끝마칠 수도 없습니다.
그 안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그것의 아름다운 반영입니다.
감각, 생각, 느낌, 경험은 모두 이 광대한 의식으로부터 나온 아름다운 선물들이지만,
의식 자체는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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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식의 표현물들은 체험할 수가 있고,
그것들은 저마다 거대한 신비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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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당신이 거대한 신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는, 더 깊이 그 안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아주 완전하고 충만하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절대 멈추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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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로운 순간의 신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전히 벗겨지지 않은 신비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봉사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봉사를 절대 끝마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살펴보기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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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당신이 살펴보았던 것보다 거대한 신비가 더 있는지? 덜 있는지를요!
매순간 더 많이 있습니다.
당신이 기꺼히 계속해서 바라보고자 한다면,
거대한 신비의 완전히 새로운 차원들이 매 순간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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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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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참나 실현 또는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당신의 주의를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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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있지 않은 것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바로 고통의 원인입니다.
여기에서 '있지 않은 것'이란,
당신의 관념, 믿음, 견해,개념, 욕망, 꿈, 환상등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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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있는 것은 욕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욕망이란 '있지 않는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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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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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에서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당신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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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덧붙일 중요한 세부 사항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있는 것'은 항상 변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당신은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절대 끝마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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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내가 '있지 않은 것'이라고 묘사한 것들은 '있는 것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꿈도 있고, 욕망도 있고, 생각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것들은 다른 것들이 있는 것과 마찬 가지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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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모든 꿈, 욕망, 생각, 개념, 환상, 견해, 믿음 등이 거짓인 것은
그것들이 전체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것들을 환대하면서 그것들이 '거짓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좋은 소식은 그것들이 거짓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즉시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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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을 원해' 이런 간단한 욕망에 대해 살펴봅시다.
이 말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전체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진술이 갖는 모든 면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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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당신에게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진실인가요?
당신이 사랑을 원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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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원합니다.
위 질문에 대답하려면, 당신은 잘 봐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사랑은 현존하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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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술에 대해 또 하나 질문할 것은 '나'라는 관념에 대해서입니다.
당신은 한정된 그릇입니까? 아니면 훨씬 더 광대한 무엇인가요?
사실 당신은 사랑 그 자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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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하려면 당신은 있는 것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생각이나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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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주의를 거기에만 한정시키지 않으면 됩니다.
당신의 주의를 있는 것 모두에게 기울이면,
생각이나 욕망은 당신에게 고통을 야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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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본성은 때로는 진리에 온통 집중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오래된 관념, 욕망, 환상, 꿈 같은
익숙한 마당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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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무슨 생각을 할지, 어떤 욕망을 품을지에 대해 선택권이 없습니다.
당신이 아는 유일한 선택은,
진리를 더 깊이 들여다 볼 것이냐? 외면할 것이냐? 하는 것 뿐입니다.
이 선택은 한 번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거듭거듭 하는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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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있는 것'에 다 내맡기는 순간들을 살다가도, 그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있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갖곤 합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할 수있는 일은 자비를 갖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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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함은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의 감각기관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광대함이 스스로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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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경험하기를 원하는 일에서 광대함은 딜레마에 봉착했습니다.
광대함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딜레마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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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함은 자신이 아닌 무언가를 찾으려 나설만한 것도 전혀 없으므로,
환상을 통해 그것을 창조합니다.
환상을 통해서 스스로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너무 익숙해지다보니,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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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그것은 너무깊이 이 경험에 빠져서, 광대함으로부터 분리된 당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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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진실에 얼마나 많이 깨어있느냐는, 당신의 깨달음 정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진실을 말하는 그 순간, 당신은 즉각 자유롭습니다.
자유로워질 그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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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더라도 이 순간에 '있는 것'에 관한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그때의 불편은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거짓을 믿는 것이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죠.
어떤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건 편해지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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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깨어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과
아직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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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전체 진실을 기꺼히 말하고자 해야 합니다.
현재 있는 모든 것에 정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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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신비 안에 결핍된 행복이 있습니까?
진리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말로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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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아무리 심하게
관념, 개념, 욕망, 신념, 공상, 꿈들에 빠져 길을 잃어버려도,
심지어 깨닫게 되리라는 꿈이나 환상에 빠져 길을 잃어버려도,
진리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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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멈추어서 보기만 하면, 진리는 여전히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깨뜨려진 적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빼앗긴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기 현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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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존재하기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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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도 현재가 아닌 곳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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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할 가능성은 도대체 없으니까요.
당신이 지금까지 들어마시고 내쉰 모든 숨은 현재 순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껏 해온 모든 생각은 현재 순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껏 해온 모든 경험은 현재 순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실재하는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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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매순간에 현존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에서 모든 순간마다 경외로움과 장엄함 속에
충만하게 존재하기는, 겉보기와는 달리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이 순간 속에 존재하면서도 왜 항상 충만하게 존재하지 못하는 걸까요?
무엇이 그 길을 방해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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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생각과 느낌인 것 같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충만하게 존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과 느낌의 존재라기 보다는
더 미묘한 무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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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과 감각을 가지는 것은 이 몸과 마음의 본성입니다.
그것들이 문제라면 단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방법을 터득하기만 하면,
현재에 더 잘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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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과 감각의 그칠 줄 모르는 흐름과 더불어
일어나는 또 다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호' 즉 '더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이런저런 온갖 선호들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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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감각 보다 저런 감각을 더 좋아하고,
불편한 느낌 보다 긍정적인 느낌을 더 좋아하고,
따분하거나 걱정스런 생각보다 심오한 생각을 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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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욕망'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했는데,
그가 가리켜 보인 것이 바로 더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선호'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고, 선호와 욕망은 단지 생각의 또 다른 층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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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왜 선호를 하게 될까요?
왜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것이 되기를 바라고,
그럼으로써 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무엇이 그렇게 되도록 부추기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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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호와 욕망이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유를 가지는, 유일한 경우는,
'나'라는 생각, '나는 무엇이다'라는 생각과 짝을 이루었을 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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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이 몸이라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감각들에 대해,
더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내가 생각과 느낌의 특별한 다발이라면, 그때는 더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완벽하게 의미를 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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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무엇이다'는 관념을 계속 믿는 한 고통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호는 극히 짧은 시간만 만족을 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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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이 '나라는 생각'은 아무 것과도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이 '상상의 나'에게 충성함으로써,
끝없이 고통당하는 길을 기꺼히 가고자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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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알지 못함이라는 경험'과
더불어 남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이라고 불리는 놀라운 신비와 더불어 남겨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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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몸이나 느낌 등과 동일시 하는 것은
이 신비를 축소시켜서, 통제 가능한 무엇으로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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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은
이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
'누가' '무엇'이 이 생각과 경험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라는 답할 수 없는 거대한 질문과 함께 어울려 노는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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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은
이 '알지 못함'의 장소에서 '사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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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신이 발견되는 곳이고,
현재가 발견되는 곳이며,
이 순간에 전체 진실이 발견되는 곳이고,
살아있음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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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자체가 누구 또는 무엇인지에 대한 끝없는 질문 속에서
우리가 기꺼이 살고자 하지 않을때, 이 순간의 생기는 희미해져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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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식으로 거대한 신비를 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삶으로부터 생명을 앗아가 버립니다.
이 '알지 못함'의 장소는 매우 생기 넘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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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이고자 하는 시도 속에서 당신이 구하고 있던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이 거대한 신비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얻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든 것,
살아있음의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의 입장료는
당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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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 마음 속 생각들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 가슴 속 사랑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요구되는 것은 우리 존재의 핵심이, 거대한 신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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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면, 이 알지 못함의 장소와 맞닥뜨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저 거대한 신비를 채우려고 했던 소유물들과 관념들과 경험들에
더 이상 속아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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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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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ttps://www.youtube.com/watch?v=jHKWgWVDe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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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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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의자가 하나 있다.
못은 못대로, 나무는 나무 대로,
목수의 역할은 역할 대로,
이것을 다 빼놓고 나면 의자가 존재하겠는가?
나라는 것도
몸, 마음, 느낌을 다 분해해버리면,
나라는 게 있겠는가?
그래서 무아이다.
조용히 앉아 관찰해 보라.
한 순간이라도 고정되어 있는 나가 있는가?
그렇다면 진정 의지해야 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불리워지는 것은 있지만,
나는 없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강조할 말은 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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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지각''
슬플 때는 슬퍼하는 것이 '나'인것 같습니다.
깨달았을 때는 깨달은 것이 '나'인 것 같습니다.
돌멩이가 발등에 떨어졌을 때에는 아파하는 것이 '나'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나'라는 '지각'이 있습니다.
어떤 경험을 하든 '나'라는 지각'은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 그러한 경험을 통제하거나 조정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이것은 일리가 있어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경험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경험을 하고 있고, 그러니 나는 그것을 고치거나 더 좋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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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통은 항상 현존하는 이 '나라는 지각'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로 일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자신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 때문에 야기됩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때는, 거기에 대해서 내가 뭔가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유지할 것이지?
하는 문제로 나는 전전긍긍하기 일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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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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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는 이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자신이 '무(無)'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을 때마다 '나라는 지각'은 줄어들고, '무'에 대한 지각은 늘어납니다.
여전히 '나'라는 지각이 있지만, '나'는 더 작아지고, '무'는 더 커집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왜냐하면 다루어야 할 '나'는 줄어들고,
아무런 관리도 필요없는 '무'는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무'는 유지비가 아주 적게 듭니다.
2. 고통에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바로 모든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아차립니다.
천장의 선풍기도 '나'고, 저 그림도 '나'입니다.
모두가 다 '나'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 한계가 없는 것처럼,
얼마나 큰 존재인지 또한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행복이고, 세상의 모든 슬픔이며, 세상의 모든 돈이고,
세상의 모든 빈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지극히 적습니다.
모두가 나 자신이니,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고통을 제거해 줍니다.
나는 저것이고, 나는 저것이고, 나는 저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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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라는 깨달음이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든, 모두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 반드시 인간다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때, 여전히 한계를 지닌 '나라는 지각'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고통은 우리 인간성의 범주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인간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고 싶어합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성을 고치거나 제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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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 인간성은 오늘은 어떠한가?
오늘도 '나라는 지각'을 하는 부분이 찾아왔는가? 하는 질문을 던짐로써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은 인간 경험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는데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깨닫지 말아야 할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 매우 인간적인 뭔가를 경험한다 할지라도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초월적인 뭔가를 경험한다고 해도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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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의 삶은 실제로 하나의 긴 깨달음의 과정이었습니다.
뭔가를 깨닫지 못한 순간이 한 번이라고 있었나요?
'나'에 대한 지각이 아무리 하찮을 때라도, 우리는 자신의 '나'됨을 깨닫고 있습니다.
때론 우리의 깨달음은 매우 인간적이고 매우 평범합니다.
그러니 뭔가를 깨닫기 위해 특별한 깨달음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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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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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대개 형상의 죽음을 가리키지만, 죽는 경험은 몸이 죽을 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해온 모든 경험이 이미 죽었고,
지금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이 죽음 속으로 던져지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순간 안에는 탄생 또한 존재합니다.
새로운 순간이 태어나고 있는 것이죠.
순간 속에서 이것을 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되돌아 보면 전에 왔던 모든 것은 지금 죽어 있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의 작동방식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익숙한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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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갖고있는 변화에 대한 개념은 오해입니다.
현실은 사실 변화의 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것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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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뭔가가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뒤를 돌아보고 살피면서,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방식으로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옛 경험은 죽고, 새로운 경험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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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있었던 것과 지금 있는 것 사이엔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고리는 없습니다.
매 순간 당신이 알고 있는 세계는 죽어있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이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시간이라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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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원인이 되는 과거도 없고, 미래의 원인이 되는 현재도 없습니다.
삶은 매순간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이전의 어떤 것에 의해 제한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다음 순간에 무엇이 태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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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우리는 슬픔이 어떻게 '수용'으로 변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 그렇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슬픔은 어떤 것으로도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타고난 '수명'을 끝낼 뿐입니다.
어느 시점에서 그것은 마침내 죽고, 예측 불가능한 다른 어떤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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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던질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
과거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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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소 기묘한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들이 갑자기 의미가 통하게 됩니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것을 변화시키려고 애쓸 때,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이유 같은 것들 말이죠.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있음' 자체는 재활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있음'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옛것을 내던지고, 새로운 것을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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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에 대한 지각은 강력합니다.
현재는 과거에 영향받고, 미래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영향받는 것 같습니다.
그런 환상은 정말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게임에서는 바로 그것이 좋은 '있음'입니다.
하지만 '있음'은 때때로 전에 있었던 것과는 전혀 상응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불쑥 내놓고,
그러면 우리는 혼돈에 빠져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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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상을 유지하게 해주는 방법 중 하나가 기억입니다.
기억은 죽은 순간을 계속 살아있게 하려고 듭니다. 12:11
정신적 외상을 남긴 과거의 끔직한 경험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 순간은 그 경험을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서, 의식이 축소되는 바람에
그 경험은 충분히 체험되지 못한채,
기억이나 몸의 긴장 형태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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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경험 자체와 더불어 존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옆으로 치워놓게 되고,
그리하여 그것은 소화되지 않은채로 남게됩니다.
이러한 전략은 나이가 어려서 경험과 함께 존재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소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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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정신적 외상을 입힌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더 이상 여기에 존재하지 않으며,
당신 또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당신은 그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분이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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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죽은 시체들을 치우기만 하면, 언제나 기분이 밝아지고 가벼워집니다.
더 이상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돌볼 필요도 없고, 먹잇감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일입니까?
죽은 것을 계속 살아있게 만들려고 애쓰는데는 많은 수고가 따릅니다.
어떤 경험, 어떤 상태, 어떤 전망, 어떤 정체성을 계속 살아있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지금까지 그 일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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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나'는 좀비같은 것입니다.
학생인 나, 청소년인 나, 어린 아이인 나는 그저 시체일 뿐입니다.
그것들 안에는 아무런 생기가 없습니다.
모두가 상상 속 이미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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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어떻게 어린 아이인 나, 청소년인 나를 변화시키거나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치유는 이 '나'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이루어 집니다.
당신이 고치려고 애쓰거나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애쓰는 대상은
상상의 시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생기를 불어넣고 고쳐쓰려고 애쓰는 것은 상상의 경험일 뿐입니다.
잘 살펴보면 당신은 그것을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고, 본래 그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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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단순한 깨달음만으로 문제는 끝납니다.
어떤 경험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당신은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이미 '여기에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
원인과 결과라는 특별하고 까다로운 현상으로부터
당신은 자유로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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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이르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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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는 이 순간으로 직접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순간은 과거에서 오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명상과 자기탐구는
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다 주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어떤 것이 태어나고 있음을 당신이 알아차릴 때,
그것은 이미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그렇게 빨리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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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도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만큼, 긴 시간 동안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 길은 직진 길이요, 모든 한계를 단숨에 녹여 없애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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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또 하나의 길은 한 입씩 먹어들어가는 방법입니다.
당신은 소화되지 않았던 모든 경험들을 이런식으로 소화시킵니다.
그 경험들을 다시 불러내어, 당신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흔히 마치 불에 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당신은 어떤 강렬함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은 지금 실재하지 않으므로,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당신은 얼마든지 그것을 다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때 뭔가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그 경험은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안됩니다.
일어나는 기이한 일이란, 그 경험이 전혀 '실재하지 않음'을 당신이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를 베어물어 집어서 삼키기는 하는데,
거기엔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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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험들 중 하나를 소화시키고 나면, 당신은 할결 기분이 가벼워지고,
막힌 것이 다시 흐르는 듯 합니다.
삶이 한결 거뜬해 지고 관계가 더 좋아지는 듯 합니다.
이제는 그만큼 여유가 더 생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과거의 주변을 어슬렁대는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옛 배우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 태어나고 있는 모든 것과 관계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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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마주함으로서 자유로워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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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불교는 죽음을 자유에 대한 참된 '시험대'라고 말합니다. 18:46
죽음을 앞 둔 순간이나 죽음의 순간이나 죽음 이후의 순간에
온전히 평안하고 고요할 수 있다면, 당신은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당신은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셈입니다.
그 지점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은 이 마지막 시험을 위한 최종 예행 연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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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리시는 십대 때 엄청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죽게되리라 확신하였지만,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그냥 누운채로 호기심을 갖고 죽음을 경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죽지는 않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죽음의 경험을 살펴보았습니다.
'죽는 것은 무엇이고,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내 몸은 죽지만 내가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때의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몸이 아님을 깨닫자,
그는 몸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나
감정들에 의해,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되었죠...
그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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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자유를 경험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음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정된 날자보다 앞서서 이 시험을 받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죽고, 무엇이 죽지 않는지?
자진해서 알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매 순간 죽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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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이미 죽은 것들입니다.
모두가 과거의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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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실제로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 집을 떠날때는 가졌다고 확신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알았던 것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것을 알았던 방식으로는 아닙니다.
우리가 집에 도착햇을 때, 집이 아직도 거기에 있다 할지라도,
그 집은 우리가 떠날 당시의 집과 똑같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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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비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고,
그러니 이 순간에 대한 앎은, 지나간 순간에 대한 앎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정체성 또는 '자기 이미지 형성하기'라고 불리는 놀라운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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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온갖 낡은 기억들로 자기의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어떻게든 이 이미지가 삶의 근원, 진실의 근원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잘 탐구해 보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미 죽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뉴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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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기 이미지가 우리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무엇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삶이라고 불리는 이 신비로운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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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미지란
우리가 자신의 마음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좀비같은 것임을 인정할 때,
우리가 자기의 죽음을,
곧 자기 자신의 부재를 인정할 때,
남는 것이 바로 삶입니다.
그럴때 남는 것이
바로 믿을 수 없을만치 생생히 살아있는
신성한 존재입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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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https://www.youtube.com/watch?v=hkoVIyzKAYQ
위 유투브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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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분리의 진실을 보기만 하면 고통은 끝이 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곧 전체임을 보게 되면, 당신은 어떤 경험을 피하려 들거나,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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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모든 것이 멋지겠지만, 당신이 이미 경험 자체이기 때문에,
좋고 나쁨,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당신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족한 것도 없고 불완전한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당신은 이미 모든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당신은 어떤 것도 갈망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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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이 곧 당신이기에 잃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돈입니다.
당신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입니다.
이것을 깨닫기만 하면 이런 것 저런 것을 갈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신은 그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모두가 신의 놀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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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것도 개인사가 아님을 깨달음으로써,
당신은 자신이 그 모두를 얼마나 즐겨왔는지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강렬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필요한 일은 당신이 그 감정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 뿐입니다.
진정한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즐기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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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한계없는 광대한 의식으로 존재하면서,
차가 막혀 화가 나는 것을 경험해 보는 건 정말 멋집니다.
그럴때 의식은 여느 게임을 할때와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차가 막히는게 어떤 건지 한 번 알아봐야지...'
'그래서 내가 한계없는 광대한 의식임을 알아야지...'
'자... 게임을 한 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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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존재하는지, 알아차려 보세요.
어떤 것도 당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쁜 소식처럼 들리겠지만,
더 큰 의미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당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당신입니다.
당신이 '나'라고 생각하는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닐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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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근본적으로 사랑 아니면 두려움, 두 가지 중 어느 한 쪽으로 작용합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허용하는 것이고,
두려움은 거기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이 두가지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자비와 지혜와 평화는 허용의 표현인 반면,
두려움과 의심, 비판, 자만, 분노는 있는 그대로를 거스르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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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이제 난 무엇을 해야할지 알겠어...
이제부터는 있는 그대로에 저항하는 일을 멈출거야...
하지만 이것은 저항에 저항을 더할 뿐입니다.
이제 당신은 저항에 저항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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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는 저항, 두려움도 허용해야 하는 것 중 일부입니다.
다행이 이런 허용은 의식의 본성입니다.
허용은 매순간 거의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대부분의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이러한 허용하기, 곧 사랑의 장소는 두려움조차 품어낼 만큼 공간이 넉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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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비의 또 다른 특성은 경이로움 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느 순간에 어떻게 나타날지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매 순간을 경이로움으로 만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머리로 헤아리며 애쓰는 부담에서 벗어나면, 남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경이로움으로 만나는 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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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자연스럽게 주의가 집중되는데, 이것이야 말로 거대한 신비의 또 다른 특성입니다.
거대한 신비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주의를 집중하고 있으며,
그 일은 한시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거대한 신비가 가진 가장 명백한 특성 중 하나는 그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갑자기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고, 갑자기 슬픔이 찾아 들고, 갑자기 아침에 눈을 뜨고,
갑자기 영화관에 가겠다는 생각이 납니다.
몸이 갑자기 가려워지는 일에서 부터, 재채기가 나오는 일에 이르기 까지,
또한 마음이 갑자기 고요해져서, 경건해지는 순간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이 난데없이 나타납니다. 8:44
모든 생각, 모든 감각, 모든 느낌, 모든 경험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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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비가 예측가능 해지거나 질서정연해지기를 기대한다면,
거대한 신비가 가진 이런 특성은
당신에게 고통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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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신이 있는 그대로에 다 내맡긴다면,
당신 에너지는 거기에 저항하지 않을테니
당신은 그것과 더불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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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렇게 할 때, 놀라운 점은 거대한 신비가 가진 이런 예측불가능성이
커다란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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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신비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종종 몰입상태라고 부르지요.
몰입상태가 되면, 삶이 너무나 쉬어지는데,
그것이 당신의 공이라고 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당신은 애쓰거나 다툴필요도, 심각하게 무엇을 고민하거나,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전략을 짤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냥 일어났을 뿐입니다.
잘 살펴보면, 생각이든, 감각이든, 느낌이든 그것의 근원은
한 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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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돌이켜 보십시오.
지금까지 모든 생각, 모든 느낌, 모든 감각이그냥 갑자기 나타났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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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나'라는 것은 기둥서방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모든 공을 자기 한테로 돌리려 듭니다.
당신이 생각하고 느낀다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모든 생각 모든 느낌은 갑작스럽게 솟아납니다.
어디에서 솟아난 생각인지, 어디에서 나온 느낌인지 그 근원을 찾을 길이 있습니까?
어떤 생각이 나면 그 생각을 당신이 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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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거대한 신비는 절대로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12:36
거대한 신비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면,
미지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자신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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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제는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됩니다.
편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 갑작스러움이 무엇인지?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앎을 놓아버리면, 무엇이 남는지 찾아보기를 권합니다.
지금껏 알아왔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알지 못하는 미지 속으로 뛰어들어가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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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났을 때 보다도 더 아는 것이 없는 미지의 바다에 빠져보십시오.
자신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삶에 맡기면,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발견되지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당신이 인지할 수 있는 무엇도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당신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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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남아있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면서, 호기심을 갖는 것뿐입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순수한 존재, 신성한 존재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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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 마음은 움직이는 원격조정 비디오 카메라와 흡사합니다.
신성한 존재는 진행되고 있는 모든 것을 이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완벽하게 기록합니다.
이 비디오 카메라는 신성한 존재가 스스로를 경험하도록 해주는
매우 편리한 도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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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존재는 이러한 감각 경험을 하기 위해, 몸을 창조하였습니다.
신성한 존재는 사실 우리가 원격조종 비디오 카메라라고 부르는 것의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 둘 다 말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신성한 존재가 비디오 카메라 자체, 곧 당신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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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성한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면, 나로부터가 아니라,
신성한 존재로부터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면 시각이 훨씬 더 전체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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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단지 느낌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만은 것들이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몸,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체 그림의 한 부분 일뿐입니다.
감각, 생각, 느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새로운 관점에서, 순수한 존재의 관점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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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식으로 지금 이 순간이 지금 있는 그대로를 만나는 것을 잘 표현해 주는 단어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는 받아들임과는 다릅니다.
받아들임은 신명도 열정도 없습니다.
설사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본다고 해도,
자꾸만 다시 변화를 열망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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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욕망하기'에는 적어도 드라마와 강렬함과 열정과 활기가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고통을 낳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낳지않는 '욕망하기'가 있으니,
전심전력으로 있는 그대로를 욕망하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완전하게 '긍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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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상태로의 변화를 욕망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열망과 활기를
있는 그대로에 쏟아 부어 보십시오.
그 결과는 즉각적이고 무한한 행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남김없이 충족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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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있는 그대로를 원하는 선택을 하지 않을까요?
너무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간단한 것을 꺼려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원하게 되면,
거기에는 내가 해야할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치러야 할 대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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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있는 그대로를 원한다면,
있는 그대로를 바꿀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누군가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20:18
어떤 것을 바꾸는 것은 당신이 욕망하는 것과는 상반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피할 수없는 어떤 역설과 맞닥뜨리는데,
뭔가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당신의 욕망조차도,
욕망할 필요가 있는 무엇이란 그것이 그것입니다.
그 욕망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배제하면 안됩니다.
일어나는 모든 욕망은 관계에 대한 욕망과, 돈에 대한 욕망과, 진리를 향한 욕망과,
영적인 깨달음에 대한 욕망을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들 또한 똑같은 감사의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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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있는 것은 항상 변하고 있고, 항상 새롭기 때문에,
당신은 절대 감사하기를 긑마칠 수 없습니다.
매 순간이 감사할 수 있는 완벽하게 새로운 기회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일은 전에는 한 번도 일어나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느낌, 생각, 경험은 지금 속에서 언제나 새롭고 신선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감사히 맞이하면서, 열정적으로 그 일을 원하는 것은 언제든 실현 가능합니다.
감사해야 할 거리가 닳아 없어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거나 괴로운 순간을 감사하면서
그 순간 속으로 선뜻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일이 늘 그 모양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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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면,
지금 현존하는 그 모든 고통을 사랑한다면,
고통 속에 꼼짝없이 갇혀버릴 거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있는 그대로에 저항할 때만, 고통은 우리를 칭칭 휘감습니다.
대신에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껴않으면, 삶은 다음 번에 새로운 경험을
자연스레 펼쳐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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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데!' '놀라워!' '정말 재미 있는데!'
그러면 그것들은 고통이라고 불리는 뭔가로 바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거기에 따라 조건 지어진 반응이 나타나더라도
그 두 가지를 완벽하게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이 될 어떤 가능성이든, 즉각 사라져 버립니다.
고통을 베어버리려면 그저 매 순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기로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전혀 복잡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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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일어나든 그것을 열정과 감사로 맞이하기만 하면 됩니다.
매일의 일상은 거대한 신비이며, 여기에는 아무 공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 머물 때, 우리는 어떤 공식도 필요없음을
깨닫는다는 점입니다.
삶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잘 압니다.
거기에 공식 따위는 없습니다.
삶은 지금까지 완벽하게 잘해왔지만,
우리 자신이 지금 여기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를 분입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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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없다'라는 책을 읽어주는 다른 유튜브 녹취록을 아래에 더 소개합니다.
https://cafe.daum.net/happyOK/Lr7r/56?svc=cafe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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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