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파 전원발의 가계소고 ( 菊坡 全元發의 家系小考 ) 2
선생의 행장을 중심으로 ( 先生의 行狀을 中心으로 ) -
강경모(姜慶模)
3. 행장에 나타난 자손록
부인은 상주박씨(尙州朴氏) 정장(挺樟)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낳았으니, 남 한(僩)과 1녀는 판사 김득남(金得男)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권천우(權天佑)에게 출가하였다.
한(僩)은 숙인 안산안씨(安山安氏)와 서천백씨(西川白氏)의 두 부인에게서 해(該), 여 백권(白綣) 여 오순(吳淳), 직(直), 강(强), 근(謹), 여 서한(徐漢), 경(敬), 율(慄), 보적(寶積), 여 고유렴(高有濂), 여 이성동(李盛東)의 7남 5녀를 두었으니, 이들이 용궁전씨의 세거지별 분파조가 되며, 국파 위아래의 사대를 문과 급제자가 끊이지 않은 집안으로 위 사대와 아래로 선생의 행장에 나타난 자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o 문과급제자
1. 전방숙(全邦淑) [생몰년 미상]
생몰년은 기록이 없어 상고할 길은 없지만 부(父) 공열(公烈) 公께서 1236년 (고려 고종 23)에 금오장군(金吾將軍)으로 전라 병마사로 몽골군이 침략했을 때 이를 격퇴한 기록을 보아 대략 이 시기로 추정할 뿐이다.
문과급제로 한림학사를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피봉되셨으며, 용궁(축산 竺山)全氏의 관조(貫祖)이다.
2. 전정민(全正敏) [생몰년 미상]
방숙(邦淑)의 자(子)로 려조(麗朝) 문과급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이르고, 삼중대광 첨의 겸 태사(三重大匡 僉議兼 太師)로 시호는 장절(壯節)이시다.
3. 전충경(全忠敬) [생몰년 미상]
정민(正敏)의 자(子)로 려조(麗朝) 문과에 올라 중정대부 전법총랑(中正大夫 典法摠郎)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시다.
4. 전대년(全大年) [생몰년 미상]
충경(忠敬)의 자(子)로 려조(麗朝) 문과급제로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를 거쳐 중정대부 판도총랑(中正大夫 版圖摠郞)에 이르렀다.
5. 전진(全璡) [생몰년 미상]
충경(忠敬)의 자(子)로 려조(麗朝) 문과급제하여 정순대부 응양군 민부전서(正順大夫 鷹揚軍 民部典書)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로 이곳은 자(子) 원발(元發)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6. 전원발(全元發) [생몰년 미상]
호(號)는 국파(菊坡)이며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으로 고려(高麗) 충숙왕 연간에 문과현량공거(文科賢良貢擧)에 급제하였으며, 원(元)나라에 입국하여 그곳의 과거에 장원을 하였으며 원에서의 벼슬은 금자영록대부 병부상서겸 집현전 태학사(金紫榮祿大夫 兵部尙書兼 集賢殿 太學士)에 이르렀으며 귀국길에 원의 순제(順帝)가 공복(公服) 한 벌을 내리며, “ 고려인(高麗人)은 그 혼일(婚日)에 무소불복(無所不服)이라 하니 이 옷을 후세 자손들에게 전하여 짐(朕)의 뜻이 이르도록 하라” 하였다. 귀국하여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封)하여져 이후부터 용궁전씨(龍宮全氏)의 별호(別號)로 축산전씨(竺山全氏)로 칭(稱)하게 되었다.
7. 전한(全僩) [생몰년 미상]
려말(麗末)에 문과급제로 중직대부 사복시정 한림학사(中直大夫 司僕寺正 翰林學士)로 용궁전씨(龍宮全氏) 관조(貫祖)인 방숙(邦淑)으로부터 6세손이며,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의 자(子)이다.
8. 전직(全直) [생몰년 미상]
한(僩)의 둘째 아들이며, 원발(元發)의 손(孫)이다. 1411년(태종 11)에 내섬시(內贍寺) 판관(判官)·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양주도호부사(楊州都護府使)를 거쳐 1419년(세종 원년)에 병조참지사(兵曹參知事)가 되었다.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서는 세종의 부의(賻儀)로 장지(壯紙) 100권, 양촉(洋燭) 10병(柄)과 관곽(棺槨)을 보내왔다.
9. 전근(全謹) [1380~?]
한(僩)의 넷째 아들이며, 원발(元發)의 손(孫)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군사(郡事)를 역임하였다. 환로(宦路)에서는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졌다.
10. 전경(全敬) [생몰년 미상]
한(僩)의 다섯째 아들로 근(謹)의 아우이다. 문과급제하여 현감을 역임하였다.
11. 전중륜(全仲倫) [생몰년 미상]
부(父)는 한성소윤을 지낸 강(强)이며, 조(祖)는 한(僩)으로 원발(元發)의 증손이다. 벼슬은 조산대부 군자감정(朝散大夫 軍資監正)을 지냈다.
12. 전중권(全仲權) [1405~?]
전원발(全元發)의 증손으로 부(父)는 근(謹)이고, 조(祖)는 한(僩)이다.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이조정랑(吏曹正郎)을 걸쳐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를 역임하였다.
13. 전중양(全仲養) [1407~ ?]
중권(仲權)의 제(弟)이며, 1435년(세종 24)에 문과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郎)·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를 역임하였다.
14. 전영창(全永昌)[1426~1508]
자는 성목(聖穆)이고 호는 우천(寓川)이며, 전원발(全元發)의 현손으로 부(父)는 중권(仲權)이며, 조(祖)는 근(謹)이다. 문학은 일찍이 조성(早成)하여 27세 때인 1452년(문종 2)에 등과(登科)하였으며, 1455년 봉사시 직장(奉常寺 直長)으로 재임 시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선위(禪位) 받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나, 성종대왕(成宗大王)이 찬의(贊儀)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영천(永川)으로 이거(移居)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83세로 영천(永川) 호연정사(虎淵精舍)에서 졸(卒)하였으며, 영천(永川) 입향조(入鄕祖)이다.
15. 전영령(全永齡)[1432~ ?]
영창(永昌)의 제(弟)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역임하였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를 폐하고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정비(正妃)로 책봉할 때 진책사(進冊使)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포상으로 표피(豹皮) 한 장을 하사받았다.
16. 전영귀(全永貴) [생몰년 미상]
전중양(全仲養)의 자(子)이며, 조(祖)는 근(謹)이고 증조는 한(僩)으로 전원발(全元發)의 현손이다. 문과급제(文科及第)로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역임
17. 전영년 (全永年) [생몰년 미상]
전중일(全仲逸)의 자(子)로 조(祖)는 경(敬)이고 증조는 한(僩)으로 전원발(全元發)의 현손이다.
문과급제(文科及第)로 이조좌랑(吏曹佐郎)을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을 역임
18. 전회옥(全懷玉) [1477~1540]
자는 가청(可淸), 호는 성재(誠齋)이며 부(父)는 영창(永昌)이고, 조(祖)는 중권(仲權)이며, 증조는 근(謹)으로 전원발(全元發)의 5세손, 1511년(중종 6)에 문과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를 역임하였으며, 문집(文集) 1권이 전한다.
19. 전이성(全以性) [1577~ 1646]
자는 성지(性之)이며, 호는 운계(雲溪)이고, 증 호조참판 행 부호군(贈 戶曹參判 行 副護軍) 재(縡)의 제2자(子)이며,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 원발(元發)의 9세 손이다. 1606년(선조 39)에 문과에 급제하여 행 통훈대부 종부시정 겸 춘추관편수관(行 通訓大夫 宗簿寺正 兼 春秋館編修官)에 올랐으며, 외직으로는 신녕(新寧)·영천(永川)·고성(固城)·합천(陜川)현감(縣監)과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였다. 고성(固城)에서는 청백(淸白)을 칭송하여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져 있으며, 이괄(李适)의 난(亂)에는 황해도 독향아사(黃海道 督餉亞使)로 이를 평정하여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봉해지고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通政大夫 承政院 都承旨)에 증직되었다.
한산두(韓山斗)·한강(寒岡) 정구(鄭逑)·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은 독실하여 크게 문명을 날린 선비이다. 문집(文集)으로는 『운계집(雲溪集)』이 있으며, 특히 문집 권3과 4는 (해휴록 解携錄) 상(上)과 하(下)로 여기에는 과시(科試)의 사소한 일로 모함을 받아 1610년 겨울에 용성(龍城) 대은(大隱)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부안(扶安)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방면되어, 그동안의 방문자와 격려의 시(詩)·서(書) 등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상주한문학(尙州漢文學)은 “조선사회의 유배문학(流配文學)으로서의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 작품들”이라고 하였다.
20. 전삼락(全三樂)[1562~ 1602]
자는 군서(君瑞) 호는 정와(定窩)이며, 부(父)는 증 호조참판(贈 戶曹參判) 몽룡(夢龍)이며, 조(祖)는 희상(希祥)이고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의 9세손이다. 1588년에 문과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였다.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서훈(敍勳)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예조좌랑(禮曹佐郎)·순안현령(順安縣令)을 역임하고 증 공조참의(贈 工曹參議)이다.
21. 전근사(全近思)[1675~1732]
자는 이원(而遠)이고, 호는 죽림(竹林)이다. 부(父)는 증 대사헌(贈 大司憲) 오륜(五倫)이며, 운계(雲溪) 이성(以性)의 증손으로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의 12세 손이다. 1715년 문과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행 통훈대부 병조좌랑(行 通訓大夫 兵曹佐郎)과 고성(固城)과 직산(稷山)의 二邑을 역임하였으며, 청환(淸宦)이었다.
22. 전명삼(全命三) [1663~ 1720]
자는 석이(錫爾)이며, 호는 야은(野隱)으로 부(父)는 오교(五敎)이며, 조(祖)는 임구, 증조(曾祖)는 이회(以悔)로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의 12세 손이다.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학문은 早發하여 25세에 진사가 되고, 명망(名望)과 문사(文詞)가 일세에 뛰어났다. 1703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郎)과 비인(庇仁) 자인(慈仁)의 현감을 지냈다.
23. 전광제(全光濟) [1677~ 1765]
자는 명겸(明兼) 호는 삼백당(三白堂)으로 부(父)는 희대(僖大)이며,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의 13세 손이다. 1743년 정시문과 급제하였으며 행 봉열대부 충청도사(行 奉列大夫 忠淸都事)를 역임
24. 전희룡(全熙龍) [1765~1822]
자는 용견(容見)이고 호는 포암(匏菴)이며, 부(父)는 우표(宇杓), 조는 상제(商濟)로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의 15세 손이다. 1801년에 문과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예조좌랑(禮曹佐郎)을 역임하였다. 환로(宦路)에서는 염개(廉介)하고 정일(正一)하다고 칭송하였으며, 혹은 염(廉)·용(勇)·고(高) 삼자(三者)로 허(許)하기도 하였다.
25. 전홍교(全洪敎) [1835~1893]
자는 인오(仁吾), 호는 남파(南坡)이며, 부(父)는 지련(智鍊)으로 국파(菊坡)公의 18세 손이다. 1870년에 문과급제하였으며 승문원 주서(承文院 主書)·예조좌랑(禮曹佐郎)·이조정랑(吏曹正郎)을 거쳐 통훈대부 사간원 정언(通訓大夫 司諫院 正言)·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역임하였다.
o 무과급제자
내용생략
o 음사(蔭仕)
내용생략
o 수직(壽職)
내용생략
o 증직(贈職)
내용생략
o 생진과(生進科)
내용생략
국파선생의 행장에 의하면 위아래로 사대 문과급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흔치 않은 일로 용궁전씨(龍宮全氏) 700년 전통이 확립된 이면에는 가학(家學)에 연유한 자손들의 훈도가 어느 가문보다 융성하였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상의 자료는 용궁전씨(龍宮全氏)족보 갑인보(甲寅譜)와 축산승람(竺山勝覽)과 용궁전씨유사록(龍宮全氏 遺事錄)을 참고하여 정리하였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결어(結語)
누구나 한 성씨(姓氏)의 중조(中祖)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더구나 약소국인 고려(高麗)의 궁벽(窮僻)한 강촌 마을에서 태어나 대륙에서 그 뜻을 키운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로, 선생은 중국과 우리나라가 다 같이 왕조변혁기의 혼란한 시기를 살아감에, 거대한 대제국(大帝國)의 황제에게 약소국의 조공감면을 개진할 수 있었던 그 기상, 또한 귀국 후에는 당대 제일의 명필(名筆)이면서도 급변하는 세태에 초연한 자세를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다만, 시작(詩作)과 풍영(諷詠)으로 세상을 관조(觀照)하며 결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중용(中庸)의 도(道)를 실천한 선비였다.
[자료제공] 경북 상주시 농산 전상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