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 1,8-14.22
그 무렵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9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10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
11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3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22 마침내 파라오가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변혁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
(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 사랑”(1요한 3,18 참조)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마태 10,40)
주님!
아침처럼 어김없이 찾아온 당신을 지나가는 행인처럼 무심히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반겨 맞아들여 상처받을 줄을 알고, 부둥켜안고 눈물 흘릴 줄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고 쓰러지신 당신과 함께 아파할 줄을 알고, 더 이상은 당신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찔리고 못 박히신 당신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고,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고,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신부님 푸른잎새님 고맙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아 멘 !
감사합니다 ^^
†아멘~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