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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두 번째 근거: 하박국 2장 4절
2. 신약의 인용: 로마서 1장 17절
(1) 사면초가 오리무중 불가사의
2) 불철주야 노심초사 고군분투
여기서 끝이면 좋은데, 그 후에도 저는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단순히 법정적인 의로 보는 것은 16절의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표현과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두 절 사이에 "왜냐하면"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복음이 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설명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능력"의 의미가 겹쳐집니다. 그래서 단순히 법정적인 의를 뜻한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앞으로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이 되었습니다. 학자들의 해석은 하나님의 의가 법정적인 의미라는 것을 보여주는 17절 하반절과 18절 이하 특히 3장 21절 이하 때문에 막히고, 제 해석은 16절의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표현 때문에 막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엎치락뒤치락하는 그레코로만 레슬링이 시작되었는데 이번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 제1라운드
16절의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표현 때문에 해석이 막혀 하루 종일 연구하고 고민할 때, 저녁때쯤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16절의 "구원"이 학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소조"라는 단어로 "구원하다 save, 해받지 않게 하다 keep from harm, 보존하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다양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1. 병고침(마9:21-22, 막5:23, 28, 34, 10:52, 행4:9, 14:9, 약5:15)
2. 축사(눅8:36)
3. 위험에서의 구출(마8:25, 14:30, 27:40-43, 49, 요12:27, 행7:25, 34, 23:27, 27:20, 31, 43, 빌1:19, 히5:7, 벧전3:20)
4. 칭의(눅1:77, 행15:11, 롬1:16, 10:1-3, 11:11, 14, 26, 고전1:18, 21, 살후2:13, 딤전1:15, 딤후1:9, 3:15, 히2:3, 9-10, 5:9, 7:25, 11:7, 유1:3)
5. 중생(엡2:1-10, 딛3:5)
6. 성화(고후7:10, 빌2:12)
7. 영화(마10:22, 16:25, 24:13, 롬5:9-10, 13:11, 고전3:15, 5:5, 15:2, 엡4:30, 빌3:20, 살전5:8-9, 딤전4:16, 딤후4:18, 히9:28, 10:39, 약1:21, 2:14, 계7:10)
이 중 칭의의 의미로 가장 많이 쓰였습니다. 그러데 그날 저녁, 갑자기 로마서 10장 9-10절이 생각났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기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절부터 읽어보면 칭의를 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9장 31-33절부터 문맥에 주의하며 읽어보면 "구원"이 칭의를 뜻함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이 10장에서와 같이 1장 16절에서도 "구원"이라는 단어를 칭의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원"은 죄의 삯뿐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자유케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 17절에서 3장 27절까지 주로 칭의를 다뤘습니다. 저는 그래서 16절에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구원의 세 번째 의미인 영화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여기서 설명하지 않은 것처럼, 이 단어를 통해 중생이나 성화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추론했습니다. 그리고 16절의 "구원"은 단지 칭의를 뜻하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단지 법정적인 의를 뜻한다는 제 견해를 되살렸습니다. 참으로 아이디어가 기발하지요!
● 제2라운드
그러나 성경연구의 그레코로만 레슬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후로도 "하나님의 능력"(16절)이라는 표현이 저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표현이 고린도전서 1장에도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중 18절을 17절과 함께 읽어보면 "복음"과 "십자가의 도"가 병해을 이룹니다. 십자가의 도는 복음을 뜻하고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라는 말씀은 "복음은 ...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16절과 정확히 같은 말씀이 됩니다. 또, 폴 가드너는 18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미련한 것'과 '지혜'를 비교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미련한 것'과 '능력'을 비교하고, 십자가의 도가 강력하게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일리가 있고 설득력이 매우 강하지요! 때문에 이곳에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죄를 이기게 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단순히 칭의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린도전서 1장 17절 이하와 30절의 "거룩함과 구원함"에 대해 장시간 집중 연구했고 그것을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렸습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17절 이하는 바울이 주로 십자가에 대해 다루었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표현이 칭의와 관계가 있다고 추론했습니다. 또, "거룩함"은 1장 2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같은 것으로 상태가 아니라 지위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구원함"은 원어가 "소조"가 아니라 "아폴뤼트로시스" 즉 속량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로마서 3장 24절에서 칭의와 관련하여 사용했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1:7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골로새서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래서 칭의와 관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외에 이 단어는 로마서 8장 23절에서처럼 주로 몸의 구속 즉 영화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칭의, 성화, 영화로 보는 학자도 일부 있으나 "거룩함"뿐 아니라 셋 다 처음 믿을 때 얻게 되는 신자의 지위에 관한 것들로 보는 학자들이 훨씬 많고 문맥상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견해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비로소 해석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도 30절의 "구원함(속량)"에 대한 저의 설명이 100% 깔끔하게 느겨지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값을 지불하는 것뿐 아니라 해방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정교한 설명을 했으나 완벽하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표현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계속 엄청 고민하고 묵상했습니다. 사실은 연구 초기에도 이 같은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것을 이렇게 넘겼습니다.
''능력'이라는 표현이 칭의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죄인이다. 또,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육체가 없다. 죄를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다. 그래서 바울이 칭의의 복음을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연구를 계속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표현이 계속 되살아났고 끝까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해석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로마서 1장을 초집중해서 문맥에 주의하며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 갑자기 4절의 "능력"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서 "능력"은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또한, "능력"(뒤나미스)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았는데, 모두 실제적인 능력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16절의 능력도 실제적인 능력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5절에 나오는 "믿어 순종케 하나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복음을 믿어 순종케 하기 위해서 전했는데, 16절의 구원이 꼭 칭의만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또, 전에는 17절에 "왜냐하면"(개역개정에는 번역이 안 되어 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보면 17절 후반절과 충돌이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은 이신칭의의 근거구절이고, 믿음으로 받는 법정적인 의에 관한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의가 법정적인 의와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 둘 다 의미한다고 보아도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앞의 "믿음"은 법정적인 의에 대한 믿음, 뒤의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 즉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고 보면 둘 다 믿음을 강조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 보아도 바울이 인용한 하박국 2장 4절과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전에는 18절의 "왜냐하면"(개역개정에는 번역이 안 되어 있음)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18절 이하가 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지 설명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를 통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로 보는 것은 주제를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자세히 읽어보니, 2장에 죄인이라는 것뿐 아니라 회개의 필요성(1-5절)과 행위심판의 원리가 나옵니다(6-11절). 또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얻으리니"
참고로, 이것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구절들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의"를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보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 끝에 제 견해를 포기하고 무와 슈라이너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설교를 다시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또, 새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대지 구성과 그것에 곁들일 설명까지 모두 구상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설교원고를 새로 쓰는 일만 남아있었습니다.
● 제3라운드
저는 서둘러 다시 새로 원고를 작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구상한 대로 원고를 작성하는 일을 시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 무와 슈라이너의 견해의 문제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해석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의 의"(롬1:17)에 대한 제 해석(법정적인 의)은 "하나님의 능력"(16절)이라는 표현 때문에 제동이 걸리고, 슈라이너의 해석은 "하나님의 의"(17절)라는 표현 때문에 제동이 걸립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로마서 1장 17절뿐 아니라 3장 21절에도 나옵니다. 이 중 문제는 3장 21절입니다.
존 스토트는 3장 21절 이하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부분의 핵심 표현은 '하나님의 의'라는 것으로, 우리는 이 말이 처음 나왔을 때, 즉 1:17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 두 구절 모두 그분의 의가 '나타났다'(revealed 또는 made known)고 말한다. 두 구절 모두 '복음'(1:17) 혹은 '율법 외에'(3:21) 나타났다고 밝힘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것임을 나타낸다. ... 그리고 두 구절 모두 우리가 믿음을 통해 그것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두 본문에서 단 하나의 그리고 중대한 차이점은 주동사들의 시제이다. 3:21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과거 시제). 이는 분명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죽으심과 그것의 영속적인 결과를 말하는 완료 시제이다. 반면에 1:17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서 나타나고 있다(현재 시제). 이는 아마도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나타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시제가 다릅니다. 때문에 저는 무나 슈라이너가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만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쓴 주석을 읽고 3장 21절의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로마서 1:17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활동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여기에는 하나님이 약속을 이행하여 그의 백성을 신원하고 구원하시는 그의 종말론적 개입이 포함된다. 인간 편에서 보면, 거기에는 그렇게해서 의롭다고 선고된 개인이 얻은 사면된 신분이 포함된다. 1:17에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의'가 복음의 전도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구원의 의라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변화를 수반한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가리키며 또한 ... 나는 이미 하나님의 의가 두 차원을 가지고 있음을 살펴본 바 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나타난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킨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의는 현재 믿음을 통해 주관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3장 21절의 "하나님의 의"는 분명히 법정적인 의입니다.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보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3장 21절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의 "율법 외에 한 의"에 대해 바울은 22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법정적인 의입니다.
또, 그 뒤 24절까지 보면 그 의가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은" 법정적인 의를 뜻한다는 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속량"과 "값없이"라는 단어도 이것을 뒷받침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단지 법정적인 의를 뜻하고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를 통해 변화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한편, 무와 슈라이너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10장 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에도 두 가지 의미가 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특히, 이 구절의 "복종"이라는 단어를 근거로 자신들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적 활동이라는 뉘앙스는 이 절의 마지막 절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다'는 말 가운데 분명히 나타난다. 바울이 '복종하다'라는 동사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이 자기를 낮추고 순종하며 겸허히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적극적인 힘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내가 로마서 1장 17절에서 주장했듯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가리키며, 이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행위도 포함한다. 이는 10장 3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이곳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자신을 '하나님의 의'에(테 디카이오쉬네 투 데우) 복종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굉장히 그럴듯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원어는 '복종'과 '순종'이라는 단어가 다르지만, 성경저자들은 믿음의 반대를 불순종, 믿음을 순종이라고 주자 말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은 것이 얼마든지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를 믿지 않은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도 그런 의미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결정적인 증거가 못 됩니다.
또, 로마서 10장 2절부터 5절까지 각 구절마다 '왜냐하면'이 들어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라고 했고 그 뒤 "(왜냐하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2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2절이 "왜 그들은 지금까지 구원을 못 받았고, 구원을 받게 해야만 하는가?"를 설명한 것이 되지요!그 이유는 하나님께 열심은 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3절에도 '왜냐하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절에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라고 했기 때문에, 이 구절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지식을 따르지 않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고 복종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의에 무지하여 자기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또, 4절에도 '왜냐하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 구절은 왜 자기 의를 세우려 하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또,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 3장 19절을 상기시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신 이유는, 율법의 유효기간이 주님의 초림 때까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말하면서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갈라디아서 3:21-24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와 같이 믿음으로 받는 법정적인 의인 칭의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 4절에서도 같은 의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그 뒤 5절에도 '왜냐하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바울은 여기서 인용한 레위기 18장 5절을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서도 인용했습니다. 전에도 설명해드렸듯이, 바울이 이 구절을 신약적인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으므로 구약시대와 달리 의식법이 무효입니다. 때문에 복음을 믿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율법을 항상 완전하게 지키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통해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칭의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3절의 "자기 의"와 겹쳐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아니라 법정적인 의를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로마서 10장 3절뿐 아니라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이 구절의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100프로 법정적인 의입니다.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3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의"와 유사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와 "하나님의 의"는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모이세스 실바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의 더 짧은 표현이 "하나님의 의"(롬1:17, 3:5, 21-26 등 여러 곳)라고 했습니다. 무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의 의'(3절)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와 "하나님의 의"는 같은 의입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난 의'("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는 표현이 또 어디에 나옵니까?
로마서 10:5-6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 "
때문에 토마스 슈라이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9절과 로마서 10장 5-6절이 '율법에서 난 의'와 믿음의 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동일한 표현을 공유하기 때문에, 두 본문 모두 비슷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빌립보서 3장 9절에 관한 주석들을 읽어보니 제랄드 호돈, 프랭크 틸만, 로이드 존즈, 모이세스 실바, 로버트 라이트너, 김세윤 교수 등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가 법정적인 의를 뜻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문맥을 보아도 '법정적인 의'로 보아야 마땅합니다.
또, 로마서 10장 5-6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각각 3절의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와 일치합니다. 무의 말도 이것을 뒷받침해줍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16절)와 직접 대조되는 부정적인 개념이다. 그렇게 율법과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는 것'을 이스라엘이 추구했지만 거기에 이르지 못했으며(9:31-32a과 10:3절을 참조하라.) 그것을 버리고 바울은 '하나님께로서 난 의'를 좇은 것이다(빌3:9)."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의 의'이기도 하기 때문에(3절을 보라) 적극적이고 유력한 것으로, 모세가 기록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된다."
이것은 놀랍게도 10장 3절의 "하나님의 의"가 법정적인 의라는 것을 재확인시켜줍니다. 아울러, 무와 슈라이너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상,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법정적인 의를 뜻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 볼 수가 없습니다. 법정적인 의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슈라이너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한편, 여기까지 설교하고 난 이후에 더 정확하게 깨달은 것을 추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와 슈라이너 등 학자들은 로마서 1장 17절의 "나타나서"와 특히 3장 21절의 "나타났으니"라는 단어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로 봅니다. 그래서 저는 내심 불안했습니다. '혹시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을 학자들이 알고 있나? 나만 모르는 것은 아닐까? 내가 무엇인가를 놓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여러 번 성경 본문을 읽고 원어를 살펴보았지만 이 단어를 '계시'로 이해한 저의 해석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또, 그 이상 깨달아지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원고를 마무리하고 그대로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계속 미심쩍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 시리즈 설교의 약점이 될 수도 있어. 일반 목사나 신자들은 몰라도 과연 세계적인 학자들이 읽었을 때 이것을 수긍할까?'라는 염려와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6월 2일 새벽 두 시경이었습니다. 하루종일 설교준비를 해서 정신이 각성되어 있었고 잠이 통 안 왔습니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 뒤척이다가 이것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뭔가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원어를 찾아가며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리한 것을 적어 놓은 후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기도를 하다가 다시 이것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더 많은 이해와 정교한 깨달음이 임했고 제 안에 있었던 의문이 말끔히 해결되었습니다. 그때 깨닫고 정리한 것을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의 "나타나서"는 헬라어로 "아포칼륍토"라는 단어로 "폭로하다, 덮개를 벗기다, 나타내다, 드러내다"라는 뜻입니다. 또, 3장 21절의 "나타났으니"는 "파네로오"라는 단어로 "계시하다, 알리다, 보여주다, 나타내다"라는 뜻입니다. 두 단어는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무와 슈라이너는 이것이 하나님의 행위를 뜻한다고 보았고, 저는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계시를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용례를 보면, 두 단어 모두 주로 '계시' 아니면 예수님의 초림, 재림 등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후자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포칼륍토: 롬1:18, 8:18, 살후2:3, 6, 8, 벧전1:5, 4:13, 5:1 등
파네로오: 막16:12, 14, 요21:4, 고후4:10, 5:10, 11:6, 히9:26, 벧전1:20, 5:4, 요일1:1, 2:28, 3:2, 8 등
그러므로 둘 중 하나의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계시의 의미로 보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계시고(롬16:25, 갈1:12, 엡3:5)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분명히 계시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설명해드린 것처럼 이해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해석은 예수님의 초림이나 재림처럼 단순히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더 나은 정도가 아니라 정확한 해석입니다. 때문에 이 단어들에 이와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됩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나니"(1:18)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오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을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신 일이니 하나님의 행위를 뜻한다고 추론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들이 하나님의 행위를 뜻한다고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단어들은 여기서 그런 뜻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나타났다는 뜻일 뿐입니다.
그러면 "나타나서"는 이런 뜻인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1장 17절을 보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실 무와 슈라이너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상한 주장만 하지 않았으면 길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문백에 너무 분명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문자 그대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믿음으로 이끌고 믿게 만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그것이 곧 이신칭의이고 그 근거가 바로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이 구절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의"가 무엇일까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롭다 하심 즉 법정적인 의를 뜻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같은 것을 다루고 있는 3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바울은 여기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 외에"가 무엇을 뜻할까요? 전 절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고 변화되게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롭다 함은 오직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법정적인 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 뒤 구절들을 통해서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한 의"를 간단히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법정적인 의지요! 또, 그 뒤 바울은 23-26절에서 "하나님의 한 의"를 더 자세히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역시 법정적인 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한 의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법정적인 의 즉 의롭다 하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또, 학자들은 로마서 1장 17절의 "나타나서"와 18절의 "나타나나니"가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고, 같은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즉, 18절의 "나타나나니"가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를 뜻하므로 17절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도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그들의 주장의 강력한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미 설명해드린 대로 둘 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나타난다고 한 것입니다. 또,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나타나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둘 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므로 해석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18절의 "나타나나니"가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이니 17절의 "나타나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다, 이런 생각 자체가 애초에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학자들은 "나타난다"는 단어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는 것을 캐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해석할 필요가 없고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될 것을,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를 뜻한다는 주장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해석이 도리어 이 구절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방해와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가 옳지 않다는 것이 확실히 이해가 되시지요!
이상 설명해드린 것처럼, 무와 슈라이너의 해석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진퇴양난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인 의로 보는 것은 16절의 "하나님의 능력"과 모순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로 보는 것은 지금 설명해드린 것과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이 있는 구절들이 모두 단지 법정적인 의를 뜻한다는 사실과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를 서로 조화시키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해도 불가능했고 깊은 좌절감만 쌓였습니다. 그리하여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연구를 하며 씨름하는 길고 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가 제가 성경을 연구하는 시간 중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