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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화양면 토평리 백곡마을에 위치한 탁영종택 종가. |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 탁영종택이 자리한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백곡마을은 동·서·북 삼면이 트인 야트막한 야산으로 포근히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 개방돼 있는 소쿠리 형국이다.
야산에는 백곡 토성이 있는데 이서고국(伊西古國)의 왕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에서 야산을 넘어 서쪽 500m에 대곡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마을 남서쪽 1.7㎞에서 청도천과 합류하여 흐른다. 마을 1㎞남쪽으로 서출동류로 청도천이 흐르고 그 사이에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탁영선생의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토평리로 증조부인 김서 때 김해에서 청도로 복거하였고 김일손의 부친인 남계(南溪)때 백곡으로 입향했다. 백곡마을 중앙에는 탁영종택이 남향으로 위치해 있고 그 주변으로 지손들의 집이 분포하며 김해김씨 삼현파의 집성촌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청도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한 탁영종택.
김일손은 1464년 1월 7일 청도 북상면 운계리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전 마을 앞을 흐르는 운계천에 무지개처럼 뻗친 서기가 출산 후 며칠간 사라지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탁영종택은 여러차례 개축을 거듭해 건축적으로는 가치가 미흡하나 역사적으로 김일손(金馹孫)의 기상과 내외적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확고한 정신세계가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어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기념물로 (指定)꼽힌다.
종택에는 탁영선생의 문집 등을 보관한 영묘각(永慕閣)과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있다.
또 보관된 문적은 무오사화에 연루돼 희생된 탁영 김일손(1464∼1498)선생과 부인에게 내린 교지 5종과 자계서원에서 의식이 있을 때 그 순서를 적은 홀기 및 둔전답 등본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문인이며, 14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낸 후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몰두하다가, 그 후 다시 벼슬길에 올라 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문제가 돼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있은 후 신원돼 홍문관 직제학을 추증받았으며, 이후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이 문적은 그가 죽은 후 도승지, 이조판서에 추증한다는 내용의 교지와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는 내용을 담은 교지 및 그의 두 부인을 정부인에 올린다는 교지 등이다. 홀기는 자계서원에서 봄,가을에 제사를 올릴 때 쓰던 것이며, '둔전답 경자개양등록'은 서원의 전신인 자계사(紫溪祠)가 1578년 사액서원이 되면서 종전의 둔전답을 고쳐 만든 등본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가계사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탁영종택의 18대 종손은 김상인(49년 생)이며 종부는 김시민(55년생)이다. 이들 부부는 결혼한 지 33년째로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토목을 전공한 종손은 포항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김상인은 3남 3녀의 첫째로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선친께 종손 교육을 받았다. 선친은 조상이 우선이라는 점을 항상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종손으로 태어난 것은 운명이기 때문에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교육받은 대로 아들에게도 '조상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복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조상을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며 틈날 때마다 김일손의 문집을 읽으며 그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그것은 내고외금(內古外今)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
종손은 현재 직장이 있는 포항과 청도의 종택을 오가며 관리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 오가는데, 방문하는 내객이 있거나 문중 행사가 있을 때 외에도 평소 자주 종택에 와서 머무른다고 한다. 종손이 오기 어려울 때는 종부가 와서 집안을 가꾸고 또 제씨(弟氏)도 자주 종택에 들러 거의 사람이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고 여겨도 좋을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다.
김상인은 유가의 후예다운 단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그는 조상의 정신인 내고외금을 되새기며, 선친의 가르침인 "경조효친가화체강(敬祖孝親家和體康)"을 실천하고 있다. 종부 김시민의 집안은 안동 내앞의 의성김씨 학봉가문이다. 김시민은 밝고 긍정적인 성품으로 탁영종택의 안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탁영종택에서 지내는 제사는 명절 차사와 기제사, 그리고 묘사가 있다. 기제사는 4대를 봉사하는데 김일손(1464~1498)을 불천위로 모신다. 차사와 불천위 제사는 종택의 사당에서 모시고, 4대 봉제사는 종손의 거주지 포항에서 지방행사하여 지낸다고 한다. 시절 제사는 정월 초하루와 팔월 추석의 차례를 비롯해 한식·단오·동지 등 모두 다섯 차례다. 이때는 그 시절에 나는 주과포를 사당에 간단하게 진설해 조상에게 올린다. 이렇게 볼 때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는 불천위 제사 두 차례를 포함하여 모두 일곱 차례라 할 수 있다.
김상인은 선친을 이어 종가가 지향해야 할 현실적 삶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것은 봉제사·접빈객에 대한 생각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접빈객의 정신은 자기 형편대로 친절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내 집에 오는 모든 사람이 귀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는 자체가 반가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탁영선생 하신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마음은 옛날 것을 생각하더라도 지금 것은 시대에 맞게끔 해라. 그래서 그 시대의 옷을 입어라'입니다.
그는 "나중에는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문중에서 논란이 많았습니다. 불천위 종손이 화장을 할 수 있냐고?"
하지만 이것이 선구자이고 이 시대에서 진짜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해야 되는 일이 아니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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