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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 정경세와 입재 정종로의 불천위가 모셔져 있는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3-2에 위치한 우복종가. |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3-2에 위치한 우복종택(愚伏宗宅 시도민속자료 제31호)과 대산루(對山樓/시도유형문화재 제156호 )는 진주 정씨 우복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곳이다.
후손들이 이곳에 세거하게 된 것은 영조 26년, 우복 정경세의 덕을 기리기 위해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우복동천 구역을 영조가 사폐지로 하사함으로서 5세손인 정주원(鄭胄源)때부터 대대로 살게 됐다.
당시에는 종택을 중심으로 20여호의 마을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독가촌이 됐다.
정경세는 임란 직후 어지러운 세상에서 관직을 버리고 외서면 우산리에 조그만 정자와 살림집을 짓고 은거했다. 그 후 영조가 정경세가 살던 연고지의 땅을 후손들에게 하사했다.
5세손인 정주원은 정경세 당시의 집을 수리하고 우산서원·서당·정자 등을 짓고 우산동천(遇山洞天)이라 이름 지었다. 정경세가 공부하던 곳을 18세기 후반 그의 6세손인 정종로가 다시 짓고 대산루(對山樓)라 이름 붙였다.
초당과 대산루를 지나 왼편으로 비스듬이 난 가파른 길을 오르면 종택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솟을 대문을 지나 마주한 사랑채에는 산수헌(山水軒)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산수헌에 오르면 우산팔경(遇山八景)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우복선생은 명종때 태어나 류성룡에게 수학했고 선조 때 문과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했다. 영남학파의 4세대 대표자로 추앙받았던 분으로 이황의 학문를 계승하고 17세기 김장생의 주기론적 예학에 맞서는 영남학파의 사상적 지주였다.
이곳에 종택이 지어진 것은 선생이 38세 때,
우복종택은 넓은 산등성이에 동향으로 지어졌다. 집 배치는 튼 ㅁ자 형태로 ㄱ자형 안채와 ㅡ자형 곁채와 함께 ㄷ자 형으로 구성됐고 그 앞쪽에 전면 5칸 측면 1칸의 사랑채가 배치됐다. 그리고 종택좌측에 우복의 6대손인 입재(立齋)정종로의 불천위 가묘가 있다.
종택은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솟을대문을 들어자마자 높은 단 위에 서있는 사랑채를 마주하게 된다. 사랑채는 전면 5칸 측면 한칸으로 안채로의 출입은 별도의 중문을 두지 않고 사랑채를 돌아 안채로 들어가도록 구성했다. 사랑방에서 바로 안채로 통하는 문이 있고 사랑마루에서 바로 안채를 들어다 볼 수 있도록 돼있다는 점에서 내외 구분이 경상도의 다른 집과 조금 다르다.
사랑채 당호는 산수헌(山水軒) 이다. 사랑채가 워낙 높은 곳에 자리 잡다보니 솟을대문이 바로 앞에서 시야를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대청에서 보면 그야말로 산수헌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풍광이다.
우복종택 올라가는 길 우측에는 작은 초가집과 커다란 누각 건물이 있다. 작은 초가집은 계정(溪亭), 뒤에 있는 누각건물이 대산루(對山樓)다. 계정은 대청 한 칸, 방 한 칸으로 꾸미고 지붕은 초가로 올린 단출하면서도 검박한 건물이다. 우복선생이 평소 생활을 위해 꾸민 건물로 우복의 평소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 아닌가 싶다.
계정 뒤쪽에 있는 대산루는 종택보다 주목받아온 건물이다. 우복종택이 소개된 경우는 거의 없어도 대산루는 많이 소개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이층 누정건물로 2층은 흔하지만 2층에 온돌방을 들인 건물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종부 예안이씨에 따르면 우복종가의 고문서는 오래전 대문채에 보관했는데 1948년 화재가 발생해 전적의 상당부분이 소실됐다고 한다. 전전류 가운데는 정경세와 정종로가 남긴것이 많지만 화재 당시 정경세 관련 전적류를 우선 보호하는 과정에서 정종로의 것이 많이 소실됐다고 한다.
현재 우복종택의 제례는 정경세를 비롯해 조선조 성리학자이며 우복의 6대손인 입재(立齋) 정종로 등 두 분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종택에는 두 분의 신주를 한 사당에 모실 수 없어 정경세의 불천위는 가묘에 감실을 설치해 4대봉사하는 조상과 함께 모시고, 정종로의 불천위는 정침 바깥에 별도의 사당을 만들어 따로 모시고 있다.
정경세의 기일은 음력 6월 17일. 제사는 우복종택 정침에서 지낸다. 대부분의 제수 준비는 종손 정춘목(45세. 정경세의 15세손)부부와 노종부 예안이씨가 맡아서 한다. 제수를 도와줄 일손이 없어 대부분의 제수는 종가에서 맡아하고 있다.
해마다 오는 제관의 숫자는 다르지만 대략 30명 안팎, 초헌관은 제사의 주인인 종손이 맡아하며 아헌은 예서에 규정된 대로 주부가 맡아 한다. 종헌은 당일 참석자 가운데 외빈이나 연장자가 맡아하고 나머지 집사자들은 젊은 사람들이 맡는다.
우복종택 14대 종부 이준규(1943년생)는 종가를 지키며 소일삼아 농사를 짓고 있다. 아들인 15대 종손 정춘목은 상주에서 개인사업을 하며 종손역할을 한다.
종부는 예안이씨 집성촌에서 2남 5녀 중 맏딸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고 이준규가 스무살 때 우복종가와 혼인을 맺었다. 남편도 푸근하고 여유있는 사람으로 2남2녀를 두고 다복하게 생활했으나 38세때 교통사고로 작고했다. 이에 이준규는 종가를 지키며 4남매를 키웠는데 "종부로사는게 힘든 것이 아니라 여자 혼자 힘으로 4남매를 키우느라 힘들었다"고 술회한다. 종부로서의 보람은 지손들이 "힘들었다.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라고.
종손 정춘목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 밑에서 종가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혔다. 때문에 그에게 종가의 봉제사 접빈객은 어린 시절부터 일상이었다고 한다. "종손이란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만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훌륭한 조상을 널리 알리는 하지 못하는 점"이 조금 아쉽다고 한다. 세상이 변해가는 만큼 삶의 외관은 바뀌지만 내용만은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말이 종손으로 운명지어진 명가의 삶을 잘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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