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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두 번째 근거: 하박국 2장 4절
3. 신약의 인용: 히브리서 10장 38절
(4) 구원받은 자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수 없다는 말이 참인가?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믿고 구원받은 자라도 뒤로 물러가면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39절에 보면 김빠지게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칼빈(John Calvin)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진리가 우리에게도 해당됨을 주목하자. ... 바로 이것이 참된 영혼의 견인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멸망을 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알버트 반스(A. Barnes)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는 이 구절에서 자기의 편지를 받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배도하지 않는다는 가장 확실한 믿음을 표현한다. 그가 묘사해왔던 것은 하나의 가상적인 경우다.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게 하려고 그리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도 배도한다면 '반드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묘사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할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개가 없는데 '개조심'이라고 써 놓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 성경이 있지도 않은 가상의 위험을 곳곳에서 경고하고 있다는 생각이 과연 정상일까요?
의사들은 수술하기 전 모든 최악의 경우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려주지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까지 말하진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과연 전혀 일어나지 않을 일을 경고할까요?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그런 의미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반대한 장로의 유전이 유대교 전체의 주장이지만 진리가 아닌 것처럼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이것이 왜 비진리인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1) 39절을 통해 38절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는 그 설명을 아더 핑크의 말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3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그런데 아더 핑크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견디어 구원에 이르려 한다면, 인내와 순종의 길에 계속 머물며 충성하고 고난을 견뎌내는 일은 필요 불가결한 일입니다. 이 가르침을 '율법적'이라고 치부하는 자들에게 해줄 말은 이것입니다. '당신네들의 주장이야말로 무율법적이고 방종적이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6:12)
시작이 좋지요! 멋진 설명입니다. 또, 3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아더 핑크는 이 구절에 대해서도 이렇게 썼습니다.
"독자들이여 ... 누가복음 8:13의 '잠깐 믿었다(for a while believed)'의 의미와 대조하여 봅시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여기서 '살리라(shall live)'의 미래 시제는 믿음을 계속해서 행사할 필요성을 공표하고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
성도가 계속해서 믿음을 행사하는 것은 이미 받은 구원뿐 아니라 앞으로 최종적으로 받은 구원에 있어서도 진수가 되는 요점입니다. 영혼이 회개하고(자신을 판단하고) 주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믿어야만 임박한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듯이, 계속적인 믿음의 '행함을 통해서만' 내주하는 죄의 세력과 사탄의 시험들과 유혹하는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설명도 아주 좋습니다. 마치 우리 편 같습니다! 심지어, 그는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의인이라도 스스로 뒤로 물러가 계속 배도의 길을 걷는다면 끝내는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반스(A. Barnes)의 설명을 참조합니다.
'사도는 이 엄숙한 요점을 생각하면서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중요함과, 기독교 신앙을 배반하고 돌아서는 죄책과 위험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이전 상태가 어떠하였거나, 곧 그 전에 어떤 열심과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믿었거나 상관없이 그러한 배도자는 분명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이전 사랑이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 마치 배반한 천사들이 그 전에 드렸던 순종이 영원한 사슬과 흑암의 공포에서 그들을 건져내지 못했던 것과 같다.'"
결정적으로 우리 편 같지 않나요? 그런데 그 후 아더 핑크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여기서 '멸망(perdition)'은 앞 절의 '뒤로 물러감'이 치명적이고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무서운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 중 어느 누구도 38절의 그런 운명에 처할 수 있을 가능성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운명이 덮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임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말짱 도루묵입니다!
그러면 왜 아더 핑크가 잘 나가다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결론을 내렸을까요? 바로 39절 때문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 구절을 보면, 아더 핑크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38절은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일 뿐 아니라 단순히 가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를 말씀드리지요! 우리가 읽는 구약성경은 마소라 사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약을 인용할 때 대부분 70인역에서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70인역 하박국 2장 4절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가 물러난다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처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가 70인역 하박국 2장 4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경진리 자체입니다. 또, 하박국 2장에는 39절과 같은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가정이라고 보는 것이 불가능하고,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설명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 부분은 히브리서 안에서도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6장에 타락한 자들이 버림받아 지옥 가는 것이 나오고, 10장에도 배교자들이 버림받고 지옥에 가는 것이 분명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38절은 가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과 그에게 동조하는 대다수 학자들의 해석은 비성경적인 것이고 매우 그릇된 것입니다.
2) 왜 39절에서 오해하기 쉬운 헷갈리는 말을 했나?
히브리서 저자는 3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것 때문에 38절이 정말로 우리가 아는 그런 뜻인가? 헷갈리고 영 개운하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38절의 진리에 입각해서 신자들을 권면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내용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야. 너희는 절대로 버림받을 수 없어"라는 의미일 수가 없습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렇다면, 과연 39절은 어떤 의미일까요?
39절은 "버림받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뜻이면 앞의 말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38절은 누구도 손댈수 없는 문자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실제로 믿고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박해가 두려워 배교하면 멸망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배교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38절에 근거한 권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권면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 부정적으로 권면할 수 있습니다.
즉 "너희가 구원받았지만 믿음으로 살지 않고 뒤로 물러나 배교하면 멸망이야. 절대로 뒤로 물러가면 안 돼. 그러므로 절대 배교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 이렇게 권면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긍정적으로 권면할 수 있습니다.
즉 "너희는 지금까지 잘해왔어. 능히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천국에 갈 수 있어. 너희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러니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쭉 그렇게만 해라!" 이렇게 권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배교의 위험에 노출이 되어 있으나 과거에 박해를 이긴 경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32-34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에게 긍정적으로 권면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의 과거의 승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이번에도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권면을 빋아들이고 승리할 것을 기대하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있는 성도들을 뒤로 물러가지 않게 하려고 긍정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처럼 이 구절은 그들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여 긍정적으로 권면하고 응원한 것입니다. 결코 배교의 위험이 없거나, 앞 절의 경고가 가상이고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즉, 39절은 긍정적인 권면일 뿐 절대 안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의미를 꿰뚫어보면, 도리어 계속 믿음으로 살아감으로써 버림받지 말고 궁극적인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3) 나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세 가지 사실!
제가 설명해드린 38-39절에 대한 설명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 히브리서 자체의 증거!
39절과 비슷한 것이 6장 9절에도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그 앞절에 나오는 내용과 이 구절이 39절과 굉장히 비슷하지요! 그런데 그때도 신자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무조건 확신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뒤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10-12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없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6장 9절은 성도들이 무조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39절과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한 신뢰에 기초해서 긍정적인 권면을 한 것일 뿐입니다.
사실은 히브리서 저자가 성도들에게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9절이 아니라 11-12절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두 구절 다 구원받은 신자는 버림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 바울 서신의 증거!
바울 서신에 의하면, 바울도 히브리서 저자처럼 일부 교회의 성도들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긍정적인 권면을 했습니다.
빌립보서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 역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모든 교회의 구원받은 성도들을 상대로 이 말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아무 근거 없이 무조건 궁극적인 구원을 확신한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1:3-5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가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바울이 이것을 근거로 확신한 것입니다. 더구나, 6절은 신자들이 절대 안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데이비드 포슨의 말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토론회에서 '너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다 라고 한 빌립보서의 말씀은 어떤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나는 질문한 사람에게 그 구절을 전체 다 인용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마치 그 구절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인 것처럼 인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문장도 아니었던 그 구절은 사실 '우리가 이것을 확신하노니'(1:6)로 시작한다. 그 구절은 하나님께서 맹세한 것이라기보다 사람이 관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것도 아니고 일차적으로 빌립보 사람들에 대한 관찰이었다. 다음 구절은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7)였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확신하다'를 가지고 너무 많은 해석을 해석할 수 있다(이 단어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했기에 인용하지 않은 한 구절의 일부분이었다). 이 단어는 '매우 낙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확실한'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데이비드 포슨의 말처럼 바울은 모든 교회의 성도들을 상대로 이런 확신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도 처음에는 바울을 잘 섬기고 후원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4:13-15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변했고,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미혹될 수 있는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갈라디아서 4:9-11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처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자신의 수고가 헛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 위험이 전혀 없는데도 두려워했을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바울은 모든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칼빈의 주장이 성립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사복음서에 나오는 증거!
저는 이번에는 한 번 믿음은 영원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누가복음 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이것이 가정입니까? 아닙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아더 핑크는 38절을 설명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는 38절이 가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서로 모순입니다.
한 번 믿음은 영원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 역시 10장에서 박해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박해 때문에 뒤로 물러가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달리 39절에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의미로 말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또, 예수님은 종말에 일어날 박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9-13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님이 박해가 있겠지만 너희는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39절에서 예수님과 다르게 말했을까요? 그럴 가능성 역시 제로입니다. 그러므로 칼빈과 그 추종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결코 39절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약의 칭의의 대표적인 근거구절은 창세기 15장 6절과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이 중, 창세기 15장 6절을 신약의 저자들이 세 번 인용한 것에 대한 설명의 하이라이트는 야고보의 인용을 통해 루터의 구원파적인 칭의의 교리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하박국 2장 4절을 신약의 저자들이 세 번 인용한 것에 대한 설명의 하이라이트는 히브리서의 인용을 통해 칼빈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거짓 교리를 박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칭의를 설명하면서, 칭의에 요구되는 믿음이 처음부터 행함(마음의 순종)과 불가분리였다는 것을 통해 루터식의 구원파적인 칭의 교리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칭의의 교리와 견인의 교리는 별개 아닌가?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했다고 하여 칭의의 교리가 칼빈의 견인의 교리를 부정하고 그와 반대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정당하고말고요! 왜냐하면 칭의의 교리는 견인의 교리까지 아우르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를 설교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이들이 '칭의'하면 '이미의 칭의'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학자들을 통해서 밝히 드러난 것처럼, '이미의 칭의'뿐 아니라 '아직의 칭의'가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 책에서 칭의를 세 가지 성경용어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첫째, "의의 선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의의 선물"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을 뜻합니다. '선물'은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와 잘 어울립니다.
둘째, "의의 열매"
빌립보서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의의 열매"을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뒤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의의 열매"는 칭의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참조. 약2:21-24). 이미 얻은 칭의의 은혜 가운데 계속 서 있는 것을 뜻합니다(롬5:2, 고전10:12). 그리고 '선물'과 달리 '열매'는 성령을 힙입어 가지인 우리가 맺어야 합니다.
셋째, "의의 소망"
갈라디아서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소망은 추억이 아닙니다(과거). 현실도 아닙니다(현재). 소망은 목표입니다(미래). "의의 소망"은 미래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의롭다 함 받음을 뜻합니다. 칭의의 완성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는 이것을 우리 목표로 삼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설명하니 칭의가 한눈에 쏙 들어오지요! 이처럼 "의의 선물"을 받은 신자도 "의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의의 소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즉, '이미의 칭의'를 받은 사람도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아직의 칭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칭의의 교리는 견인의 교리를 포함합니다.
또, 신약의 저자들이 칭의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했지만 아브라함이 그때 처음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의 경우도 그때 처음 믿은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서 이신칭의의 원리를 따왔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믿었어도 그 이후 배교하거나 행함 있는 믿음이 없으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칭의의 교리는 견인의 교리를 포함하고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저처럼 칭의를 설명할 때 칼빈이 주장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가 거짓임이 드러나고 박살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고 있는 교수와 목사와 신자들이 칭의의 교리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고 정확하고 깊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