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❸ 반남 박씨 연원 (潘南 朴氏 淵源) 시조 박응주는 박혁거세의 혈손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가 실전되어 정확한 계대를 알 수 없고,고려 고종때 반남현 호장을 지냈으며 시조가 반남호장이 되었을 때 반남현의 촌락은 천호 백호의 집단이면 모두 호장을 두어서 관활(管轄)하게 하였는데 공은 그 중의 일인 이였다. 호장은 향직(鄕職)의 우두머리로 고려 초 성종때, 신라 때부터 지방에 세력을 펴고 있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을 그대로 포섭하여 호장.부호장의 향직을 준데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지방자치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983년(성종 2)에 고려 태조 때의 당대등(堂大等)을 호장, 장대등(長大等)을 부호장이라 고쳤으며, 목종 때는 호장으로 70세가 넘으면 안일(安逸)에 속하게 하였다.신라의 국운이 쇠퇴해지자 정국혼란으로 박씨(朴氏)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반남,고령,죽산,밀양 등지로 분산거주하는 동안 약 280여년간 연락두절되어 신라 경애왕(景哀王,?~927)으로부터 호장공(戶長公)까지 약 280여년간의 사적(史蹟)을 알 수 없어 계통(系統)을 밝힐 수 없다고 한다.
호장공의 4세손 밀직공(密直公)의 계축호적(癸丑戶籍)을 기초로 하여 상계(上系)로 호장공 까지의 계통(系統)을 밝힐 수 있으나, 호장공 박응주의 상계(上系)는 선인(先人)들도 “기선(其先)은 부지(不知)”라 하였으므로 호장공의 4세손 밀직공 박수(朴秀)의 호적에 의하여 추정하면 호장공 박응주는 고려 희종(1205-1211)초 서기 1200년대에 반남에서 성장(生長)해 고려 고종(1214-1259)때에 반남호장(戶長)을 지내면서 반남박씨의 가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호장(戶長)이란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고려 성종때는 향직(鄕職)의 2품이었고,현종 때에는 1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호장은 군(郡),현(縣)의 으뜸가는 행정관(行政官)이다. 따라서 반남박씨의 시조(始組:1세조)호장공은 나주 반남지방 호족(豪族)출신 행정관인 것이다. 반남박씨대종회 기록에 의하면 그 때의 관인이 석천암에 보관 되어 있었으나 서기1740년(영조16) 승려(僧侶)의 실화(失火)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박씨(朴氏)가운데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는 반남박씨는 박응주(朴應珠)의 현손대(玄孫代:손자의 손자)에 와서 가세가 크게 번성하여 명문(名門)으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 판관공파(判官公派)의 낙남(落南) 유래(由來)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신라시조 이후 천년을 내려오면서 후손들이 많이 번성(繁盛)하였고, 신라의 사기(史記)마저 소실(燒失)되어 시조로부터 선조에 이르기까지의 파계 원류(派系源流)를 밝힐 수 없다. 고려 말부터 조선조에 크게 번창하면서 고관(高官)과 대작(大爵)이 연속(連續)되고 명성(名聲)과 덕행(德行)이 세상에 드러나 보이니 모두가 동방의 갑족(甲族)이라 하였다. 이렇게 번영의 일로(一路)를 이어오던 중 단종(端宗)의 손위(遜位)와 세조의 등극(登極)으로 정국이 어지러운 가운데 판관공 파조(諱 秉鈞)가 흥주 판관(洪州判官) 재임 중 시질(時疾)로 조년(早年) 내외분이 일시에 구몰(俱沒)하시니 고애4남매(孤哀四男妹)一男三女-들의 무의무탁의 형편이어서 서울 지방의 백숙이 분육(分育)하였는데 고애자 휘 숙(숙)(1444~1526)이 종고모부 양성인 이중(陽城人 李重)이 안동부사로 올 때(1458년) 15세 어린나이로 따라 내려와 안동 와룡면 가구동(佳邱洞)으로 낙향하여 능성구씨(綾城具氏)가에 장가들어 살면서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시니 이 분이 판관공파 낙남선조(落南先祖)이시다. 또 공은 아들 삼형제 중 첫째분인 사직공(司直公)휘 침(琛), 셋째뿐 판관공(判官公)휘 형(珩)형제분이 1500년경에 영주 조제(助梯)와 두서(杜西)로 이우(移寓)하시고 둘째뿐 가선공(嘉善公) 휘 진(璡)은 안동의 운호(雲湖) 세거하여 가세가 번창하였으며 손자 承任(소고-嘯皐)의 귀현으로 좌부승지로 증직되었다.
그리고 사직공 휘 침(琛)선조는 승장(承張), 소장(紹張)형제분을 두셨는데 유아(惟我) 고란곡(高蘭谷) 개동(開洞)선조이신 가선공(嘉善公) 래길(來吉) 동추공(同樞公)처길(處吉)은 효종 연간에 배탄동(盃呑洞)에서 이거하여 후손들의 입신양면과 향내의 인문개발(人文開發)을 위하여 팔문중(八門中)이 협력해소 현종2년(1671) 난고서당(蘭皐書堂)을 창건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할 때 오문(吾門)에서는 문과 5인과 무과1인의 홍패(紅牌)를 동구의 큰 느티나무에 걸고 천지신명에게 경축(慶祝)하는 고사를 올리고 그 나무를 육인수(六人樹)라 전하였는데, 이 사실은 발군(拔群)의 위적(偉績)이라 난곡(蘭谷)마을(현:고랑골)앞에 육인수기념비(六人樹記念碑)를 건립하였다. 또한. 후손으로 박사룡(朴士龍),사일(思一),명세(命世),숭고(崇古),민고(敏古),상진(詳震)육인은 문과(문과).무괴(무과)에 등과했다. 또한, 소고 승임(承任 1517~1586)은 반남박씨 영주입향조 승지공 (숙)의 셋째분 참판공 형(珩) 후손으로 영주유림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고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선생의 자(字)는 중보(重甫) 호(號)소고(嘯皐), 생원(生員,1540) 진사(進士,1540), 문과(文科,1540) 선호당(選湖堂) 도승지(都承旨) 통정대부(通政大夫)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지제교(智製敎) 구강서원(龜江書院)에 배향 소고문집(嘯皐文集)5권, 문인록(門人錄)1권 성리유선(性理類選) 5권, 퇴계문인록(退溪門人錄), 강목심법(綱目心法)8권9책을 남겼다.
소고선생의 문인록 53인에는 백암(柏巖), 김륵(1540~1616 본관 선성(宣城:禮安의고호), 매포(梅圃) 송복기(宋福基 1541~1605 본관 冶城)를 비롯한 많은 영남의 인물과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소고속집권四, 풍산인 학사 김응조 발문 중에 賢師不世出(현사불세출) 賢弟子不常有(현제자불상유) “어진 스승이 세대마다 나는것이 아니고, 훌륭한 제자도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글귀는 다시 한 번 선생의 고귀한 성품을 헤아릴 수 있다. 반남박씨 판관공파 관작세적(世蹟)으로는 문과(承任 外13人, 진사,생원(檜茂 외 26人) 무과4人은 물론, 유적으로는 구강서원(龜江書院)과 한천서원(寒川書院)등 그 외 많은 문집을 남겼다. 이후로 500년이 넘게 지나온 동안 승지공의 혈손(血孫)이 이만명이 넘으며 영남은 물론 국외까지 문세(門勢)가 뻗어 나가고 있다. 대구, 경북의 반남박씨는 대부분이 공의 후손이며 세거지(世居地)로는 안동, 영주, 봉화, 예천, 문경, 상주, 김천, 성주 그 외에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직장과 삶의 터전을 찾아 옮겨 살고 있다. 현재 반남박씨 판관공파 종중 건물은 영주시 아모르웨딩홀 맞은편 3층 건물이며, 종손으로는 박천주(48세), 현 종중도유사(都有司)는 (전)영주문화원장을 역임한 박찬극(72세), 총무유사 박찬욱(66세)이 활발한 종무활동으로 칭송을 받고 있으며, 금번 취재는 종중 도유사와 영주유선회(儒宣會)전 회장 박헌서(65세)의 많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송인선 실버기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