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以性
仲權之六世孫 宣廟朝 登第 居官廉潔 不爲子孫計 光海時見 斥權貴 歸老田園 金應祖 輓曰 長辭昏濁日 還忤 聖明時 松巷千秋雪 桐鄕萬口碑 官至 宗簿正 持平 仁廟 逆适之亂 以原從一等 贈 都承旨
전이성
전중권의 6세손이며 선조 때 급제하였다. 관청에 근무할 때 청렴하고 깨끗하였으며, 자손들을 위해 이익을 꾀하지 않았다. 광해군 시절을 보면서 권력과 귀함을 버렸다. 나이가 들어 전원으로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김응조가 만사에서 말하길
혼탁한 날에는 영원히 이별하고 거역하는 흐름에서 돌아왔고 어진 임금 시절에는 길가 소나무 위의 오래된 눈과 같은 절개가 있었다.
중국 동향 마을처럼 고성과 합천에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여러 사람이 의견을 모아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도다.
관직은 종부시 정과 지평에 이르렀으며, 인조 때 역적 이괄의 난을 맞아 진압에 공을 세워 원종 1등 공신이 되었으며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출처] 문경군읍지(附 인근군읍지)
자료제공: 문경문화원장 전홍석
◎ 전이성 [ 全以性 ]
본관은 용궁(龍宮)이며 자는 성지(性之), 호는 운계(雲溪)이다. 조선 초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진 원발(元發)의 후손으로 처사 위(緯)의 아들이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에는 부친의 성명이 행(緈)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한강 정구(鄭逑),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606년(선조39)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丙科) 9위로 급제하여 제조랑을 거쳐 다섯 군현의 현감을 지냈으며 그 중 고성과 합천에서는 그의 선정을 기리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광해군 때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다시 벼슬에 올라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임명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직하면서 《광해군 일기》편찬에 참가하였다.
이괄의 난(1624)이 일어나자 황해도 아사(亞使)로서 난을 진압시키는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등록되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문경시 산양면 과곡리에 묻혔다.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용궁면 금남리 훤평서원(喧坪書院)과 용궁면 가야리 가야사우(佳野祠宇)에 제향되었다.
시문집 《운계집(雲溪集)》 4권 2책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1907년에 9세손 학영(學永)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또 관북지방의 민심과 생활상, 풍속 등에 대해 적은 글을 모은〈해휴록 解携錄〉과 부안에 이배되어 있을 때 친지, 그 지방 선비들과 학문, 시사, 정치, 예절 등에 관하여 논한〈심화록 尋話錄〉이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이성 [全以性]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전중권(全仲權)
[문과] 세종(世宗) 14년(143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5위(25/33)
[인물요약]
본인본관 용궁(龍宮)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생원(生員)
관직 군수(郡守)
문과시제 책문(策問):사민지예양(使民知禮讓)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전직(全直)
[조부(祖父)]
성명 : 전○○(全○○)
[증조부(曾祖父)]
성명 : 전○○(全○○)
[외조부(外祖父)]
성명 : 원도(元道)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유찬(柳瓚)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자(子) : 전영령(全永齡)[文]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소장처]
[출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김응조 [ 金應祖 ]
정의
1587(선조 20)∼1667(현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 안동 출신. 할아버지는 장례원사의 김농(金農)이고, 아버지는 산음현감 김대현(金大賢)이며, 어머니는 수의부위(守義副尉) 이찬금(李纘金)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세 때 유성룡(柳成龍)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제 9명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 등을 역임하고, 1634년(인조 12)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다시 지평(持平)·장령(掌令)·헌납(獻納)·수찬(修撰)·교리(校理)·부수찬·집의(執義)·사간·응교(應敎)·승지·호군·공조참의·대사간·한성부우윤 등의 관직을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1637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출입하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해 이를 시행하게 하고, 그 뒤 필요없게 되자 1658년(효종 9)에 폐지하게 하였다.
1638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8조를 건의했는데, 그 중 하나가 ‘명대의(明大義)’로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 고집하면서 교린을 가볍게 단절함을 비판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강(講)을 마치고, 근래에 문교(文敎)가 전폐됨을 개탄하고 학문 권장을 건의하였다.
1656년에는 예조참의로 있으면서 마음을 닦아 본성을 기를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할 것, 문(文)을 숭상해 학문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고, 1659년(현종 즉위년)에는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으로서 행할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4년에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의 군량미 문제로 예조판서 홍중보(洪重普)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현종은 삼조(三朝)를 시종한 신하로 나이 80세이며 먼 영남의 집에 있는 점을 고려해 사면하였다.
문장에 능했으며,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의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사집(鶴沙集)』·『사례문답(四禮問答)』·『산중록(山中錄)』·『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응조 [金應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동향 [ 桐鄕 ]
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의 북쪽에 있는 지명. 춘추 시대의 동국(桐國). 한(漢)나라의 주읍(朱邑)이 동향의 색부(嗇夫)가 되어 소송•부세를 맡아 고을을 잘 다스리니, 마을 사람들이 무덤을 만들고 사당을 세워 받들었던 데서 유래함. 이후 형벌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따르는 고을을 지칭하게 됨.
[네이버 지식백과] 동향 [桐鄕]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종부시정 [ 宗簿寺正 ]
조선시대 종부시(宗簿寺)에 두었던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도제조(都提調: 正一品) 1원[大君·王子가 아니면 除授받지 못함], 제조(提調: 從二品∼從一品) 2원[宗班에서 추천하여 임명]이 있고, 아래로 첨정(僉正: 從四品), 주부(主簿: 從六品), 직장(直長: 從七品) 각 1원으로 되어 있다. 후에 첨정은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종부시정 [宗簿寺正]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