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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비문화 2022. 봄 제39호, pp57~80.>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손병욱
우크라이나 전쟁과 임진왜란
국난 극복에 헌신한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부자父子와 그 후손들
손병욱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一. 들어가면서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제2장에서는 현재 한참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 한반도 상황에 주는 영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해 볼 것이다.
제3장에서는 지난 4월 중순에 한국의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화상연설 시에 보여준 우리 국회의원들의 냉대 내지 냉담한 반응이 지니는 함의가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간주하고 가볍게 지나가기에는 분명히 석연치 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에, 한 번 성찰省察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제4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겪었던, 이보다 더 큰 참극이었던 임진왜란(1592~1598) 시에 국가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한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인물의 아들, 손자를 비롯한 후손들에 대해서도 조명함으로써, '뿌리교육의 중요성' 을 강조하고 그 모범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나아가 우리들 각자가 후손들에게 본받고 싶은 조상, 곧 정면교사正面敎師로 인식되기 위해서 이 가문이 이 시대에 지식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탐구해 보기로 하겠다.
※ 이 원고는 2022년 5월경의 상황을 반영한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언급도 10월 말 현재의 관점에서는 미진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독자들께서 이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시길 앙망한다.
二.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반도에 주는 영향
금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애초의 예상을
깨고 거의 3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앞으로 이 전쟁이 얼마나 더 길게 갈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처음에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하기로는 개전 며칠 안에 러시아가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크라이나를 압도함으로써 수도 키이우를 점령할 것이고, 그러면 우크라이나가 항복을 하리라고 봤다. 그러고 나서 러시아는 젤렌스키를 축출하고 친 러시아파 인사를 새 대통령으로 하는 괴뢰정부를 수립한 뒤에 우크라이나를 실효實效적으로 지배하게 되리라고 여겼다.
주지하듯이 이런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우크라이나가 잘 싸우고 있으며, 도리어 러시아가 궁지에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그럴까? 러시아의 전력戰力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았고, 또 러시아 군인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음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사기가 저하된 데에는 훈련의 부족도 있지만, 우크라이나를 왜 주적主敵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러시아 병사들의 인식이 불충분한 탓도 컸다고 본다.
이 점은 핵을 가진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인들의 사기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아예 주적 관념이 없는 상태에서 첨단무기만 있으면 잘 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게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는 중이다.
우크라이나의 예상 밖의 선전善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는 결사항전 의지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대통령 젤렌스키를 들 수 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미국의 권고를 사양하고 그대로 수도 키이우에 남아서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독려하고 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할 권리가 없다”고 하면서 몸을 사리지 않고 전쟁터를 누볐고, 젤렌스키 대통령 대다수 우크라이나 국민이 그런 그를 믿고 그의 말대로 똘똘 뭉쳐서 불의의 침략자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여러 나라가 이런 우크라이나를 발 벗고 나서서 돕기 시작하였다. 물론, 동맹이 없는 우크라이나로서는 외국군이 직접 참전하는 그런 도움은 받을 수 없지만, 대신 우크라이나 군대와 국민을 무장시키기에 부족하지 않는 막대한 군사 장비를 지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우크라이나 국민은 침략자를 물리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우크라이나 지도자와 국민의 스스로를 돕는 '자조의지自助意志'가 많은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여서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나라의 위기상황 속에서 지도자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하고 있다. 아직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작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게 항복하기 직전 막대한 돈을 챙겨서 가족을 데리고 몰래 해외로 망명한 대통령 '가니' 와 비교해 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가니' 가 도망가니까 아프가니스탄은 마치 사상누각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패배한 국민의 몫이 되고 말았다. 이들 패전국 국민은 세계인의 무관심 속에 그 참상을 견뎌내고 있는 데, 그 시간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참상이 그치기도 쉽지 않지만, 설령 그치더라도 그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 할 것이다.
국가리더의 리더십은 전시뿐 아니라 평시에도 매우 중요하다. 최근 대만의 차이잉원(蔡英文) 정부가 이룬 경제적 성과가 발표되면서 한발 앞서 가던 우리와 극명하게 대비되어 매우 우울하였다. 대만은 코로나19 방역과 경제에 다같이 성공하면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드디어 1인당 GNP가 19년 만에 한국을 추월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지난 정부 리더는 여전히 K방역을 비롯한 국정성과의 자랑질에 여념이 없다. 현황을 무시한 이러한 자화자찬은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국가리더의 자질 문제인데, 그 피해는 잘못 선택한 국민의 몫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대다수 우리 국민은 이 시점에서 우크라이나가 끝까지 선전하여 반드시 러시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몇 년 전 러시아에게 빼앗긴 크림반도도 되찾기를 바란다. 이는 이번 전쟁이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 전쟁의 결과는 그 대로 우리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의 침략을 지지하고 러시아의 승리를 바라는 국가는 그 수가 극히 제한적이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특히 눈여겨봐야 할 나라가 바로 시진핑(習近平)의 중국이다. 러시아의 푸틴과 시진핑은 집권이후 개인적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이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인데, 그 가운데는 그들의 권력 강화와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미국을 견제해야 하고 그러자면 두 나라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이에 고무된 중국은 독립을 외치는 차이잉원의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진단하였 다. 시진핑은 러시아가 승리했듯이, 대만과 싸우면 중국의 승산이 매우 크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그 다음은 중국이 어디로 시선을 돌릴 것인가?
당연히 한반도가 될 수밖에 없다. 대만 점령에 성공한 중국은 미국의 허점을 노려서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내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한국인의 반일감정을 이용하여 한·미간을 이간질 시키고, “미군 물러가라”는 구호가 한국인 사이에서 터져 나오게 한 뒤에 드디어 미군이 물러나면, 북한을 이용하여 그들의 오랜 염원인 한반도 직접 지배의 꿈을 실현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동북공정이니, 중국몽이니 하면서 그 동안 들여온 노력이 드디어 한반도에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친중사대親中事大적이고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펼쳤던 문재인 정권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면 시진핑의 꿈은 그 실현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리라고 봤다. 다행히 3월 9일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되었고, 또 우크라이나가 잘 싸우는 바람에 러시아가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다가 전 세계적으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현재 중국은 매우 당황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시진핑의 중국공산당 정권이 한반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의 꿈을 포기했다고 봐서는 안 된다. 2017년 4월 그가 트럼프를 만났을 때 “한국은 실질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고 말했던 데서 그 검은 속내는 이미 드러났다고 하겠다. 따라서 시진핑은 앞으로도 그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다른 기회를 모색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 늘 경계와 의심의 시선을 거둘 수 없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의해서 남북통일을 이룰 때까지 늘 강렬한 위기의식危機意識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다시 제2의 6.25를 겪을지 모른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목도目睹하듯이 설령 전쟁에서 이겨서 침략자를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침략을 당한 국민이 겪어야 하는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책(不 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겪은 국난 가운 데서도 7년이나 지속된 임진왜란 이후 우리의 선조들이 겪었을 그 후유증의 참상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면서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한·미 동맹을 더욱 강화하되, 한반도의 주인은 우리 국민이므로 스스로 늘 훈련과 정신무장에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를 지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 서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각종 훈련을 등한시한 지난 정권의 5년은 국가안보의 근간을 허물어뜨린 매우 위험한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잘못된 국방안보정책으로 도리어 북한이 핵을 고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三. 젤렌스키에 대한 한국 국회의원들의 냉대, 그것이 알려주는 함의는?
얼마 전(4월 11일) 국회에서 젤렌스키가 우리나라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화상畫像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동안 그가 여러 나라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화상연설 중 24번째 였던 당일 그 자리에 참석한 국회 의원은 50여명 정도로 전체의 20%였다고 한다. 화면에 비친 국회도서관의 좌석이 썰렁하였다. 이전에 세계 각국의 23차례 화상연설에서 그에게 보여준 여러 나라 국회의원의 반응은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뜨거웠다. 대부분의 경우 좌석이 꽉 찼으며, 마지막에는 전원 기립 박수로 호응해 왔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상대적으로 싸늘한 반응을 보인데 대해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참석하지 않은 의원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지난 정부의 종북친중從北親中의 외교노선 때문에 일부러 참석하지 않은 숫자도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국회의 압도적인 다수당인 더불어 민주당 의원들 가운데는 이러한 외교노선에 동조하 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크라이나에 동조하는 것은 중국과 가까운 러시아에 등을 돌림으로써 중국에 반발하는 자세를 드러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참석이 꺼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들의 소신이 그렇다면 뭐라고 할 바는 못 된다.
그렇다면 국민의 힘' 소속 의원들은 어떠한가? 그들로서는 우크라이나의 선전을 마다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만약 러시아의 불의로운 침공이 성공한다면 이는 중국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나아가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의한 남북통일을 겨냥하는 이들에게 지극히 불리하게 작용할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선전이 반갑고 젤렌스키가 고마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정권이 교체된 마당에 거대 야당의 눈치를 봐야 할 이유도 없다.
현재와 같은 우리나라의 분위기, 핵을 고도화하면서 우리를 위협하는 주적을 마주 대하고 있지만 평화무드에 젖어서 아무런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 분위기는 물론 앞 번 정권이 앞장서서 조성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정권교체를 이룬 당 소속 국회의원이라면 이러한 지난 5년간의 외교안보상의 실정失政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러한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지니는 것이 당연하다.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출석율도 매우 저조하였다. 따라서 이번 한국 국회의원의 여야를 불문한 저조한 동참은 조금 시각을 달리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국회의원 대다수의 둔감한 위기의식 말고도 또 다른 이유에서 기인했다고 보고자 한다. 그것은 자기의 본분이행, 곧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바탕한 국리민복國利民福의 원활한 추구를 위한 입법 활동에 열중하기 보다는 당리당략 내지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반증이 아닐까? 만약 평소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조망하고 그 바람직한 방향의 설정에 고민하며, 나아가 나라를 바르게 발전시켜나가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방안과 소신을 지니고 있는 국회의원이라면, 젤렌스키의 존재가 소중하고 돋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의한 남북통일을 위해서 분명히 우크라이나의 선전은 매우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지금 만약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러한 국회의원, 이러한 정치지도자들, 이러한 지도층이 과연 젤렌스키와 그 참모들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필자는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아마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아프가니스탄의 '가니'에 더 가까운 행태를 보여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과거에도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봐 왔다. 특히 대표적인 사례가 임진왜란일 것이다.
그때 어떠했던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전쟁이었음에도 당시 임금을 비롯한 정권담당자들은 무사태평이었다.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그러다가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줄행랑을 놓기에 바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었다. 얼마나 처절했던가? 7년간 전국토가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겨우 명明의 참전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를 넘긴 뒤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다가 다시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었다. 그러고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국권상실로 이어졌다. 36년간 나라 없는 설움을 겪었고 겨우 미국 등의 도움으로 광복을 되찾았지만, 다시 6.25라는 민족상잔의 참극을 겪었다.
6.25 때도 당시 집권층을 비롯한 군 장성들 자제들이 참전하여 전사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고 하였다. 이는 특히 미군들의 경우와 매우 대비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과연 이 시점에 이런 전쟁이 난다면 우리의 지도층 인사들에게서 위의 사례와 얼마나 다른 모습을 목도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
다지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 여전히 힘 있는 자들은 스스로는 물론이고 자녀와 가족의 안전을 먼저 챙길 것이다. 그러면서 나중에 공은 독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 출범 이후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요 근래의 한국 사회 분위기로는 그럴 개연성이 훨씬 더 크다고 본다.
6.25 이후 한·미동맹에 힘입고 또 우리들의 강력한 자주국방의지에 의해서 70년가량 평화가 유지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의 주적은 건재하고 있고 또 핵으로 무장하였다.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기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통일에 의해 북한 동포들의 기본인권을 보장하고 대한민국을 ‘강하면서도 선한 문화국가'로 만드는 가장 최선두에 서서 헌신·봉사해야 할, 이처럼 국권을 수호하고 국민의 생존을 보호할 책임의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평소 지니고 있던 정신자세의 일단을 이번에 드러내고 만 것이다.
참석했다고 해도 남들이 알아 줄 것도 아니지만, 참석하지 않았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계산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습의 최종 책임은 결국 우리 국민에게로 귀속된다고 해야 맞다.
우리 국민이 이 시점에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자기 PR에 능하고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 사로잡힌 채 분명한 자기 철학 없이 대세에 편승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 함량이 미달하는 이들을 국민의 대표로 뽑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앞으로도 제대로 된 의식을 가진 이들을 선량選良으로 뽑을 수 없다면, 우리의 미래는 매우 암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국민의 몫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한 하나의 사례를 너무 침소봉대針小棒大한다고 할지 모르나, 본래 큰일도 그 시작은 작고 미세한 데서 그 낌새가 드러나는 법이다. 그래서 기미幾微를 잘 살피면 곧 앞으로 벌어질 상황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정신 상태는 매우 해이해져서 위험한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필자는 감히 진단하고자 한다.
이에 앞으로 이런 상황을 우려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만의 하나 국난이 닥칠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 보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나의 역사적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四, 임진왜란시 탁계 전치원 부자의 활약과 그 후손들
1. 탁계 전치원과 그 직계 후손들
국가가 위기상황에 처하면 지식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런 질문에 대해 좋은 모범사례가 될 수 있는 한 가문家門을 소개하고자 한다. 임진왜란 때 아버 지와 아들 부자를 비롯한 가까운 친인척들이 창의기병義起兵하여 자기 고장을 지켰고, 여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지만 장본인은 극구 사양한 채 끝까지 자기 할 일을 챙겨서 하다가 간 그런 인물이 있었다. 그의 사례는 이 위기의 시대에 이 땅에 사는 지식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데 큰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본인은 물론이고 아들 손자의 3대에 걸쳐서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산 자취가 기록으로 남아 있고, 그 직계 후손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서 이런 조상 3대를 자랑스러워하며 그 유지遺志를 계승하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 그 리고 이 후손이 그 조상들이 지녔던 유전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것도 흥미로웠다. 여하튼 한국의 현 상황에서 충분히 재조명할 만한 가문이라고 여겨서 기술해 보고자 한다.
바로 현 동명대학교 총장 전호환全虎煥의 14대조인 탁계濯溪 전치원 全致遠(1527~1596)과 13대조 수족당睡足堂 전우全雨(1548~1616), 그리고 12대조 두암斗巖 전형全榮(1609~1660)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울러 전 총장 본인에 대해서도 필자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선조와 연계시켜서 말해 보고자 한다.
2. 창의기병 한 탁계 전치원과 수족당 전우 부자
먼저, 탁계 전치원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
임진왜란 시 창의기병한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은 그 숫자가 50여명이나 되지만, 필자가 특별히 전치원에 주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 때문이다. 첫째는 창의기병 당시에 그의 연치年齒가 매우 높았다는 사실이다. 둘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자기의 향토를 안전하게 지켜냈다는 점이다. 셋째는 본인뿐 아니라 장남과 가까운 친인척들이 대거 의병으로 참여 하였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한다면, 전투 승리 후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한사코 거부하고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는 점이다.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은 전치원의 나이 66세 되던 해였다. 부산에 상륙한 왜적이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인근 고을을 침범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전치원은 자기 스승 황강黃江 이희안李希(1504~1559)의 외손자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1551~1628)와 함께 초계草溪에서 창의기병 하였다. 전치원이 외응장外應將, 이대기가 내모장內募將을 각각 맡았다. 그리고 초계전투와 성주星州 무계茂溪전투에 참여하였고, 이 두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왜적의 초계 침투를 막아 향리를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나중에 권율權栗(1537~1599)이 초계에 도원수부를 두고 전쟁을 지휘하였던 것도 이처럼 초계가 온전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전치원이 창의기병 하던 임진년 6월에 지은 「약서감회約感懷」라는 시(七言四韻)를 『탁계선생문집溜溪先生文集』에서 살펴보자.
세상은 어지럽고 나라는 힘이 기울어, 天地紛紛國勢傾
누가 다시 나라를 일으키고 적을 무찌를까? 中興誰是破虜兵
수모 속에 살아 있는 것 오히려 부끄러운데, 含羞冒恥生猶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다면 죽어도 영광이네, 擧義扶綱死亦榮
나라 위해 군대 호령할 사람 없음이 한스러운데, 許國恨無三令喚
지금 당장 마음 맞는 백 명을 얻었네. 同心今得百人名
홍의장군 진영에 가서 도우고자 하니, 鼓行響應紅衣將
다음날 백마진영에 질풍같이 달려가리라. 明日趨風白馬營
이 시는 그의 14세손 전호환이 소개한 것을 필자가 인용하였다. 이 시에서는 전치원의 문사로서의 자질과 함께 문무겸비지사文武兼備之士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가 국난을 당하자마자 나이를 잊고 이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발발이전부터 나라가 위기상황 임을 인지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신묘년(1591)에 그가 지은「감회感懷」라는 칠언절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시대는 위태로운데, 위기를 타개할 방책을 아직 찾지 못하고,
時危, 未試扶危策
세상은 어지러운데, 어지러움을 구제할 마음은 지니고 있지 못하누나.
世亂, 空藏心
아마 이런 예감은 스승 남명 조식의 훈도 덕분이었을 것이다. 조식은 강렬한 위기의식危機意識의 소유자였고, 따라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과감한 변통책變通策을 건의하는 한편, 제자들에게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평소에 경각심을 불어넣고 있었다.
만약 당시에 임금 선조가 조식의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면,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조선의 승리로 조기에 종식되었을 것이다. 선조왕이 전치원과 같이 전쟁을 예감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거나 왕의 측근 가운데 이런 인물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줄행랑을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이 어린 광해군(1575~1641)에게 분조分朝를 맡긴 선조는 당시 41세로서 25년간 임금으로 재위하고 있었던 연부역강年富力强한 나이였음에도 무기력無氣力하기 그지없었다. 금년 45세인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던 당시 선조의 모습은 우리에게 조선조의 왕실교육과 관련하여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해준다. 선조에 그치지 않고 인조, 고종 등이 나와서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을 보면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이들 조선의 왕들이 자기의 권리만 챙기고 이에 따른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한데 대해서는, 앞으로 바람직한 리더십 교육을 위해서라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전치원은 두 번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도 나라에서 내리는 벼슬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으나 벼슬을 받지 않았다. 벼슬을 할 만한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병장으로 승리한 후에 내리는 벼슬 역시 거부하였다. 사대부라면 누구나 다 선망하는 벼슬을, 그것도 받을 자격을 구비한 뒤에도 한사코 마다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결국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조식의 가르침인 처즉유수處則有守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전치원의 자세는 또 다른 조식의 문인이었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에게서도 발견된다. 왜적을 크게 물리친 후 곽재우는 벼슬을 받기는 하지만 곧 그만두고 만다. 그러고 보면 이들이 공을 세웠음에도 벼슬에 초연한 자세 역시 스승 조식의 훈도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 공동체가 위기에 처하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봉사하지만, 위기상황에서 벗어나면 일체의 공치사를 바라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서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물계자勿溪子를 비롯한 신라 화랑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이 발견되지만, 우리의 역사에서 이런 사례는 흔치 않았다고 하겠다.
전치원은 문·무를 겸비했을 뿐 아니라 예인藝人의 능력까지 갖춘 전인全人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지만 학문의 길을 가고자 하였고, 그래서 이희안과 조식의 훈도를 차례로 받아서 자기의 정신 세계를 형성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서예와 거문고에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의 조선조 선비들은 이른바 군자육예君子六藝인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가운데 예·서· 수 내지 예·서 정도로 인문학적인 식견을 연마하는데 치중하였다. 대신 악·사·어와 같은 예藝와 무武에 속하는 기능들은 경시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전치원이 이들 육예에 두루 밝았음은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전치원이 서예(書)와 거문고(樂)에 심취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타고난 자질이 남달랐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로 하여금 안분지족安分知足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런 심취와 즐김은 그가 세상의 각종 유혹을 이기고 꿋꿋하게 자기 갈 길을 가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그의 아들 전우에 대해서 살펴보자.
초계 의병군에는 전치원의 장남, 조카, 사위, 손서, 그리고 문인 등이 참여하였다. 그와 가까운 친인척과 제자들이 총동원된 셈이다. 그의 장남인 수족당 전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실로 부자가 동시에 참전한 드문 경우라고 하겠다. 전우의 경우, 내모장 이대기 보다 나이가 3살 정도 연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그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6~1623)의 문인으로서 아버지를 도와 의병군 지휘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그 공로로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와 중림도 찰방重林道察訪에 임명 되었고, 『수족당문집』을 남겼다. 전치원의 문무겸비의 능력은 그대로 자기 아들 전우에게로 전승되었다. 전우 역시 아버지를 닮아서 서예와 문장에 능하였다고 한다.
3. 두암 전형과 그 12세손 전호환
임진왜란 이후에 출생한 전우의 아들 두암斗巖 전형全榮(1609 ~1660)은 1636년(인조 14년) 8월 출발하여 1637년 3월 돌아온 조선 통신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정사 임광, 부사 김세렴과 함께 글씨를 잘 쓰는 능서관能書官의 자격으로 일본 을 다녀왔다. 그의 일본사행록日本使行錄인「해사일기海槎日記』가 문집 『두암집』상책 제2권에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이 분실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한 달 반(9월 25일~11월 9일) 정도의 기록인데, 2021년 말에 선문대학교 교수 구지현具智賢이 역주譯註한 단행본이『해사일기』라는 제목으로 보고사에서 출간되었다.
구지현에 따르면, 전형은 조부와 부친이 모두 서법과 시재가 뛰어났던 인물로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와 창석蒼石 이준李埈(1560~1635)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니, 학문의 연원은 서애 류성룡에 있고 가학은 남명 조식에 닿아 있다고 하였다. 그는 1648년 에 진사가 되었으니 사행 당시는 아무런 직위도 없었지만, 부사였던 동명東溪 김세렴金世源(1593~1646)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서 참여하였다. 김세렴은 그의 재주를 높게 평가하여 화국수華國手 곧 '나라를 빛낼 재주' 라고 하였다. 특히 3대에 걸쳐서 뛰어난 서예 솜씨는 유전 적인 영향이라고 하겠는데, 일본인들이 그의 글씨를 서로 얻고자 가는 곳마다 모여드는 바람에 큰 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는 1647년(인조 25년) 김수로왕릉을 보수할 때 묘비문墓碑文을 썼고, 서예교본 『두암법첩』을 남겼다.
전형은 조부와 부친이 목숨 걸고 싸운 일본에 다녀온 기록을 일기 형식으로 남김으로써 당시 일본의 실상을 정확하게 묘사하여 다시는 그런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스스로는 평생 출사出仕하지 않고 합천의 와유헌정臥遊軒亭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산림지사山林之士로서, 자기 조부처럼 처즉유수處則有守의 삶을 살았다.
이들 3대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모두 다 서예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 외에 치열한 기록의 정신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3대가 모두 문집을 남기고 있다. 더군다나 전형처럼 일기를 썼다는 것은 그가 평생토록 자기성찰을 위한 삶을 살았다는 근거가 된다. 일기 쓰기는 스스로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대학』)”하는 성찰의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직계 후손 전호환(1958~)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전치원의 14세손인 그는 430년 후에 합천 용주에서 출생하였다. 이로 미루어 이 가문은 오랫동안 대가야문화권을 그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공대 조선공학과에 진학하여 공부한 뒤에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조선해양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모교의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2016년에 부산대학교 20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2020년까지 재임하였다. 이때 대학 비전과 마스터 플랜을 통해 부산대의 미래혁신 방향을 제시하려고 했고, 그 결과 학부 교육개혁, 최고 연구 환경과 복지환경 조성, 그리고 대학 자율성 실현에 힘을 쏟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2021년 4월 동명대학교 10대 총장으로 부임하여 현재 재임 중이다. 그는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맞춤형의 차별화된 교육체제를 바탕으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실천(Do-ing)하는 인재' 를 육성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실천을 통해 지식과 역량을 기르는 Do-ing 대학'을 제창하였다. 그는 이를 기존의 지식과 이론탐구에 치중하는 한국대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로 자부한다. 무학년, 무학점, 무티칭의 3무無를 중심으로 하는 Do-ing 대학은 도전과 상상, 인성을 갖춘 실천적 지식인의 양성을 겨냥한다. 고전읽기, 외국노래 부르기, 스피치기술, 주식투자, 악기연주, 유튜브, 충·효·예 실천 등 19개 필수과목과 승마, 요트, 경비행기, 100대 명산 오르기, 붓글씨 등 다양한 선택과목을 두어 학생 스스로 선택해 졸업요건을 만족하면 학위를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의 Do-ing 대학 구상은 앞으로 미래세대가 인공지능, 로봇과 함께 살려면 인간만의 기본역량인 도전과 열정, 소통과 공감, 그리고 존중과 배려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의 소신에 따른 것이다. 필자는 그가 반드시 이러한 도전을 성공시켜서 한국 대학교육의 획기적인 변화를 선도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전호환의 이러한 구상은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14대조를 비롯한 역대 조상들의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계지술사繼志述事의 효심孝心과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특히 전호환이 강조하는 '실천' 중시는 바로 전치원이 스승 조식으로부터 전수받은 가르침이기도 하였다. 평 소 조식은 “수신행도修身行道, 궁리치용窮理致用”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서 '진리의 실천(行道)'에 연결되지 않는 수신 지상주의, 곧 수신이 되면 치인은 저절로 된다는 입장은 물론이고, 실제의 쓰임과 무관한 공리공론의 탐구를 중시하는 당시의 주류적인 학문 성향을 적극 비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전호환의 조상들은 그를 통해서 여전히 이 시대에 살아있는 셈이다.
그가 쓴 서예 작품을 보노라면 정식으로 서예를 배운 적이 없음에도 남다른 재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서예는 이 가문의 유전적인 내림이라고 하겠다. 그는 공학자이면서 인문학적인 소양 역시 풍부하다. 아울러 승마, 요트, 행글라이딩(滑空) 등 예·체능 분야에서 두루 재능을 발휘하여 활동하는 것을 보노라면, 창의기병 했던 전치원처럼 문·무·예를 두루 겸비했다는 생각을 해 본다.
五. 나가면서
한반도는 아직 항구적인 평화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지난 정권이 집요하게 추구하였던 종전선언終戰宣言이 결국 국민의 반 대여론 속에서 무산된 데서도 드러났듯이, 우리는 여전히 준전시에 살고 있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의해서 통일될 때까지 이런 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와는 전혀 관련 없는 남의 나라 일이라고 여기고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시대의 금언金言처럼, 이 시대 이 땅에 사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늘 강렬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만일의 사태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아울러 부국강병에 바탕한 국리민복을 꾀하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것이 요청된다. 이런 측면에서 조식의 가르침과 그 문인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들 각자는 자기 윗대 선조先祖들의 발자취 가운데 계승해야 할 요소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에 후손들에게 들려줄 조상의 숨겨진 이야기를 세밀히 챙기는 한편, 스스로도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기억되도록 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할 것 같다. 나중에 후손들이 '나' 의 삶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 큰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 후손들이 반듯하게 잘 살기를 원한다면 내가 후손들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 보다는 정면교사正面敎師가 되도록 살아야 하리라고 본다. 후손들이 나를 닮지 말아야 할 조상이 아닌, '꼭 닮고 싶은 선조'로 기억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뿌리교육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자세로 산다면, 그 자체가 내 인생의 참다운 성공을 담보하는 확실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번 호에서 조명해 본 전치원과 그 직계 후손들의 삶의 궤적과 현황이 제대로 된 뿌리교육을 열망하는 이들에게 어떤 울림으로 와 닿았으면 한다.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섰을 때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봉사한 조상들이 있었고, 그런 선조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지금 현재 그 유지를 받들고자 창의적 자세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후손이 있다면, 이 가문은 이 시대 뿌리교육의 표본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전치원의 후손 전호환을 주목하게 된다. 훌륭한 조상의 후예로서 진정코 성공하는 삶을 살아서 이 시대의 발전에 기여해 주기를 바라며, 지금까지의 삶의 역정으로 보아 틀림없이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신뢰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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