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족당 전선생(全雨) 유허비문 [睡足堂全先生 遺墟碑文]
가원(家源)[퇴계선생 후손]은 일찍이 고조(高祖) 고계부군(古溪府君)의 문집(文集)을 읽으니 완산전씨(完山全氏) 일가(一家)의 문자(文字)가 자못 많았다. 두암문집(斗岩文集)의 서문(序文)과 도계서원(道溪書院)의 봉안문(奉安文) 및 상향축문(常享祝文)이다.
헤아려보면 탁계(濯溪) 수족당(睡足堂) 두암(斗岩) 즉 조(祖)와 자(子)와 손(孫) 삼대(三代)의 높은 충(忠)과 두터운 효(孝)와 깊은 학문(學文)과 뛰어난 필예(筆藝)는 일찍이 칭송하고 공경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제 그 방(傍) 후손(後孫) 상희사현(相希士賢)[전상희]이 수족당(睡足公)의 주손(冑孫) 호열(皓烈)[전호열]과 더불어 삼대(三代)의 문헌(文獻)을 갖추어 수족당(睡足堂)의 유허명(遺墟銘)을 청(請)하는데 내 미주(美洲) 하버드 대학(大學)에서 퇴계선생(退溪先生) 학술회의(學術會議)가 있어 갔다 돌아옴에 있어 다시 물러나지 못함은 대개 선생(先生)의 의(誼)가 중(重)함이 있음이었다.
삼가 살펴봄에 공(公)의 휘(諱)는 우(雨)요 자(字)는 시화(時化)이다.
거슬려보면 그 선대(先代)는 려말(麗末)에 중랑장(中郞將) 집(潗)[전집]이 완산군(完山君)으로 봉(封)함에 그 자손(子孫)이 이로 인(因)하여 관향(貫鄕)으로 하니 공(公)의 9세(九世)이시다.
증조(曾祖)는 영수(永綏)이시니 제령군수(載寧郡守)요.
조(祖)는 인(絪)이니 종사량이(從仕郞)이요.
고(考)는 탁계선생(濯溪先生) 치원(致遠)이니 학문(學問)과 행실(行實)과 순수(純粹)함과 올바름으로 사포서(司圃暑) 별제(別提)로 천(薦)하였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창의(倡義)하여 공(功)을 세워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으로 제수(除授)하였으나 또 불취(不就)하였다.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로 연곡사(淵谷祠) 및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祭享)하였다.
그 외조(外祖)는 성산 이사전(李士詮)이다.
공(公)[전우]이 명종(明宗) 무신(戊申)년 6월 29일에 초계(草溪)의 도방리(道方里)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순진(純眞)한 성품(性稟)과 아름다운 행실로 일찍 정훈(庭訓)을 승습(承襲)하여 문사(文詞)가 성취하였고 필예(筆藝)가 뛰어나며 몸가짐이 엄(嚴)하였다. 남과 더불어 항상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으니 원근(遠近)에서, 많은 사람이 부종(附從)하였다.
너그럽고 평이(平易)하여 견해(見解)를 달리하여 임사처변(臨事處變)에 이치(理致)의 여하(如何)에 따라 판단하였다. 미륜(彌綸)(두루 다스림) 시설(施設)에 남보다 많이 출(出)하여 의표(意表)하였다.
더욱 시(詩)에 능(能)하였고 초고한려(楚苦漢麗)(초나라가 괴로우면 한나라는 아름답다)의 천취(天趣)에 스스로 이르렀다. 그해 12월에 매화(梅花)를 읊어 말하기를
충혼(忠魂)이 연(燕)나라 옥(獄)에서 돌아오지 못함에
한화(寒花)로 화(化)하여 저문 해에 피었더라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사람마다 배속에 간직하고자 하지마는
공중(空中)에 나부끼다 술잔에 떨어지는 것을 다시 배우려무나
심상(尋常) 영물자(詠物者)의 이른 바를 알리라.
아담하고 산수 좋은 곳에 대나무 심고 소정(小亭) 얽어 현판(懸板)을 걸고 말하기를 수족(睡足)이라 하였다. 대개 초당(草堂)에서 봄 잠을 잔다는 뜻을 취(取)함이라 때를 만나지 못한 영웅(英雄)에 넓은 바 있음을 느껴 뜻을 헤아려 가히 알리라
그 쫓아 노는 바가 일대(一代)의 명성(名聲)을 떨친 백곡 정군수(柏谷 鄭崑壽) 오봉 이호민(五峯 李好閔) 이자암(李紫岩) 동계 정온(桐溪 鄭蘊) 같은 선배달사(先輩達士)가 추중(推重)하였다.
임진년(壬辰年)에 왜구(倭寇)가 침략에 이르러 탁계공(濯溪公)은 이미 칠순(七旬)이라 공(公)과 종자(從子)인 제(霽)[전제]를 불렀다.
눈물을 씻으면서 명(命)해 말하기를 돌아보던데 이제 임금의 여련(輿輦)이 몽진(蒙塵)하여 헤매며 생민(生民)이 도탄(塗炭)에 빠져 있는데 우리 집은 세신(世臣)이다. 의(義)로써 마땅히 북쪽으로 머리하여 충서(忠誓)하고 재배(再拜)하여 적(敵)과 싸워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벌써 늙었으니 너희는 서로 협력하여 나로서 미치지 못하는 곳을 보완토록 하라 하였다.
공(公)이 기쁘게 말하기를 신하(臣下)는 임금을 위하여 죽고 자식(子息)은 아버지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직분(職分)이라고 하였으니 삼가 마땅히 명(命)을 받들겠다 하고 칼을 잡고 일어났다.
고을 부노(父老)들이 들고 서로들 말하기를 공(公)은 영남(嶺南)에서 명망(名望) 있는 분으로 어질고 의(義)를 좋아하며 또 지략(智略)이 있으므로 내가 따를 것이니 만사 덮어놓고 참가하자며 소속했다.
수일 동안에 민중이 수만(數萬)에 달하였다 부자(父子)가 분진(分陣)하여 응변(應變)하니 관부(官府)는 완전(完全)하고 창고가 무사히 식량 공급에 무난하였다.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송암 김면(松庵 金沔) 등 제장(諸將)으로 더불어 서로 성원 하였다.
사막(沙幕)에 류진(留陣)하였는데 적(賊)이 어둠을 틈타 강을 덮어 오는데 그 반쯤 건너설 무렵 공격하니 참획(斬獲)이 천여 명이었다. 조정에서 듣고 가상(嘉賞)하여 사축서 별제(司畜暑別提)를 제수(除授)하고 또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을 제수(除授)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경상도 사민(士民)이 상주(上奏)한 글에 의하면 김면(金沔) 곽재우(郭再祐) 전우(全雨) 등이 의병을 일으키기로 합의하여 많은 무리를 얻었다고 하니 내가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더욱 믿을 만한 것은 본도(本道)의 충의(忠義)가 금일(今日)에도 끊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해 9월에 오읍(五邑)의 병(兵)을 거느리고 무계(茂溪)의 적(賊)을 전토(轉討)하였다. 혹은 복병(伏兵)의 계책(計策)을 쓰고 혹은 육박전으로 두드리니 남하(南下)하는 적들이 북(北)쪽으로 달아났다.
병위(兵威)가 더욱 팽창(膨脹)하여 위로는 성주(星州)로부터 아래로는 의령(宜寧)에 이르기까지 적(賊)이 감히 머물지 못하였다. 강(江)의 좌우가 이에 힘입어 전부 살아나서니 이는 공(公) 부자(父子)의 힘이라 하겠다.
이 사적(事蹟)이 선조실록(宣祖實錄) 및 예곡 곽율(禮谷 郭慄)의 일기와 역양 문경호(嶧陽 文景虎)의 유집(遺集) 등 제서(諸書)에 실려있다.
병신(丙申)년에 탁계공(濯溪公)의 상(喪)을 당함으로써 공(公)은 물러나 애희애훼(哀毁)하여 거의 멸성(滅性)에 이르렀다.
공(公)은 병진(丙辰)년 10월 10일에 이르러 고종(考終)하니 향년(享年) 69세이며 매야산(梅野山)에게 장사(葬事)하였다.
공(公)의 선취(先娶)는 남평문씨(南平文氏) 우개(友凱)의 따님이요 후취(後娶)는 남평조씨(南平曺氏) 광서(光緖)의 따님이니 전후(前後)의 소생이 6남 6여이다.
오호(嗚呼)라!
공(公)이 산남(山南)에 하나의 벼슬 없는 선비로 국가(國家)가 위급할 때 공(公)이 적심(赤心)으로 칼을 집고 사지(死地)를 낙토(樂土)같이 달리고 그 물러남을 하였다. 구학(丘壑)을 지킴에 자상하고 공손하고 정밀함이 말없이 평화롭고 일이 있을 때는 이같이 위대(偉大)하였다.
공(公)의 수초(手草)인 시문(詩文)이 병화(兵火)로 인하여 소실(消失)하고 겨우 시(詩) 10여 편과 임진일기 10여조(壬癸日記 10餘條)로서는 그 평생(平生)을 증거(證據)함이 부족하니 슬프다.
대저 순조(純祖) 신사(辛巳)에 증 사헌부지평(贈司憲府持平)을 하고 철종(哲宗) 을묘(乙卯)에 도계서원(道溪書院)에 향사(享祀)하였다.
자손이 번창(繁昌)하여 지금은 남국(南國)에 망족(望族)이 되었다
공(公)의 높은 충성과 아름다운 행실은 중인(衆人)의 전설(傳說)이 있거늘 진실은 쓸쓸하고 고요함에 말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다
명왈(銘曰)
뒤돌아보건대 八溪(초계)의 맑은 흐름이여
수족당(睡足堂)의 높은 발자취를 찾았노라.
초당(草堂)에 봄 잠을 마음껏 잠에
일찍이 와룡(臥龍)을 사모하였노라.
도이(島夷)(일본)가 미쳐 날뜀에
어찌 지사(志士)의 가슴에 묻어 두리오.
부왈(父曰)
슬프다 너희들의 지혜를 다할 것이며 나는 적(敵)에 달려가 싸움의 선봉에 서리라
자왈(子曰)
아버지는 임금을 위하여 죽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하여 죽을 것이며 어찌 불유(不唯)하리오. 명(命)을 이에 받들리라 곧 눈물을 씻어 칼을 집고 달려가서 요충(要衝)에서 적(賊)을 섬멸하겠습니다.
찬금구(贊金甌)의 재조(再造)이여
생방걸(生邦桀)이 사귀웅(死鬼雄)이로다
오직 이 고리(古里)의 유허(遺墟)이여
초목의 향이 영풍(英風)을 뿌렸노라
높은 비(碑)를 다듬어 높은 훈공(勳功)을 표함이여
후인(後人)의 무궁(無窮)한 기림이었노라
여어(余語)이 메마르고 예청비(翳淸悲)이여
실(實)은 이충(彛衷)에 감(感)이 있노라
乙酉年 光復後 初癸亥年 10月 初 吉日
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謹撰
十二世孫 相霖 敬書
[자료제공] 경남 합천군 청은 전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