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송 김경백과 같이 해읍을 유람하다.
인봉 전승업
옛 고을 성지(城池)는 바다의 문 베었고
장기(瘴氣) 띤 풍색(風色)은 앞마루에 둘러있네
일렁이는 큰 물결 아침 해 맞아 붉은데
저문 때 오잠(鰲岑)은 저녁 묘지 사이에 푸르네
회복한 옛 강토 백성들 생업 폈고
베푼 정치 새로운 덕화 물화(物華)는 번성하네
삼춘의 꿈은 일찍이 이곳을 유람함이었더니
오늘 올라와서 속세의 잡념을 씻노라.
與金七松敬白遊觀海邑
仁峰 全承業
古縣城池枕海門
瘴煙風色繞前軒
紅飜鯨浪迎朝日
翠晩鰲岑隔暮墦
地復舊疆民業尊
政宣新化物華蕃
三春夢想曾遊此
今日登臨滌世煩
[출처] 國譯 仁峰 全承業遺稿 [ 譯者 全圭鎬 , 沃川全氏松亭公派宗會 ]
옥천 출신의 인봉(仁峰) 전승업은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700 열사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중봉 조헌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전승업의 자는 효선(孝先),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본관은 옥천이며, 선산 곽씨를 어머니로 하여 1547년(명종 2)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디 과거를 보는데 필요한 글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1568년(선조 2) 증광초시에서 장원하고 선조 5년에 또 급제하였으나, 거듭 회시에서 낙방을 하고, “선비가 참됨을 잃는 데는 과거 시험을 자주 보는 것 같은 게 없다” 하고 과거 공부를 집어 치우고 자신의 인격을 닦는 학문에 힘썼다. 이후, 천거에 의해 중학교수‧동문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의 병이 더욱 심해져 사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