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는 세상에 뻗친 정론(正論)인데 이를 간사하다 말하는가?”라고 하니, 정인홍(鄭仁弘)이 노하여 다시 말을 하지 않았다. 벼슬을 버리고 상주에 돌아가서도 정인홍(鄭仁弘)이 상주의 경계를 지나가면 공(公)이 회피하여 보지 않았다. 이 당시에는 정인홍(鄭仁弘)이 국권(國權)을 천단(擅斷)하여 한결같이 자신에게 역순(逆順)하는 것을 보고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성패(成敗)하여서 사람들이 감히 거스를 수가 없었으나, 공(公)만은 잠깐 사이라도 말을 드러내어 꺾었고, 허물을 저지르는 곳과 가까이하려 곳에는 잠시도 발을 내딛으려 하지 않았으며,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 것같이 여겼다. 설령 정인홍(鄭仁弘)이 서운한 마음을 품어 벼슬길이 곧 막힌다 해도 오히려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의 자립(自立)이 이와 같았다.
공(公)은 성품이 크고 낭랑하며 온화하고 상냥했으며, 모습이 편안하여 바라보면 행실을 쌓은 군자(君子)임을 알 수 있었고, 사물(事物)에 매우 밝고 의리(義理)를 지킴이 바르고 엄숙하였다. 평소에는 나태한 기색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고, 급할 때는 어지러운 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은거할 적에는 이해를 따지는 낯빛을 볼 수 없었고 벼슬을 역임할 적에는 자신을 윤택하게 하려고 계산하지 않았다. 우복(愚伏) 정공(公)이 일찍 공(公)을 칭찬하며 “학식은 고명하고(學識高明) 일 처리는 이치에 합당하다.(處事當理)”고 하였는데, 사실 공(公)의 덕행(德行)을 버려두고 말한 것이지만 과분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어둡고 밝은 때를 지나며 여러 번 나아가고 물러남이 있었고, 있는 대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여전히 세상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 바가 있었지만, 자신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거취(去就)를 신중히 하고 돌아가 그 몸을 깨끗이 하여, 다시 중요한 관직(要職)에 부름을 받은 적이 많았으나 조정에 있었던 날이 적었기 때문에 끝내 나이가 이르러도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었고, 가진 것을 기울여 국정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이미 늙어서는 단지 출사(出仕)의 명만 받고 세상을 떠났으니, 공덕(功德)을 논하는 자들이 지금까지 애석하게 여긴다. 공(公)의 학문은 대개 여러 경전과 사서(史書)를 박통(博通)했고 더욱이 『호씨춘추(胡氏春秋』에 깊었으며 유문고(遺文稿) 약간 권(若干卷)을 집에 소장하고 있다.
전배(前配)는 강화최씨(江華崔氏)인데 자식이 없었고, 후배(後配)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인데 3남 1녀를 낳았으니, 극항(克恒)은 문학(文學)이 있었고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으며 병자년(1636년 인조 14년) 난리에 순절(殉節)하였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둘째아들 극념(克恬)은 감역(監役)이고, 셋째아들 극행(克㤚)은 유학(儒學)을 공부했으며, 사위는 황덕유(黃德柔)인데 군수이다.
측실(側室)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극침(克忱), 극징(克憕), 극칭(克𢜻)이며, 사위는 강유(康鍒)인데 생원이고 다음은 류지수(柳之洙)인데 생원이다.
극항(克恒)은 적자(嫡子)가 없고 아들은 아우 극념(克恬)의 아들 후(
)이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숭(崈)이다.
극념(克恬)은 2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학(嶨)이고 다음은 후(
)(극항에게 양자)이며 사위는 이학(李皬)이고 다음은 이채(李埰)인데 별검(別檢)이며 다음은 김학기(金學基)이고 다음은 황무(黃袤)이다.
극행(克㤚)은 아들을 하나 두었으니 금(𡼲)이다. 황 씨에게 시집 보낸 딸은 3남 3녀를 두었으니, 빈(霦)은 생원이고 다음은 연(壖)이며 다음은 정(霆)이고, 사위는 홍여하(洪汝河)인데 사간이고 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다음 성석하(成錫夏)이고 다음은 장만기(張萬紀)인데 현감이다.
극징(克憕)의 아들은 성(峸)이다.
극칭(克𢜻)의 아들은 계(𡹘)이다. 내외 손과 증손과 현손 남녀를 붙이지 못한 자가 또한 10인이다.
삼가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며 평생 규범으로 삼은 바를 서술하여 평소에 계획한 바와 직책을 역임한 것을 홍문관과 태상(太常)에 첩(牒)을 조치하오니, 시법(諡法)을 고찰하여 시호(諡號)를 내려 예(禮)를 성립시켜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예문관제학(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經筵義禁府事 藝文館提學) 권유(權愈)가 짓는다.
나.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시장(諡狀)에 나타난 활동 자료
(1) 시장(諡狀)에 나타난 임진왜란 시 의병활동
“기축년(1589년 선조 2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남구(南寇, 일본을 가리킴)의 난이 일어났는데, 공(公)은 아직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개연히 국난(國難)을 도모하는 뜻이 있어, 진사 강주와 함께 창의하여 선비들을 모아 험한 지역에서 수십 명의 적을 격살하고, 혹 적이 기회를 틈타 진퇴(進退)할까 염려하여 공(公)이 대의(大義)로서 이끌며 더욱 힘을 쏟으니, 선비들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좌의정 김응남이 이를 듣고 기특하게 여겨 연원찰방 천배(遷拜, 추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시 영남의병 창의군 참모와 활동]
1592년 4월 13일 부산진에 왜적이 대거 침범하였으며 4월 14일 부산이 함락되었다. 왜적의 침임이 상주에 알려진 것은 4월 14일이다. 왜군은 4월 24일 상주에 도착하였으며, 4월 25일 상주에 침입하여 상주북천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 전식(全湜)은 초배위 강화최씨와 사별한 뒤 후배위 남양홍씨를 맞으며 노동으로 분가를 한 상태였다.
왜적이 이미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친족들과 홍씨를 율원으로 피난시켰으며, 객년(客年)에 부친상을 당한 아버지 전여림은 옥천 산중 여막(廬幕)에서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도적들에게 죽을지언정 자식으로 상중의 도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여막(廬幕)을 지켰다. 5월에 상주가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부친을 설득하여 중모로 모셨다.
그리고 전식(全湜)은 함창으로 올라가 진사 강주(姜霔)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였으며, 군관 정범례가 함께 하였다. 5월 27일 강주, 정범례와 함께 왜적의 길을 가로 막고 적병 28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 시기에 상주의 선비들이 뜻으로 모아 의병대를 창병하기 시작하였다. 우복 정경세도 부친상으로 두 해째 여막(廬幕)살이 하는 상중이었으나 상복을 입은 채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여막(廬幕)을 나온 정경세는 피난민을 호송하였다. 이 때 왜적의 공격으로 어머니와 동생을 잃었다.
7월 30일 문경, 함창, 황령동 골짜기에서 이봉을 주장으로 하는 창의군이 발의 되었다. 이들은 상주에서 발의 한 상의군과 구별하여 함창에 발의되고 진을 두었다 하여 창의군이라 이름 지었는데, 정경세와 조정 등과 같이 이전에 상의군을 일으켜 활약했던 선비들도 몇몇이 포함되었다. 전식(全湜) 역시 무사 정범례를 앞세워 함창에서 강주(姜霔)와 함께 발의한 향병을 이끌고 창의군진으로 들어와 참모로서 군사작전계획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창의군은 상주 함창지역의 전식(全湜)을 비롯하여 정경세, 조정, 권종경, 이시화, 채중구, 조심중, 권여운, 송연명 등을 포함한 40여인의 선비와 이봉이 청주에서 데리고 온 궁수 17〜18인을 포함한 50여 인이 함께 뜻을 모았다.
이렇게 결성된 창의군은 놀라운 기세로 왜적과 맞서 싸웠으며, 백성들과 재산을 지켰다. 이러한 활동에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도움이 컸다. 창의군이 결성하여 활약한지 약 한 달 만에 황간에 있던 적들이 철수하였다.
1594년(선조 27년)에 이르러 겨우 전쟁이 종식되었다. 1596년(선조 29년) 2월에 좌의정(左議政) 김응남(金應南)이 평소 전식(全湜)의 학문과 재능, 그리고 전쟁에서 왜적과 맞서 싸운 용맹함과 충성심을 근거로 하여 연원도찰방의 관직에 천거하였다. 전식(全湜)은 연원도(連原道)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백성들을 보살피며 나쁜 폐습을 고치고 교화하여 전보다 살기 좋은 고을로 만드는데 애를 썼다.
이후 전식(全湜)은 호서지방 전체의 군량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어느 날 이덕형(李德馨)이 전식(全湜)에게
“왜적이 곧 쳐들어 올 것이니 창고에 불을 질러 왜적의 양식으로 쓰이지 않도록 하라”
이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전식(全湜)은 오히려
“제 생각을 그렇지 않습니다. 왜적이 이 고을에 쳐들어오는 것과 여기에 곡식이 있는 것과는 전혀 관계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난리 통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불사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 왜적이 오기도 전에 틈을 엿보아 창고에 불을 지르고 서로 곡식을 나눠가려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왜적이 쳐들어온다면야 상관없지만, 창고를 비워낸 뒤에도 왜적이 오지 않는다면 이미 다 태워버린 7천〜8천석이나 되는 그 많은 곡식을 어찌 다시 마련하시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이덕형(李德馨)도 더 이상 창고에 불을 놓으라는 명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 번에도 왜적이 오지 않아 또 한 번 창고와 재산을 지켜냈으며 훗날 왜적과의 두 번째 싸움에서 군량을 원활히 공급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명석한 판단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전식(全湜)의 국가와 백성을 생각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충정이 지극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 시장(諡狀)에 나타난 병자호란 시 의병활동
정묘년(1627, 인조 5) 봄에 오랑캐가 우리를 침범하여 서해(西海) 지방에 이르러 주상께서 강도(江都 : 강화도)에 피난하였는데, 오랑캐 사신인 유해(劉海)가 오랑캐 서찰(書札)을 가지고 와서 주상과 더불어 맹약(盟約)을 맺자고 하여 조정의 논의가 이를 허락하려고 했다. 그래서 공(公)이 분개하며 곧바로 상소(上訴)하여 “천승(千乘)의 존엄한 신분(身分)을 낮추어서 아래로 오랑캐와 맹약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교활한 오랑캐가 속임수를 씀을 예측할 수 없는데, 맹세한 뒤에 다시 등(等)의 말을 올리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 분발하여 명쾌하게 판단하시어, 오랑캐 사신을 다시 돌려보내시고, 급히 제장(諸將)에게 격문을 보내어 임진강을 지키게 해서 적이 감히 강을 건너 남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시고, 관서 지방 장사(將士)에게 명하시어 패강(浿江, 대동강)을 끊게 해서 서쪽 오랑캐가 진퇴(進退)의 근거를 잃게 하여 모두 섬멸하시길 욕망(欲望)합니다.”라고 아뢰었으나, 당시 의신(議臣)들이 굳게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공(公)의 말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또 시장(諡狀)에
병자년(1636년 인조 14년) 정월(正月)에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곡(哭)한 뒤에 곧장 고향에 돌아갔으며, 이어 대사간과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해 겨울에 청나라 군사가 왕경(王京, 서울)에 이르러 주상께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하였다. 공(公)은 이때 상산(상주)에 있었는데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창의하여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고 곡식 수백 섬을 가지고 달려가 충주(忠州)에 주둔하였다. 이때 마침 영남이절군(嶺南二節軍)이 쌍령(雙嶺)에서 패(敗)하고 달아나며 걸려 넘어지고 짓밟히며 돌아오자, 의병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오랑캐 군사가 많이 이르는 것으로 여겨 두려워 부들부들 떨기만 하고 진지를 옮겨 적의 칼날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이 “두려워 말라. 내가 이미 준비한 것이 있다. 무리가 한번 흩어지면 다시 규합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거듭 그 진지를 고수하고 동요하지 않았다. 얼마 뒤 그들에게 물으니 과연 싸움에서 패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공(公)이 군사가 약하여 대적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니 대도(大盜)가 문경(聞慶)으로 진영을 후퇴하였다.
[병자호란 시 영남 의병대장과 활동]
1627년(인조 5년) 2월에 오랑캐가 변경을 침입하여 해서지방을 견제하려 했다. 당시 정경세가 영남 호초사(胡椒事)가 되어 전장에 출전하면서 전식(全湜)에게 영남지방의 관직을 맡기려 하자 이를 다른 사람들이 비방할 것을 염려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전식(全湜)은 어가를 호종하여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이 때 청나라 사신과 화친을 하자고 대신들이 주장하였으나 이때 전식(全湜)은 상소를 올려 이를 반대하였다.
“삼가 들으니 오랑캐의 차사가 또 오고 오랑캐의 국서가 계속해서 이른 것은 임금님과 맹약을 성립시켜 천승의 존엄한 자리를 굽혀 아래로 오랑캐의 천부와 함께 하고자 강요하는 것입니다. 설령 지금 오랑캐와 맹약을 맺음으로 인해서 국가가 안전해 지고 화를 면할 수 있을지라도, 교활한 오랑캐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가지가지여서 오래될수록 더 무리한 요구를 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백성들의 재앙은 결코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임진강 일대를 잘 방비하여 지키는 한편 압록강을 차단하고 전국의 양곡과 장병을 모집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적을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위급한 시기에 임금님의 한 말씀이나 행동은 곧 나라가 흥망성쇠(興亡盛衰)하는 기틀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인조는
“상소문을 살펴보고 그대의 정성을 잘 알았다. 상소의 내용을 마땅히 잘 헤아려 처리하겠다.”
고 하였다.
그 후 1633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청나라 오랑캐들이 갑자기 경성으로 침범하여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 전식(全湜)은 고향에 내려와 있어 임금을 호종하지 못했다.
이에 전식(全湜)은 난리 소식을 듣고 의병을 창의하였다. 그 수가 천여 명에 이르렀다. 충주 노동에 진을 치고 전쟁 준비를 하였다. 다시 충주 북창 일대로 진을 옮겼다가 다시 연원도(連原道)로 옮겼다가 겸암서원으로 자리를 옮겨 군량의 운송을 보살폈다.
전식(全湜)은 문경의 두곡에 있는 진지로 돌아오니 그 전방에는 경안으로부터 관군을 해지우고 1,000여 명이 넘는 오랑캐가 쳐 들어오는 바람에 후방의 지원이 단절된 상태에서 사면초가가 되었다. 이 때 전식(全湜)은 오히려 영남지방의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부서별로 요해처를 차단하고 조령 이남으로부터 함창 이북의 적병들이 통행할 수 있는 곳에 여러 가지 함정을 설치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남한산성에서 패배하고 강화도의 함락 소식을 전해 듣고 슬퍼하면서도 문경지역만큼은 세운 전략에 따라 필사적으로 지켜냈다.
임금이 한양으로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들은 전식(全湜)은 한양으로 달려 올라가서 임금을 뵈옵고 난리에 지친 임금의 마음을 달래고 또한 정사에도 평정심을 찾을 수 있도록 간언하였다.
그러나 이 난중에 예조정랑으로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던 맏아들 전극항(全克恒)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극항(全克恒)은 어가를 호종 도중 도성이 위급하다고 판단한 임금이 관아로 돌아가 성문을 지키라고 명령하여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도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전식(全湜)은 나라를 지키다 오랑캐에게 맏아들을 잃는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 이처럼 부자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한 충정(忠節)의 집안이었다.
이러한 전식(全湜)의 삶이 시호서경(諡號署經)의 시주(諡註)인 ‘위신봉상(危身奉上) 왈(曰) 충(忠)’이라는 충(忠)자 시호(諡號)를 받으신 것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볼 수 있다.
(3) 시장에 나타난 명나라 사신으로서의 역할(役割)
을축년(1625년 인조 3년) 좌승지(左承旨)로 옮겼으나 사체(辭遞)하고, 다시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상사(上使)로써 명(明)나라의 경사(京師)에 조회(朝會)하러 가게 되었다. 이때 청나라 사람이 요동(遼東)에 주둔하며 우리 사신(使臣) 길을 막고 있어, 시절마다 보내는 사신(時節朝京)이 요동 길로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바닷길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파도가 사나워 혹 침몰하여 돌아오지 못할까 봐 각종 사명(使命)을 받든 자들이 모두 꺼리며 가지 않으려고 푸념만 늘어놓았으나, 공(公)이 사명을 받음에 이르러서는 마치 평탄한 길을 나아가듯 조금도 두려워하고 한스러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황성도에 이르자, 큰바람이 일고 파도가 요동쳐 배가 거의 전복될 위기에 처하였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며 안색이 가지가지 변하였으나, 공(公)은 우뚝이 앉아 시(詩)를 지으며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큰 미꾸라지(大鰌)가 배를 끼고 나아가 언덕에 배를 붙여 주고 떠나는 것을 보고 여러 사람이 모두 감탄하며 “신(神)의 도움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황도(皇都)에 들어가자, 황도 사람들이 모두 ‘후덕한 재상이다.’하였고, 등주군문(登州軍門) 무지망(武之望)은 더욱 경례(敬禮)를 융숭(隆崇)히 하였으며, 황조(皇朝) 태사(太史)가 “조선 사신 전식이 조회하러 왔다(朝鮮使臣全湜來朝)”라고 특서(特書)하였으니, 이는 우리 조정의 뜻을 가상히 여겨서이지만 공(公)도 사실 그 영광을 함께한 것이다. 당시 배 안에서 지은 시는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병인년(1626, 인조 4)에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였다.
[사행록(槎行錄)을 중심으로]
사행록(槎行錄)은 전식(全湜)이 1625년(인조 3년) 8월 3일 출발하여 1626년(인조4년) 4월 15일까지 약 9개월 동안 중국 명나라에 성절사 겸 동지사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남긴 기록으로, 날짜별로 도중의 경로와 만난 사람들, 날씨들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날마다 지은 시의 제목을 소주(小註)로 달아 놓았다.
전식(全湜)이 사행(使行)갈 시기인 1625년(인조 3년)에는 후금(後金)이 건국된 지 10여년이 되었고 이미 요양(遼陽)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후금(後金)을 피해 해로로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다녀와야 했다.
해로로 북경을 다녀오는 길은 매우 위험하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1620년(광해 12년)과 1621년 진위사, 1625년 성절사, 1627년 성절사 겸 동지사, 1629년 동지사와 진하 겸 사은사 일행이 배가 침몰하여 익사하는 사고가 있었다.
전식(全湜)이 정사(正使)로 임명된 것은 1625년 5월 13일이다. 이「사행록」은 1625년 8월 3일 배표(拜表)한 일로부터 사행선 4척이 출발하여 1626년 4월 15일 선사포(宣沙浦. 旋槎浦로 개명)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전식(全湜)의 사행은 종전의 일반적인 사행선과 달리 정사와 서장관으로 구성하였기에 4척의 배를 이용하였는데 1선에는 정사(正使)인 전식(全湜)이 타고 2선에는 서장관이, 3선과 4선에는 역관과 군관들이 타고 있었으며, 승선 인원은 1척의 배에 40명씩 총 160명 정도라고 하였다.
이번 사행에도 많은 사고가 있었다. 가는 도중 1명이 급사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제3선이 침몰하여 40명 전원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전식(全湜)이 지은 시(詩)를 통하여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悼渰海諸人(도엄해제인)
海風凄斷海雲屯(해풍처단해운둔)
何處啾啾四十魂(하처추추사십혼)
行客瓣香招不得(행객판향초부득)
撫心無語立黃昏(무심무어입황혼)
[바다에 빠져 죽은 여러 사람을 애도하다.]
처량한 해풍은 바다 구름 속에 머물고
마흔 명의 영혼들은 어디에서 슬피우는가
함께한 사람들은 향을 피워 불러도 오지 않는구나.
말없이 황혼에 서서 마음으로 위로하네.
라고 하면서 함께 사행을 한 사람들이 끝까지 같이 돌아오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안타까워하였다.
이 사고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휼전(恤典)을 거행하였고, 그 유족들에게 쌀과 베를 지급하고 복호를 내렸다. 전식(全湜)은 이와 같이 유족들과 슬픔을 같이 하면서 유족들의 생활도 걱정하고 나라에서 도와주도록 하는 인(仁)의 마음으로 의(義)를 행하는 진정한 군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전식(全湜)의 행로를 이용한 『사행록(槎行錄)』은 후대 육로 사행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식(全湜)의 『사행록(槎行錄)』은 어려운 해로에서의 여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아 남겨진 사행록으로서 백미라 할 수 있다.
한편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성절사 겸 동지사로 바다 건너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가는 ‘송성절겸동지사전공 식 항해조연서(送聖節兼冬至使全公 湜 航海朝燕序)’를 지었다.
이 글에서 이식(李植)은 요동을 거쳐 갈 수 없어 바다로 가야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을 무릅쓴 험난한 항해를 하여야 하고 또한 사신으로 다녀온 후 많은 의심과 비난을 받는 일들이 허다하여 서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임금이 전식(全湜)을 택한 것에 대하여
- 전락 -
그런데 금년에 절사(節使)를 파견할 때에 와서 간원(諫院)이 비로소 사신의 선발을 엄하게 하려 하여 현임(現任)의 근시(近侍)를 보내자고 건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이부가 승정원의 좌승지로 있는 전공(全公)을 택하여 명에 응한 후 소추관(少秋官. 형조참판)으로 직명을 고쳐서 떠나게 한 것이다.
전공(全公)을 말하면 돈후하면서 마음속에 굳게 지키는 바가 있고 근실하면서 법도를 견지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동안 대각(臺閣)의 직책을 두루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 성망(聲望)이 실로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 모두에게 두터이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에 또 근시(近侍)의 반열에 있다가 사신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그가 사대부들로부터 의심이나 비방 같은 것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 후락 -
라고 하면서도 전식(全湜)을 진심으로 걱정하여 길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관역(館驛)에 가서 제사(諸使)를 영송(迎送)하면서, 전식(全湜)의 이번 사행이 우연이 아님을 이야기 하고자 하였다.
이는 이식(李植)이 전식(全湜)의 사람됨을 충분히 알고 아끼면서, 사행(使行)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전식(全湜)의 멸사봉공(滅私奉公)고 정직무사(正直無邪)한 성품(性品)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Ⅲ.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시호서경(諡號署經) 문서(文書)
이 시호서경(諡號署經) 문서는 전식(全湜)이 충간공(忠簡公)으로 시호를 받은 서경문서이다.
司憲府 諡號署經 出(사헌부 시호서경 출)
贈左議政全湜諡號忠簡(증좌의정전식시호충간)
危身奉上 曰 忠(위신봉상 왈 충)
正直無邪 曰 簡(정직무사 왈 간)
康熙三十年 閏七月二十六日(강희30년 윤7월26일)
執義 수결(집의 수결)
掌令 수결(장령 수결)
掌令 수결(장령 수결)
이 시호 서경은 1691년 숙종 17년 윤 7월 26일로 전식(全湜) 사후 49년 만에 충간공(忠簡公)으로 시호를 받은 서경(署經) 문서이다.
충간(忠諫)의
‘충(忠)자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주상을 섬겨 충(忠)이라 하고, 간(簡)은 항상 정직하고 간사함이 없으므로 간(簡)이라 한다.’
는 시주(諡註)이다.
이 시주(諡註)는 전식(全湜)의 삶을 두 글자로 함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호서경(諡號署經)은 고려·조선시대에 관리의 임명이나 법령의 제정 등에 있어 대간의 서명을 거치는 제도로 조선시대에 시호(諡號)를 내리는 과정의 하나이다. 시호(諡號)는 국왕을 제외한 일반인의 경우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하여 증시하였다.
1691년(숙종 17년) 윤 7월에 좌의정 전식(全湜)의 시호(諡號)를 충간(忠簡)으로 정하는 것에 대하여 임금의 낙점을 받은 후 최종적으로 사헌부에서 동의, 확정한 문서이다. 시호(諡號)를 받는 과정 및 사헌부의 역할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전식(全湜)의 시호(諡號)는 1691년(숙종 17년) 윤 7월 21일에 임금에게 충간(忠簡)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이 문서는 숙종 때의 시호시경(諡號署經) 문서로서, 사간원과 함께 시호서경(諡號署經)을 확정하는 사헌부명이 문서에 기재되어 있어 특히 사료적 가치가 크다 하겠다.
특히 선조 때 청난 및 호성공신 신경행(辛景行)의 시호서경(諡號署經)은 보물 1380호로 지정되어 전하고 있으나 숙종 17년에 만들어 진 시호서경(諡號署經)의 문서는 귀할 뿐만 아니라 사간원과 함께 시호서경(諡號署經)을 확정하는 사헌부명이 문서에 기재되어 있어 주목된다.
Ⅳ.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삶
조선 중기 ‘덕 있는 명재상’으로서 나라 안팎으로 칭송을 받았던 전식(全湜)의 삶은 그의 휘(諱)자인 ‘식(湜)’자가 주는 이미지와 같이 맑고 깨끗한 선비의 모습이 떠오른다.
전식(全湜)은 어려서부터 효동(孝童)으로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그의 귀한 인상에서는 비범함이 묻어났다. 배우고 아는 것에 신념을 바친 그는 충효(忠孝)에 대한 덕목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고 곧은 절개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벼슬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국난이 일어났을 때는 임금이 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몸을 일으켜 의병을 소집하였고, 그의 용맹함과 충성심은 일흔이 넘은 나이도 무색할 정도였다. 노장으로서 군대를 통솔하고 군량을 확보하고 관리하는데 경솔함이 없었으며, 그가 세운 작전은 모두 승전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현책(賢策)이었다.
전쟁뿐만 아니라 천재지변의 두려움 앞에서도 언제나 흔들림 없이 앞을 길게 내다보고 판단하는 선경지명을 발휘하였다. 그의 인덕(仁德)에 인조는 많은 의지를 하였으며, 그의 스승이었던 류성룡(柳成龍)을 비롯한 동료 선비들은 언제나 그가 내린 판단을 존중하고 따랐다.
임학사 숙영(任學士叔英)이 ‘고금(古今)에 통달한 이는 정경세(鄭經世)이고, 사리에 통달한 이는 전식(全湜)(通古今鄭經世 達事理全湜)’이라고 한 것은 전식(全湜)은 자신이 배운 학문에서 선현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이치를 정확하게 깨달아 떠도는 수십 가지의 말보다는 그 근본을 성실하게 실천할 것을 강조한 선비였다. 비록 법이 정해져 있다하더라도 그 근본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면 과감하게 고치도록 하였고, 비록 그 상대가 임금이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소신껏 간언하였다.
이렇게 나라를 위하여 온 몸과 정신을 불사르는 그의 단심(丹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더욱 잘 나타났으며, 중국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도중에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명나라에 도착하여 조천궁에서 동지습의를 행하고 하절례를 올렸다. 이때 명나라 대궐에서 전식(全湜)을 맞이한 관리들이 그를 보고 유덕(有德)한 재상이라고 칭송하였고, 태자는 전식(全湜)이 조회를 왔노라고 대서특필하였다.
이처럼 전식(全湜)은 조선에서만 아니라 명(明)나라에서도 인(仁)과 덕(德)과 의(義)를 겸비한 훌륭한 선비로서 인정을 받았다.
인조실록의 전식(全湜) 졸기(卒記)를 보면
전식은 사람됨이 겸손하고 신중하였으며, 지난 혼탁한 조정에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가 반정한 뒤에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으며 나이가 많아 귀향하였는데, 이때에 죽은 것이다.
(丁卯/前知中樞府事全湜卒. 湜爲人謙謹, 在昏朝, 不曾染迹, 及反正, 歷敭淸顯, 以年老歸鄕, 至是卒.)
라고 하면서 전식의 깨끗함과 높은 덕망을 칭송하였다.
이에 충간공(忠諫公)이란 시호의 시주(諡註)를 보면 전식(全湜)의 삶을 두 글자로 함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충(忠)자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주상을 섬겨 충(忠)이라 하고, 간(簡)은 항상 정직하고 간사함이 없으므로 간(簡)이라 한다.’
또한 조경(趙絅)이 쓴 전식(全湜)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보면
비명(碑銘)
훌륭하도다. 전공(全公)이여!
세상에 짝할 자가 누구인가?
인(仁)을 머리에 얹고 다니었고
의(義)를 가슴에 품고 지냈네.
순탄한 길은 남에게 양보하고
병통에 대해서는 반드시 급히 고치려고 하였네.
신중하고 청정(淸淨)함으로써 장수를 누리었고
강경하고 깐깐하면서도 남을 포용하였네.
아! 이와 같은 분을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있으랴?
라고 하였다.
전식(全湜)은 이와 같이 그의 삶이 어렵고 고된 속에서도 어진 행동을 모범으로 보여주었고, 또한 정의(正義)에 대하여 몸소 실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는 의(義)가 아닌 일에 대해서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던 강직한 선비였으며 욕심이 없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가 말년에 즐겨 사용한 호(號)인 사서(沙西)는 사벌국(沙伐國)의 서쪽에 살고 있다는 뜻으로 소박함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또한 자녀들과 제자들의 가르침에 있어서도 잡다하게 많은 것을 알기보다는 기본적인 것을 완벽하게 익혀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행위보다는 하늘을 감동(感動)하게 하는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하고 충효(忠孝)를 행함에 있어서 정성(精誠)과 정의(正義)로 실천할 것을 강조한 진실한 유덕제상(有德宰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 자료】
사서종가, 사서선생문집(全)
사서종가, 사서선생 문집 권5, 「사행록(槎行錄」에서 발췌.
사서종가. 유덕재상 전식의 삶과 임진왜란’에서 발췌.
사서종가, 충간공 사서 전식 종가 유물 탐구, 2022.
사서종택, 충간공 사서종택 소장 유물 유형문화재 지정현황, 2021.
사서집 해제,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문집해제 16, 한국국학진흥원
사기(史記), 권79 「범수열전(范睢列傳)」
숙종실록 23권
옥동서원지편찬위원회, 옥동서원지, 도서출판책과나무, 2019.
이식, 택당집.
인조실록 43권
전씨(全氏) 광장, cafe.daum.net/alljeon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