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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명 Y공작원들을 위하여..
*아래 내용은 추호도 왜곡됨이 없습니다.
(Y란 대북공작원을 통칭하는 말)
Y들은 국가를 위해 특별한 지역에 파견되어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매번 사선을 넘어가 피 흘려 싸웠기에 용맹스런 애국전사로서 조국에 헌신해온 자긍심을 간직한 채, 휴전 중인 분단조국의 보안 사안을 애써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가슴에 간직한 채 많은 세월이 흘러갔고 우리사회도 변화되었기에 이제는 먼 옛이야기로 흘려들어도 서운함이 크진 않았으나 최근 국가 헌신에 관해 계속 헛발질하는 정책당국의 모양새를 보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 수년전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것 중, Y들이 국가에 헌신한 것이 원인되어 사회생활 중 핍박받았던 사안들에 대해 보상에 관한 법률제정 당시 예민한 과거사를 접하면서 특수임무와 무관한 문외한들이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공청회도 없이 제멋대로 만든 법률은 중요한 부분이 누락되어 이에 대해 보상법 개정을 통해 구제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Y들은 국가를 위해 특별한 희생을 전제로 명령에 따라 사선을 넘어가서 공적을 세워다는 것을 한때는 그것에 대한 자긍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한 Y들에게 누가 그런 지휘 지침을 내렸는지 알 수 없으나, 믿었던 군대에서 어느날 갑자기 사회로 내쳐져 마치 부모를 잃은 고아가된 듯, 한동안 사회적응은 깊은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지 못한 채, 그 토록 믿었던 군대에서 배신하지 않고 충성을 다해 왔는데, 대책 없이 내쳐져 불안한 마음에도 사회로 나왔기에 그간 군에서 배운 강인한 삶의 의지와 기백을 살려서 사회인으로서 정착을 위해 각자 부단하게 노력했으나 생활에 기반을 채 갖추기도 전에 사회의 강력 사건이 발생되면 Y들은 특수부대원이란 이유로 매번 직장으로 형사 여럿이 찾아오거나 또는 새벽 시간에 연행되어 수사기관의 공권력에 의해 수년 동안 지속적으로 끌려 다니면서 모진 고문을 당하는 곤욕을 치른바 있습니다.
그 후 40여년 넘게 살아오면서 현재까지 전과 사실이 없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당시 Y들의 인권이 다방면에서 얼마나 짓 밟혔는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지난 과거를 회상하면 국가에 충성한 것이 원인되어 공권력에 의해 불편하고 부당한 핍박을 끝임없이 받아 삶의 의지와 희망마저 상실한 채, 인생행로가 바뀌었고 사선에서 수차례 겪은 생사의 고비는 정신적 충격으로 남아 현재까지 극한 상황에서 천운으로 살아남은 심각한 후유증을 인지하지 못했고 또한 부상의 후유증에 고통을 받으며 어렵게 살아온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관련된 피해 의식은 인성까지 뒤바꿔 놓았기에 이러한 피해 의식은 살아있는 동안은 지속될 것 같습니다.
남몰래 겪고 있는 고통으론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적군과 교전 중에 부상을 입어 임무가 종결된 마지막작전은 해가 뜬 아침 시간대에 적군을 납치하기 위해 매복 지점에서 클레모어 4발로 기습공격을 했기에 공격당한 또래의 적병들이 삶을 갈구하는 눈을 마주보면서 손 사례치는 그들을 근접거리에서 십수명을 사살한 기억들은 아직도 꿈속에서 낫과 곡괭이를 들고 때지어 공격해오는 적군과 싸우다 식은땀으로 온 밤을 지새우는 불안한 현상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삼총사로 절친했던 사회친구들, 그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려운 가사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일찍 같다 오자는 나의 간곡한 권유로 삼총사 3명이 같은 부대를 동시에 지원하여 1년간 혹독한 훈련을 받고 각자 예하부대에서 작전에 투입돼 그중 한명이 북한에서 체포됐습니다. 그 사실은 내가 특공대의 척후가 되어 여름밤 장대비를 맞으며 칡흙같은 DMZ 숲속을 헤집고 지뢰제거와 침투루트를 개척하면서 북상하다 고지위의 적GP에서 스피커를 통해 낯익은 목소리로 나와 동료들 이름을 들먹이며 귀순을 독려하는 사회친구의 방송을 들었기에 그는 북측에 체포되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당국이 북한에 살아있는 Y들을 모두 전사자로 처리했기에 이점에 대해 당시 예하부대 지휘관들의 인명경시 풍토에서 빚어진 왜곡된 공작 보고서를 여러 방향에서 재검토해야 될 것이고 이 작전을 명령한 자들은 자신들의 입지와 정당성을 내세우려는 측면이 깊게 깔려있어 이런 문제엔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간파해야 될 것입니다.
그 뒤 부상을 입고 수도육군병원에서 51후송병원으로 후송되어 입원 치료를 받고 있던 나는 어느 날 전방에서 헬기로 긴급히 후송된 환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역시 나의 친구였다. 오른발이 지뢰에 절단된 채, 기초훈련을 받고 예하부대로 흩어져 2년 만에 만난 그는 울먹이듯 나를 불렀다. 동행한 부대원들이 수술을 위해 지체할 수 없다는 만류로 그와 대화를 못하고 응급실로 보냈으나, 그것이 마지막 이별을 한 것으로 그는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당일 파상풍으로 전사해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특수공작원 신분으로 소속된 부대에서 졸지에 사회로 밀려나온 동료Y들은 비록 4년이란 짧은 군 생활을 겪었다 하여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쳤고 무소불위로 길들여졌기에 이들이 사회생활에 적응하기란 개인별로 차이는 있으나 적응하는 과정이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군 당국이 전역 시 약속한 후속조치가 전혀 없었기에 열악한 환경에서 나름대로 가정을 이루고 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그중 일부 Y들이 사회적응이 서툴러 군대에서 하던 습관처럼 의지하고 함께 다니다 범죄단체로 처벌을 받은바 있습니다.
이 역시 국가의 책임입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인간을 병기로 양성하였고 특히 1971년 녹음이 짚어지는 시기에 집중적으로 침투시켜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음에도 경험자란 이유로 계속 투입시켰으나 운 좋게 살아난 Y들이 부담스러워 용도폐기 차원에서 당초 약속한 취업알선, 사회정착지원. 등 후속조치 없이 지휘관의 지침에 의해 일거에 사회로 내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 특수요원 공격조와 엄호조 등 8명이 강력사건 발생시 언론보도를 통해 특수부대원들이 마치 범인인양 분위기를 확산시켰고 정보당국은 Y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보안사찰을 통해 수사기관의 소재파악에 협조하여 핍박을 지속적으로 받게 했으며, 이 땅에서 설자리를 잃었다는 기막힌 사실에 다혈질의 Y들은 이를 참아내지 못하고 훈장을 받은 8명중에 절반인 4명이 자살을 택했습니다.
자살을 택한 Y중에 난곡동 단칸방에 2살과 3살짜리 코흘리개와 처를 남겨두고 생을 마감한 Y가 유독 마음에 걸립니다.
작전개시 오전8시경 적병들과 교전 중 두발의 관통상을 입은 그때 언덕위에서 지원 사격을 하던 코흘리개를 둔 Y의 부축을 받았으나 당시 상황에선 도저히 살아서 탈출할 수 없다는 판단에 적에게 노획품을 남기지 않으려고 부축하던 Y에게 나의 총을 건네주었고 가슴에 착용한 수류탄의 안전핀을 이빨로 뽑아버렸다. 왼팔은 동맥이 끊겨 붉은 선열을 내뿜고 복부에서 흐르는 피는 위장한 적군 복장이 흥건히 적셔진 그 모습에 당황해 하던 Y에게 탈출하라 했으나 빚 발치는 적의 집중사격에도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추격하는 적병들에게 대응사격을 하던 그의 남다른 전우애를 보았기에, 그의 자살 소식은 눈시울을 적시게 해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국가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이 커져 울분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휴전협정 위반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피 흘려 싸운 전사들을 북한처럼 영웅대접은 못해주어도 전역 시 약속했던 후속조치도 없이 무일푼으로 내보내놓고 먹고살기 위해 한참 일할 시기에 왜? 그 토록 줄기차게 죄인 취급을 했습니까? 그렇게까지 불법적으로 잡아다가 족쳐야 될 이유가 있었다면 왜? 무책임하게 방치했습니까?
그럼에도 분단된 국가현실을 우선시하여 군의 특수한 보안사항을 함구해 왔으나 역대정권에선 Y들이 요구하는 것을 모른척하던 이 문제를 정치적 논리가 바뀌면서 노무현 정부가 특수임무수행자 관련법을 제정해 주었습니다. 때문에 이제 현 정부는 선친의 정권하에서 빚어진 부산물에 대해 누락된 부분과 미흡한 법률에 대해 법 개정을 재검토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과거 선친의 명령을 따른 것이 원인이 된 민족분단의 부산물에 대해 미완의 명예회복을 추슬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 국가가 존속하는 이상 암호명을 가진 호국전사들의 진정한 명예를 남은 임기 동안에 상당한 예의를 갖춰서 회복시켜 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국가 상벌정책이자 휴전상태에 있는 이 나라 수호의 근간이 되는 정의로운 문제입니다.
또한 북한군이 판문점에 즐비하게 늘어놓은 동료Y들의 시신들을 당시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았던가요? 이유야 어떠하든 국가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적지에서 임무수행 중 적군이 설치한 지뢰 또는 적의 이동초소에 의해 희생된 전사들에게 국가라는 존재로선 도저히 그렇게 행할 수 없는 신의와 정도를 져버렸기에 이점에 대해 어떠한 비난을 들어도 마땅할 것입니다.
국군통수권자는 책임과 성의를 다하여 Y들에게 현실적인 보상방안과 덧붙여 상당한 예의를 갖추어 사과할 것도 요구합니다.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해묵은 비밀들이 세간에 유포된 이후, 정책당국이 무엇을 왜? 어떻게 처리 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시킨 자는 누구였고? 그나마 추슬러준 자는 누구였나요? 노무현 대통령집권 당시 본인이 청와대에 제기한 면담요청이 받아들여져 2004년 7월13일 청와대 윤광웅 국방보좌관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 자리에서 714억을 당정간 협의를 거쳐서 추가배정되어 특수임무수행자보상금 최고금액이 2억5천5백에서 2억8천5백으로 3천만원이 상향조정된 바, 전체 특수임무수행자 보상금에 일괄적용되도록하여 최하 600백~1천5백 가량이 모두 보상금액에 포함되게 했던 사실을 돌이켜보면 당시 윤광웅 국방보좌관의 결재와 문재인 민정수석의 결재를 거쳐서 최종 노무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낸 사실을 오늘에 이르러 이를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무관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완전히 외면한 것이다. 그러면서 朴정부가 '비정상을 정상으로' 이런 것을 논할 자격이 있습니까? 휴전 상태에서 피 흘려 싸운 호국영령들을 배신하면서.. 무엇인들 잘되길 바랍니까..!!!
1968년1월21일 북한군의 청와대 기습 도발에 동년 6월~10월까지 Y들이 대응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치자 북한은 10월말 울진・삼척으로 보복공격에 대량침투 등, 당시 전후방을 막론하고 북한군의 대남도발이 극심하던 시기에 사선을 넘어가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임무수행을 위해 헌신해온 수많은 Y들이 젊은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았고 가족들도 어디로 갔는지 생사도 모른 채 대부분 음지에서 산화했기에 현재 살아있는 Y들의 목소리가 작다고 하여 관련 법률제정에 선구자 역할을 해온 Y들을 또 다시 왜곡된 법률로 떠넘기거나 적당히 모면하려는 사고력은 먼 훗날 역사의 심판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국가가 나서서 암호명을 가진 살아있는 호국전사들을 위해 진정한 위로와 명예가 회복될 수 있는 현실적인 조치를 바라는 것입니다. 황혼을 맞아 젊은 날 인간이 누려야 될 행복 추구권이 말살되었고 팔다리가 절단된 채 불구자로 어렵게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면 울분과 탄식만 흘러나옵니다. 이제 분단의 또 다른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Y들의 요구를 법률의 맹점에 떠넘기려 하지 말고 "아픔을 함께하면 반이 될 것이다"라는 각오로 사선에서 함께 싸운 전우의 심중으로 돌아가 현실적인 면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접근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당사자들이 요구하는 법률개정에 단 한번이라도 개정에 필요한 타당성을 검토해본 일이 있었나요? 군대식으로 단심에 끝내려는 의도로 이 문제를 깔아뭉개거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미봉책을 쓴다면 역사는 이런 사실을 현 정부의 실정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고 끝없이 재론 될 것입니다.
제244회 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제정된 입법취지와 법률제정의 개념, 그리고 신의와 정도를 져버린 정책당국은 아직도 부끄럼이 느껴지지 않는가요? 그리고 기 지급한 보상법 집행에 위법사항이 없었다 하여도 집행에 있어 운영상 형평성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겁니까? 보상심의 관련 자료에 의하면 상당부분 잘못 집행된 사례가 있어 우리Y들은 울분을 더욱 참을 수 없습니다.
국가경제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Y들은 무식함이 소산이기에 자신들이 전하고 싶은 겹겹이 얼룩진 사연들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을 다할 수 없어 가슴속의 응어리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어 Y들의 과거사에 대해 공청회도 없이 문외한들이 만들어 놓은 관련 법률의 개정을 통하여 억울한 Y들의 명예가 회복되도록 보상법 개정과 시행령을 통해 구제해 줄 것을 거듭 요구합니다.
- 대한민국 첩보요원 전우회장 -
(초기 활동 자료를 다시 올립니다.)